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전기정치지방 제도의 정비

향리에 대한 규제

형조에서 아뢰기를, “이제부터 향리(鄕吏)로서 백성을 침해하여 노역형에 해당하는 죄(罪)를 범한 자는, 청컨대 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형벌을 집행한 뒤에 영구히 그 도(道)의 후미지고 피폐한 역(驛)역리(驛吏)로 귀속시키고, 유배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자는 볼기를 치는 형벌을 집행한 뒤에 영구히 다른 도의 후미지고 피폐한 에 역리로 귀속시키소서. 백성을 침해한 향리를 사람들이 고발할 수 있게 허락하고, 고발당한 향리를 즉시 심리하지 않는 관리도 아울러 법조문에 따라 죄를 부과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권46, 11년 12월 1일(계유)

간악한 향리【수령을 조종하여 마음대로 권세를 부리면서 폐단을 만드는 자, 몰래 뇌물을 받아먹고 부역을 고르게 부과하지 않은 자, 세금을 받을 때 횡령하여 함부로 쓴 자, 양민을 불법으로 차지해서 몰래 부려먹는 자, 개인 소유의 논밭을 널리 설치하고 백성들을 부려 농사를 지은 자, 마을을 휘젓고 다니며 백성들을 침해하여 사리사욕을 채운 자, 권세 있는 집안에 붙어서 본래의 역(役)을 회피하려고 한 자, 역을 모면하려고 도망쳐서 촌락에 숨어사는 자, 관의 위세를 내세워 백성들을 포학하게 다룬 자, 양인의 딸이나 관비를 첩으로 삼은 자】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신고하는 것을 허락한다. 또한 본 고을의 경재소(京在所)가 사헌부에 신고하는 것도 허락한다. 심문하여 죄상을 밝힌 후 그 죄를 벌하되, 노역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자는 본 도의 후미지고 피폐한 에 역리로 영구히 귀속시키고 유배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자는 다른 도의 후미지고 피폐한 에 역리로 영구히 귀속시킨다. 알고도 적발 규탄하지 않은 수령은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죄를 따진다.

경국대전』권5, 형전, 원악향리

刑曹啓: “自今鄕吏侵虐小民, 犯徒罪者, 請決杖, 永屬其道殘驛吏, 犯流罪者, 決杖, 永屬他道殘驛吏. 其侵民鄕吏, 許人陳告, 官吏不卽聽理者, 幷依律科罪.” 從之.

『世宗實錄』卷46, 11年 12月 1日(癸酉)

元惡鄕吏【操弄守令, 專權作弊者, 陰受貨賂, 差役不均者, 收稅之際, 橫斂濫用者, 冒占良民, 隠蔽役使者, 廣置田庄, 役民耕種者, 橫行里閭, 侵漁營私者, 趍附貴勢, 邀避本役者, 避役在逃, 隠接村落者, 假仗官威, 侵虐民人者, 良家女及官婢作妾者.】, 許人陳告. 亦許, 本官京在所, 告司憲府. 推劾科罪, 犯徒者, 永屬本道殘驛吏, 犯流者, 永屬他道殘驛吏. 守令知而不擧劾者, 以制書有違律論.

『經國大典』卷5, 「刑典」, 元惡鄕吏

이 자료는 조선 전기 원악향리(元惡鄕吏)의 처벌에 대한 법률이다. 첫 번째 자료는 1429년(세종 11) 12월 백성을 침해한 향리에 대한 처벌 조항이다. 두 번째 자료는 앞서의 법률이 보완되어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형전(刑典)」에 규정된 원악향리의 처벌 조항이다. 원악향리란 문자 그대로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악한 일을 하는 향리를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중앙의 지방 통치 정책에 반발하던 토호적 향리를 가리킨다. 『경국대전』 조항에서는 원악향리의 유형을 모두 10개 조항으로 규정하였다.

조선 전기의 향리는 대부분 고려 시대 지방 관리를 세습하였던 이족(吏族)의 후예들로, 그 전신은 나말 여초의 각 지방 호족(豪族)에서 유래하였다. 나말 여초의 호족은 고려의 성립과 함께 개편되어 중앙의 귀족이나 관료로 진출하거나 그대로 지방에 자리 잡고 군현의 통치자로서 각 읍의 고위 향리층인 호장층(戶長層)을 형성하였다. 이들 호장층은 동시에 그 군현을 대표하는 토성(土姓), 곧 같은 성씨를 가진 유력 집단을 이루었다. 이러한 고려 시대 향리의 토호적 성격은 고려의 중앙 집권화를 가로막는 큰 장애 요소였다. 이에 고려 조정은 향리 제도의 정비 등을 통해 향리에 대한 통제 정책을 지속적으로 실시하였다.

이러한 정책이 효과를 거두어 고려 후기에는 향리가 약화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가 과거 혹은 전투에서 세운 공의 포상으로 받은 첨설직(添設職) 등을 통해 중앙에 진출하였다. 고려 후기 정치 주도 세력의 하나인 신진 사대부는 이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된 세력이었다.

그러나 조선을 건국한 사대부들은 고려 후기의 문란해진 신분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지배 계층을 상⋅하 두 계층으로 양분하기 시작하였다. 사대부 관료들은 기득권층으로서 자신들이 보유한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배타적으로 유지하고자 향리층이 중앙 관료로 진출하는 것을 억제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주로 과거를 볼 수 있는 권리의 제한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향리가 생원⋅진사시에 응시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소속 지역의 지방관에게 허가를 받도록 하였고, 향리가 응시하는 생원⋅진사시의 시험 과목도 통상적인 과목보다 과목을 추가하여 합격률을 떨어뜨렸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토호적인 향리로서 중앙 집권화에 방해가 되던 원악향리를 철저히 색출해 응징하였고, 각 지역 간의 향리 조정을 통해 많은 향리가 토착적 기반을 상실케 하였다. 원악향리에 대해서는 『경국대전』「형전」 원악향리조에 규정된 내용을 참고할 수 있는데, 모두 10가지 유형이 있다.

① 수령을 조종하여 마음대로 권세를 부리면서 폐단들을 만들어 낸 자

② 몰래 뇌물을 받아먹고 부역을 고르게 부과하지 않는 자

③ 세금을 받을 때 횡령하여 함부로 쓴 자

④ 양민을 불법으로 차지해서 몰래 부려먹는 자

⑤ 개인 소유의 논밭을 널리 설치하고 백성들을 부려 농사를 지은 자

⑥ 마을을 휘젓고 다니며 백성들을 침해하여 사리사욕을 채운 자

⑦ 권세 있는 집안에 붙어서 본래의 역(役)을 회피하려고 한 자

⑧ 역을 모면하려고 도망쳐서 촌락에 숨어사는 자

⑨ 관의 위세를 내세워 백성들을 포학하게 다룬 자

⑩ 양인의 딸이나 관비를 첩으로 삼은 자

이렇게 규정된 원악향리조에 위배된 향리는 잔역(殘驛), 곧 후미지고 피폐한 역의 역리(驛吏)로 영구히 귀속시켰다. 또한 토호적 향리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으로는 그들이 자신의 본관지를 떠나도록 하는 방법을 이용하였다. 대대로 거주하던 본관지는 향리들의 세력 기반이요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향리의 토착적 기반은 군현 개편에 따른 이동 및 향촌 백성의 이사 정책 등을 통해 상실되어 갔다.

이 밖에도 읍리전(邑吏田)의 혁파, 향리의 복식 제한 정책 등도 향리 통제책으로 이용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향리에게 지방의 실무를 담당하는 대가로 토지를 지급했는데, 이는 상속이 가능한 영업전(永業田)의 성격으로 향리의 중추적인 경제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향리에게 주던 녹봉을 점차 감소시켰으며, 고려 시대 향리직의 대가로 지급되던 읍리전은 1445년(세종 27) 혁파되었다. 이로써 향리는 토지를 지급받지 못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후 향리들은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반대 급부를 받지 못하였다. 다만 지방 관청의 자체 수입 가운데 일부를 편법으로 지급하였을 뿐이다.

복식에서도 구분을 두었다. 복식은 전근대 사회에서 신분을 구분하는 상징으로서 향리의 복식도 그 신분의 변천과 궤도를 같이 하였다. 고려 시대의 향리 복식은 조정의 문무 관원과 비견될 정도여서 광종 때 제정된 자삼(紫衫)⋅단삼(丹衫)⋅비삼(緋衫)⋅녹삼(綠衫)의 4색 공복 체계를 사실상 따르고 있었다. 향리의 공복제는 1018년(현종 9) 시행되었으며, 1051년(문종 5) 10월에는 9단계로 향리직을 서열화하였다. 이에 따라 최고위직인 호장(戶長)은 자삼, 2등급인 부호장(副戶長)~창정(倉正)까지는 비삼, 4등급인 호정(戶正)~사옥부정(司獄副正)까지는 녹삼 등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한 직후인 1397년(태조 6)에는 호장과 기관층(記官層)만 녹삼을 입게 하였다. 기관층은 고려 시대를 기준으로 부호장 이하 7급인 주⋅부⋅군⋅현 사(史) 급에 해당하며, 호장을 보좌하여 조세⋅역역 등의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중간 관리층이었다. 모자의 착용을 규정한 입제(笠制)에도 변화가 있어, 사족은 보통 갓[笠)을 쓰고 관인은 공모(公帽) 또는 사모(紗帽)를 착용하였다. 그러나 몇 차례 개정을 거쳐 향리는 방립(方笠)을 착용하게 하였다. 이 조치는 향리의 신분적 지위가 격하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이 사료에는 재지 세력으로서 불법을 저지르는 향리에 대한 규제 이외에, 향리 본래의 직책을 버린 경우에 대한 처벌 조항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본래의 역(役)이란 향역, 곧 향리의 행정 실무를 말한다. 이미 고려 후기부터 향리의 지위와 세력은 위축되고 중앙의 명령 체계에 흡수되어 가고 있었다. 이 시기 권문세가의 대토지 사유와 농장 확대는 조세⋅공부를 담당하는 농민의 토지 감소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국가가 요구하는 세액은 종전과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징세를 책임진 향리들이 향리직을 회피하는 경우가 나타났다. 이들은 신분을 바꾸어 승려가 되거나, 잡업(雜業)을 통해 관직에 나아가거나 또는 전쟁에서 공이 있음을 빙자하여 첨설직을 얻었다. 또 거주지를 이탈해 떠돌거나, 권문세가의 힘을 빌려 관직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향리의 직책을 회피하는 현상은 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계속되었으며, 이에 중앙에서는 사료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향리의 신분과 직역의 고정화를 위한 법규를 마련하였다.

이상과 같은 향리에 대한 규제책으로 조선 건국 이후 향리의 토호적 성격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향리의 지위도 종래의 지방 지배자적 지위에서 지방 관아의 행정 실무자로 전락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초기의 향리」,『한국사연구』5,이성무,한국사연구회,1970.
「조선 초기 향리의 지위와 신분」,『진단학보』110,최이돈,진단학회,2010.
저서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이수건, 민음사, 1989.
편저
「중인」, 신해순, 국사편찬위원회, 1994.
『고려 조선전기 중인 연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신서원, 2001.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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