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전기정치중앙 집권 체제의 정비

수양 대군의 왕위 찬탈-계유정난

세조가 새벽에 권남(權擥, 1416~1465)⋅한명회(韓明澮, 1415~1487)⋅홍달손(洪達孫, 1415~1472)을 불러 말하기를, “오늘은 요망한 도적을 소탕하여 종사(宗社)를 편안히 하겠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약속과 같이하라. 내가 깊이 생각해보니 간당(姦黨) 중에서 가장 간사하고 교활한 자로는 김종서(金宗瑞) 만한 자가 없다. 저자가 만일 먼저 알면 일은 성사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한두명의 역사를 거느리고 곧장 그 집에 가서 선 자리에서 베고 달려 아뢰면, 나머지 도적은 평정할 것도 없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내가 오늘 여러 무사를 불러 후원에서 과녁을 쏘고 조용히 이르겠으니, 그대들은 늦게 다시 오라” 하고, 드디어 무사를 불러 후원에서 과녁을 쏘고 술자리를 베풀었다. ……(중략)……

세조한명회에게 이르기를, “불가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 계책이 장차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하니, 한명회가 말하기를, “길옆에 집을 지으면 3년이 되어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큰일이겠습니까? 일에는 역(逆)과 순(順)이 있는데, 순으로 움직이면 어디를 간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모의(謀議)가 이미 먼저 정하여졌으니, 지금 의논이 비록 통일되지 않더라도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공(公)이 먼저 일어나면 따르지 않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중략)……

세조는 드디어 활을 끌고 일어서서, 말리는 자를 발로 차고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기를, “지금 내 한 몸에 종사(宗社)의 이해가 달려있으니, 운명을 하늘에 맡긴다. 장부가 죽으면 사직(社稷)을 위해 죽을 뿐이다. 따를 자는 따르고, 갈 자는 가라. 나는 너희들에게 강요하지 않겠다. 만일 고집하여 사기(事機)를 그르치는 자가 있으면 먼저 베고 나가겠다. 빠른 우레는 미처 귀도 가리지 못하는 것이니 군사는 신속한 것이 귀하다. 내가 곧 간흉(姦凶)을 베어 없앨 것이니, 누가 감히 어기겠는가?” 하고, 중문에 나오니 자성왕비(慈聖王妃)가 갑옷을 가져다 입혀주었다. 드디어 갑옷을 입고 가동(家僮) 임어을운(林於乙云)을 데리고 단기(單騎)로 김종서의 집으로 갔다. ……(중략)……

세조가 양정으로 하여금 칼을 품에 감추게 하고 유서(柳溆)를 정지시키면서 김종서의 집에 이르니, 김승규가 문 앞에 앉아 신사면(辛思勉)⋅윤광은(尹匡殷)과 얘기하고 있었다. 김승규가 세조를 보고 맞이하였다. 세조가 그 아비 김종서를 보기를 청하니, 김승규가 들어가서 고하였다. 김종서가 한참 만에 나와 세조가 멀찍이 서서 앞으로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들어오기를 청하니, 세조가 말하기를, “해가 저물었으니 문에는 들어가지 못하겠고, 다만 한 가지 일을 청하려고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김종서가 두세 번 들어오기를 청하였으나 세조가 굳이 거절하니, 김종서가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왔다. 김종서가 나오기 전에 세조는 사모(紗帽) 뿔이 떨어져 잃어버린 것을 깨달았다. 세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정승(政丞)의 사모뿔을 빌립시다” 하니, 김종서가 창황(蒼黃)히 사모뿔을 빼어 주었다. 세조가 말하기를, “종부시(宗簿寺)에서 영응대군(永膺大君) 부인의 일을 탄핵하고자 하는데, 정승이 지휘하십니까? 정승은 누대(累代) 조정의 훈로(勳老)이시니, 정승이 편을 들지 않으면 어느 곳에 부탁하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임어을운이 나오니 세조가 꾸짖어 물리쳤다. 김종서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참 말이 없었다. 윤광은⋅신사면이 굳게 앉아 물러가지 않으니 세조가 말하기를, “은밀히 청할 것이 있으니, 너희들은 물러가라” 하였으나 여전히 멀리 피하지 않았다. 세조김종서에게 이르기를, “또 청을 드리는 편지가 있습니다” 하고, 종자(從者)를 불러 가져오게 하였다. 양정이 미처 나오기 전에 세조가 임어을운을 꾸짖어 말하기를, “그 편지 한 통이 어디 갔느냐?” 하였다. 호조의 것을 바치니 김종서가 편지를 받아 물러서서 달에 비춰 보는데, 세조가 재촉하니 임어을운이 철퇴로 김종서를 쳐서 땅에 쓰러뜨렸다. 김승규가 놀라서 그 위에 엎드리니, 양정이 칼을 뽑아 쳤다. ……(중략)……

세조가 순청(巡廳)에 이르러 홍달손을 시켜 순졸(巡卒)을 거느리고 대궐 뒤편의 시좌소(時坐所)로 달려가서 권남을 시켜 입직 승지를 부르게 하였다. 최항(崔恒)이 나오자 세조가 손을 잡고 최항에게 이르기를, “황보인(皇甫仁)⋅김종서⋅이양(李穰)⋅민신(閔伸)⋅조극관(趙克寬)⋅윤처공(尹處恭)⋅이명민(李命敏)⋅원구(元矩)⋅조번(趙蕃) 등이 안평대군(安平大君)에게 붙고,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李澄玉), 경성부사 이경유(李耕㽥), 평안도 도관찰사 조수량(趙遂良), 충청도 도관찰사 안완경(安完慶) 등과 연결하여 불충한 짓을 공모하였는데 거사할 날짜까지 정하여 형세가 심히 위급하니 조금도 시간 여유가 없다.

김연(金衍)⋅한숭(韓崧)이 또 주상의 곁에 있으므로 와서 아뢸 겨를이 없어서 이미 적괴(賊魁) 김종서 부자를 베어 없애고 그 나머지 잔당을 지금 아뢰어 토벌하고자 한다” 하고, 계속하여 환관 전균(田畇)을 불러 말하기를, “황보인⋅김종서 등이 안평대군의 중한 뇌물을 받고 전하께서 어린 것을 경멸하여 널리 자기 무리의 사람들을 심어 놓고, 번진(藩鎭)과 교통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기를 꾀하여 화가 코 앞에 닥쳤으니 형세가 궁하고 일이 급박하다. 또 적당(賊黨)이 전하의 곁에 있으므로, 지금 어쩔 수 없이 옛 사람의 선발후문(先發後聞)1)의 일을 본받아 이미 김종서 부자를 잡아 죽였으나, 황보인 등이 아직도 남아있으므로 지금 처단하기를 청하는 것이다. 너는 속히 들어가 아뢰어라”라고 하였다. ……(중략)……

김종서 부자와 황보인⋅이양⋅조극관⋅민신⋅윤처공⋅조번⋅이명민⋅원구 등을 모두 저자에 효수(梟首)하니, 길 가는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어 심지어 그 죄를 헤아려서 기왓돌로 때리는 자까지 있었다. 여러 사(司)의 비복(婢僕)들 또한 김종서의 머리를 향해 욕하고, 환시(宦寺)들은 김연(金衍)을 발로 차고 그 머리를 짓이겼다. 뒤에 저자 아이들이 난신(亂臣)의 머리를 만들어서 귀신 놀이를 하며 부르기를, “김종서 세력에 조극관 몰관(沒官)하네” 하였다. 이날 밤에 달이 떨어지고, 하늘이 컴컴하여지자 누가 쏘았는지 알 수 없는 화살이 떨어졌다. 위사(衛士)가 놀라 고하니, 이계전(李季甸)이 두려워하여 나팔 불기를 청하였다. 세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무엇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는가? 조용히 진압하라”라고 하였다.

단종실록』권8, 1년 10월 10일(계사)

1)선발후문(先發後聞) : 『논어』 헌문편에 나오는 이야기로 임금을 시해한 역적은 누구라도 윗사람에 아뢰지 않고 먼저 처리한 후에 보고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世祖晨召權擥⋅韓明澮⋅洪達孫曰, 今日當掃妖賊, 以安宗社, 諸君宜如約. 我熟思之, 姦黨之最姦黠者, 莫如金宗瑞, 彼若先知, 則事不集矣. 我率一二力士, 徑詣其家, 立斬之, 馳啓, 餘賊不足平也. 君等以爲何如. 皆曰可. 世祖曰, 我今日招諸武士, 射的後園, 從容諭之, 君等向晩更來. 遂招武士射的後園, 設酌. ……(中略)…… 世祖謂明澮曰, 人多不可, 計將安出. 明澮曰, 作舍道旁, 三年不成. 小且猶然, 況大事乎. 事有逆順, 以順而動, 何往不濟, 謀已先定, 今議雖不一, 容得已乎. 請公先起, 宜無不從者. ……(中略)…… 遂援弓起立, 蹴其止者, 指天誓曰, 今吾一身, 宗社利害係焉, 托命於天, 丈夫死則死於社稷而已. 從者從, 去者去, 吾不汝强. 如有執迷誤機者, 先斬而出. 疾雷不及掩耳, 兵貴拙速. 吾卽剪除姦兇, 孰敢枝梧. 及中門, 慈聖王妃提甲被之. 遂衷甲, 率家僮林於乙云, 單騎往宗瑞家. ……(中略)…… 世祖令汀懷劍, 止漵, 而至宗瑞家, 則承珪坐門前, 與辛思勉⋅尹匡殷語. 承珪見世祖迎謁, 世祖請見其父, 承珪入告. 宗瑞良久乃出見, 却立不前, 請入. 世祖曰, 日暮, 恐不及門, 只爲請一事來. 宗瑞請入再三, 世祖固拒, 宗瑞不得已就前. 宗瑞之未出也, 世祖覺帽角落失. 世祖笑曰, 借政丞帽角. 宗瑞蒼黃抽角進之. 世祖曰, 宗簿欲劾永膺夫人事, 政丞指揮. 政丞累朝勳老, 政丞不右, 則何所托哉. 於是林於乙云進, 世祖叱之退. 宗瑞仰天, 良久不言. 匡殷⋅思勉堅坐不退, 世祖曰, 有密請, 汝等其退. 猶不遠避. 世祖謂宗瑞曰, 亦有請簡. 乃召從者取來. 汀未及進, 世祖叱於乙云曰, 其一簡何去. 以進知部, 宗瑞受簡, 退照月視之, 世祖促之, 於乙云以鐵椎擊宗瑞, 仆地. 承珪驚, 伏其上, 汀乃拔劍擊之. ……(中略)……

世祖至巡廳, 令達孫領巡卒, 殿後馳詣時坐所, 使擥召入直承旨. 崔恒出來, 世祖握手謂恒曰, 皇甫仁⋅金宗瑞⋅李穰⋅閔伸⋅趙克寬⋅尹處恭⋅李命敏⋅元矩⋅趙藩等, 黨附安平, 連結咸吉道都節制使李澄玉⋅城府使李耕㽥⋅平安道都觀察使趙遂良⋅忠淸道都觀察使安完慶等, 共謀不軌, 刻日擧事, 勢甚危迫, 間不容髮. 金衍⋅韓崧, 又在上側, 不暇來啓, 已剪除賊魁宗瑞父子, 其餘支黨, 今欲啓討. 仍召宦官田畇曰, 皇甫仁⋅金宗瑞等, 受安平重賂, 輕蔑殿下幼沖, 廣植黨援, 交通藩鎭, 謀危宗社, 禍在朝夕, 勢窘事迫. 且賊黨在側, 今不獲已法古人先發後聞之擧, 已捕殺金宗瑞父子. 皇甫仁等尙在, 今請處斷, 爾速入啓. ……(中略)…… 宗瑞父子⋅仁⋅穰⋅克寬⋅伸⋅處恭⋅藩⋅命敏⋅矩等, 竝梟首于市路, 人無不快之, 至有數其罪, 以瓦礫擊之者. 諸司婢僕亦罵宗瑞頭, 宦寺等蹴衍椓其頭. 後, 市童作亂臣之頭而爲儺戱. 呼曰, 金宗瑞有勢, 趙克寬沒官. 是夜, 月落天暗, 有流矢墮. 衛士驚告, 季甸懼, 請吹角. 世祖笑曰, 何足怪耶, 宜靜以鎭之.

『端宗實錄』卷8, 1年 10月 10日(癸巳)

이 사료는 1453년(단종 1년), 즉 계유년에 수양대군(首陽大君, 1417~1468)이 문종의 유탁(遺託)을 받은 김종서(金宗瑞, 1383~1453)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그와 그의 아들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내용이다.

1452년 12세의 어린 나이로 단종(端宗, 재위 1452~1455)이 조선 제6대 왕으로 즉위하자 조정은 고명대신(顧命大臣)에 의해 장악되었다. 문종(文宗, 재위 1450~1452)이 황보인(皇甫仁, ?~1453)⋅김종서의정부 대신들에게 단종을 보필해 줄 것을 유명(遺命)으로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황보인⋅김종서 등은 의정부 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통해 막강한 정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고, 왕권은 상대적으로 허약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신권의 팽창이 왕권 자체를 위협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왕권을 위협한 것은 수양대군을 위시하여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던 왕족들이었다. 특히 수양대군과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은 야망과 수완이 출중하고 비범한 인물들로서 경쟁적으로 세력 확장을 꾀하였다. 안평대군에게는 문사(文士)들이 모여들었으나 수양대군에게는 권남(權擥, 1416~1465)⋅한명회(韓明澮, 1415~1487)⋅홍달손(洪達孫, 1415~1472)⋅양정(楊汀, ?~1466) 등 많은 무인이 모여들었다.

수양대군은 수하의 만류에도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리고 1453년 4월에 신숙주(申叔舟, 1417~1475)를 막하에 끌어들이는 한편, 홍달손⋅양정 등 심복 무사를 양성하기 시작했고, 6개월 뒤에 드디어 거사를 감행하였다.

수양대군은 우선 김종서를 제거하였다. 당시 김종서는 병권을 쥐고 있었는데, 조정 대신들의 구심체였기에 그를 제거하지 않고는 거사를 성공하기가 어려웠다. 같은 해 10월 10일 밤 수양대군은 유숙⋅양정⋅임어을운 등을 데리고 김종서를 찾아가 간계를 써서 그를 철퇴로 죽였으며, 영의정 황보인,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판서 민신(閔伸), 우찬성 이양(李穰) 등은 왕명을 핑계로 대궐로 불러들여 참살하였다. 또한 친동생 안평대군붕당 모의의 주역으로 지목해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사사하였다. 게다가 자신의 형제 중 뜻을 달리했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을 유배시켜서 죽였으며, 단종을 상왕(上王)으로 밀어 낸 후 다시 노산군(魯山君)으로, 그리고 서인으로 전락시켜 죽였다.

계유정난이 벌어졌을 때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成三問, 1418~1456)정인지(鄭麟趾, 1396~1478)⋅최항(崔恒, 1409~1474)⋅신숙주⋅하위지(河緯地, 1412~1456) 등은 중립을 지켰거나 수양대군에게 동조하였다. 이들은 재상 중심 체제를 주장하고 있었으나 의정부의 핵심인 김종서⋅황보인 등의 세력이 지나치게 확대되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이 때문에 수양대군 역시 이들을 애써 적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수양대군이 집권한 뒤에 집현전 학사 출신들은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기까지 했다. 1453년 10월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은 정권과 병권을 독차지하였고, 1455년(단종 3년) 윤6월 양위의 형식을 취하였으나 실제로는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 세조대 정치를 보는 시각과 생육신」,『역사와 현실』64,김용흠,한국역사연구회,2007.
「세조의 집권과정과 순흥」,『중앙사론』10⋅11합,진성규,중앙대학교 사학과,1998.
「세조대 왕위의 취약성과 왕권강화책」,『조선시대사학보』1,최승희,조선시대사학회,1997.
『세조의 집권과 국정운영에 관한 연구』,,최정용,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1998.
저서
『조선조 세조의 국정운영』, 최정용, 신서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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