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전기정치유교적 통치 질서의 확립

경연 개최

간관(諫官)이 상소(上疏)하였다.

“……(중략)…… 신 등은 듣건대, 임금의 마음은 정치를 하는 근본입니다. 마음이 바르면 모든 일이 따라서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온갖 욕심이 이를 공격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존양성찰(存養省察)의 공부1)를 지극히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옛날 순(舜)임금은 삼가고 두려워하였으며, 탕왕(湯王)과 문왕(文王)은 두려워하고 조심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태평성세(太平盛世)를 이룩한 근본입니다. 조금이라도 이와 달리하여 아첨하는 말을 달게 여긴다면 공광(孔光)과 장우(張禹)2) 같은 무리들이 나와 마음이 날로 안일해질 것이며, 신선(神仙)을 좋아하다면 문성 장군(文成將軍)과 오리 장군(五利將軍)3)과 같은 무리가 나와서 마음이 날로 방탕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자는 자기 마음을 바로잡을 것을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앞 시대의 유학자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연의(大學衍義)』4)를 지어 경연(經筵)에 올렸습니다. 책 첫머리에 제왕의 정치하는 순서를 싣고, 다음에 제왕의 학문하는 근본을 게재하였는데, 임금의 몸과 마음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강(綱)이라는 것입니다. 맨 앞에 도술(道術)을 밝히고 인재를 변별하며, 정치하는 대체(大體)를 살피고 백성의 마음[民情]을 살피는 것은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요체입니다. 다음의 경외(敬畏)를 숭상하고 나태함과 욕심을 경계하는 것은 성의(誠意)⋅정심(正心)의 요체입니다. 그 다음에 언행을 삼하고 위엄과 예의를 바르게 하는 것은 수신의 요체입니다. 그 다음에 배필(配匹)을 소중히 여기고 내치(內治)를 엄히 하며, 국본(國本)을 정하고, 척속(戚屬)]을 가르치는 것은 제가(齊家)의 요체이니, 이것이 이른바 목(目)입니다. 맨 앞에는 성현의 교훈이 되는 글을 게재하고 다음에는 고금의 사실을 게재하여 임금이 마땅히 알아야 할 이치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자세히 이 책에 나타나 있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사저에 계실 때부터 독서하기를 좋아하셨으며, 왕위에 오르신 후에는 날마다 부지런히 강론하시니, 그 궁리(窮理)⋅정심(正心)의 학문과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방법에 대하여 진실로 이미 밝게 아시고, 익숙하게 강습하셨을 것입니다. 우매한 신들이 어찌 감히 다시 의논하겠습니까?

그러나 경연을 설치한 후 한갓 그 명칭만 있을 뿐이었지, 나아가 강론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전하의 생각으로는 반드시 ‘넓은 집과 큰 뜰 안의 어느 곳이든 모두 학문하는 곳이니, 어찌 반드시 일정한 법도에 얽매여 날마다 경연에 나간 다음에야 학문을 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신들은 생각하옵건대, 임금의 학문은 한갓 외우고 강설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 선비를 맞이하여 좋은 말을 체납하는 것은 첫째는, 어진 사대부를 접견하는 때가 많음으로써 그 덕성(德性)을 훈도하기 위한 것이며, 둘째는,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을 가까이 하는 때가 적음으로써 그 나태한 마음을 진작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더구나 창업한 임금은 자손들의 모범이 되니, 전하께서 만약 경연을 급무로 여기지 않으신다면 후세에서 이를 핑계로 삼아서, 그 폐단이 반드시 학문을 하지 않는 데에 이를 것이니,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날마다 경연에 납시어 『대학(大學)』을 강론하게 하여, 격물⋅치지⋅성의⋅정심의 학문을 극진히 하시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공효에 이르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태조실록』권2, 1년 11월 14일(신묘)

1)존양(存養)은 정(靜)할 때에 마음의 본체를 잘 간직하여 천리(天理)를 보존하는 것을 말하며, 성찰(省察)은 동(動)할 때에 인욕(人慾)이 있는가를 잘 살펴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2)공광(孔光)과 장우(張禹) : 한 문제 때의 간신들로 이들 때문에 전한은 끝내 멸망하였다.
3)문성 장군(文成將軍)과 오리 장군(五利將軍) : 한 무제 때의 방사(方士)들로, 문성 장군은 소옹(少翁)이며, 오리 장군은 난대(欒大)인데, 이들은 귀신을 부르는 방술(方術)로 유명하여 장군에 제수되었으나 뒤에 속임수임이 밝혀져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4)송나라 유학자 진덕수(眞德秀)가 주자의 『대학장구(大學章句)』를 근본으로 하여 왕도 정치를 서술한 것이다. 주자(朱子)는 일찍이 『대학(大學)』의 명명덕(明明德)⋅신민(新民)⋅지어지선(至於至善)을 삼강령(三綱領),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8조목(八條目)으로 나누었는데, 이 중 명명덕은 수기, 신민은 치인이며, 다시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은 명명덕, 제가⋅치국⋅평천하는 신민으로 분속시킨 바, 또한 명명덕 중에 격물⋅치지는 궁리(窮理) 공부로서 지(知)에 해당하고, 성의⋅정심⋅수신은 정심(正心) 공부로서 행(行)에 해당한다.

諫官上疏曰, ……(中略)…… 臣等聞, 君心出治之源也. 心正則萬事隨以正, 不正則衆欲得而攻之. 故存養省察之功, 不可不至. 大舜之兢兢業業, 湯⋅文之慄慄翼翼, 乃其泰和雍熙之本也. 一或反是, 佞諛是甘, 則孔光⋅張禹之徒進, 而心日以逸, 神仙是慕, 則文成⋅五利之徒出, 而心日以蕩. 然則, 有天下國家者, 其可不思所以正其心乎. 先儒眞德秀作『大學衍義』, 以進經筵, 其書首之以帝王爲治之序, 次之以帝王爲學之本, 莫不自身心始, 此所謂綱也. 首之以明道術辨人材審治體察民情者, 格物致知之要也. 次之以崇敬畏戒逸欲者, 誠意正心之要也. 次之以謹言行正威儀者, 修身之要也. 次之以重配匹嚴內治定國本敎戚屬者, 齊家之要也, 此所謂目也. 首之以聖賢之訓典, 次之以古今之事實, 人君所當知之理, 所當爲之事, 備見於此. 恭惟殿下自在潛邸, 好觀書史. 洎登大位, 日講孜孜, 其於窮理正心之學, 修己治人之方, 固已知之明, 講之熟矣. 臣等寡昧, 何敢有所擬議哉. 然而經筵之設, 徒有其名, 而未聞進講之時, 殿下之意, 必謂廣廈大庭, 無地非學, 何必拘於常典, 日御經筵, 然後以爲學哉. 臣等以爲, 人君之學, 非徒誦說, 其所以日御經筵, 迎訪採納者, 一, 以接賢士大夫之時多, 而薰陶其德性. 二, 以親宦官宮妾之時少, 而振起其怠惰, 且創業之主, 子孫之所儀刑也. 殿下若以經筵爲不急, 則後世藉以爲說, 其流必至於不學, 豈細故哉. 伏願殿下日御經筵, 進講『大學』, 以極格致誠正之學, 以致修齊治平之効, 上兪允.

『太祖實錄』卷2, 1年 11月 14日(辛卯)

이 사료는 1392년(태조 1년) 11월 간관(諫官)이 태조(太祖, 재위 1392~1398)에게 경연(經筵)에 열심히 참여하기를 간언한 상소이다. 경연이란 국왕이 학식 있는 신하들과 경서나 역사책을 읽고 토론하는 자리를 말한다. 경연은 국왕이 정치에 도움이 되는 새로운 지식이나 스스로를 반성하기 위해 마련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조선 건국 이념인 유교의 이상 정치를 실현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국왕은 이때 덕에 의한 교화의 방법을 몸에 익혔다. 이러한 이면에는 전제 왕권의 사적 행사를 규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한나라 때 오경(五經) 강의나 당나라 때 시강학사(侍講學士)와 시독학사(侍讀學士)의 설치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국왕에게 강의하는 전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경연관직이 정비되어 제도화된 것은 송나라에 이르러서였다. 당시에는 강의 일정을 격일제로 할 정도로 엄격했으나 그 뒤 명과 청을 거치면서 다소 형식적인 의식으로 변질되어 갔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예종(睿宗, 재위 1105~1122) 연간 청연각(淸燕閣)을 중심으로 경연을 도입하였다는 기록은 보이나,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대로, 새 왕조를 개창하면서 상설한 듯하다.

조선 시대에는 숭유 정책이 실시되면서 경연의 비중이 높아졌다. 태조는 경연청을 설치하였고, 정종(定宗, 재위 1398~1400)태종(太宗, 재위 1400~1418)도 각각 경연을 실시했으며,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때의 경연 강의는 선례가 되었다. 특히 세종은 즉위 이후 약 20년 동안 꾸준히 경연에 참석하면서 집현전을 통한 경연의 상설화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경연 강의는 아악(雅樂)의 정리, 법전의 편찬 등에 기여하여 우리 민족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후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대에 이르러 거의 매일 경연을 열었는데, 대신과 대간이 왕을 중심으로 여러 문제를 협의하는 정치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더욱이 중종(中宗, 재위 1506~1544) 때는 사림(士林)이 왕에게 성리학의 정치 이론을 강론하는 자리로 기능하였으며, 조선 후기 붕당 정치기에는 국왕이 경연을 통해 산림(山林)의 유현(儒賢)을 불러들여 그들의 학덕과 정치 이론을 듣는 자리로 활용하였다.

경연관의 직제는 세종 대에 집현전 관원을 중심으로 그 내용이 갖추어지고, 성종 때 홍문관으로 개편 정비되면서 이것이 『경국대전』에 실렸다. 경연관은 당상관과 낭청(郞廳)으로 구성되었는데, 당상관은 모두 겸관으로 영사 3명, 지사 3명, 동지사 3명, 참찬관 7명 등이었다. 영사는 삼정승이 겸하고, 지사와 동지사는 정2품과 종2품에서 각각 적임자를 골라 임명하였으며, 참찬관은 여섯 명의 승지와 홍문관부제학이 겸직하였다.

경연의 좌석 배치는 국왕이 남쪽을 향해 앉고 1품은 동편, 2품은 서편, 3품 이하는 남쪽에 북향하여 자리하였다. 강의 교재는 사서오경(四書五經) 및 역사책이 주류였고, 즐겨 읽던 교재는 『자치통감(資治通鑑)』과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이었다. 그밖에 『성리대전(性理大全)』⋅『근사록(近思錄)』⋅『소학(小學)』⋅『대학연의(大學衍義)』⋅『정관정요(貞觀政要)』⋅『고려사(高麗史)』 등이 쓰였다.

후대에는 경연에서 한 말들을 책으로 엮어 내기도 하였는데, 이희조(李喜朝 : 1655~1724)가 1719년(숙종 45년)에 조선의 오현(五賢)으로 불리는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이황(李滉, 1501~1570)이이(李珥, 1536~1584)성혼(成渾, 1535~1598)김장생(金長生, 1548~1631) 등이 경연에서 한 말을 엮어서 펴낸 『속경연고사(續經筵故事)』가 대표적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세종조의 경연과 유학」,『세종조 문화연구』1,권영웅,박영사,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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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의 경연제도-세종문종년간을 중심으로-」,『한국사론』1,남지대,서울대학교 국사학과,1980.
「『경연일기』의 판본 및 표제에 관한 서지적 검토」,『율곡사상연구』18호,유성선,,2009.
「경연과목의 변천과 진경시대의 성리학」,『진경시대』1,지두환,돌베개,1998.
저서
『조선 중기 국가와 사족』, 김성우, 역사비평사, 2001.
『경연, 왕의 공부』, 김태완, 역사비평사, 2011.
『조선시대 경연과 제왕 교육』, 송영일, 도서출판 문음사, 2001.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궁중 문화』, 신명호, 돌베개, 2002.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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