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전기정치조선 전기의 대외 관계

계해약조

세종 25년(1443) 계해에 세사미두(歲賜米豆)와 세견선(歲遣船)에 대한 약조를 정하였다. (대마도) 도주(島主)에게는 해마다 쌀과 콩을 합하여 200섬을 주기로 하였다. ○ 세견선은 50척으로 하고 만일 부득이하게 보고할 일이 있으면 이 숫자 이외에 특송선을 보내도록 하였다.

중종 7년(1512) 임신에 약조를 추가하여 정하였다. 도주에게 내려준 세사미두 200섬 중에 100섬을 감하였다. ○ 수도서인(受圖書人)과 수직인(受職人) 등은 모두 접대를 허락하지 않았다. ○ 도주의 세견선 50척을 감하여 25척으로 한다. 그 중 대선(大船) 9척은 배마다 선부(船夫)를 40명으로 하고, 중선(中船) 8척은 배마다 선부를 30명으로 하고, 소선(小船) 8척은 배마다 선부를 20명으로 한다. ○ 도주 특송선은 감하도록 정하고, 만약 일이 있을 때에는 세견선에 부쳐 와서 보고하도록 하였다. ○ 도주의 아들 종웅만(宗熊滿)이 보내는 세견선은 3척이며, 배의 크고 작은 것은 정하지 않았다. ○ 도주의 조카 종성씨(宗盛氏)는 1척으로 정하였다. ○ 수직인은 1인으로 하고 세견선 이하 매 1선에 상경 왜인(上京倭人)은 1명으로 한다.

『증정교린지』권4, 약조

世宗二十五年癸亥 定歲賜歲船約條【島主處歲賜米豆 共二白石 ○歲遣五十船 而如有不得已報告事 則數外特送船】

中宗七年壬申 添定約條【島主處歲賜米豆共二白石內 减一白石 ○受圖書受職人等 並不許接 ○島主歲遣五十船减爲二十五隻內 大船九隻 每隻船夫四十名 中船八隻 每隻船夫三十名 小船八隻 每隻船夫二十名 ○島主特送船减定 若有事則付歲遣船中来告 ○島主子宗熊滿歲遣船三隻 而大小不定 ○ 島主姪宗盛氏一船 ○受職人一人 而歲遣船以下 每一船上京一人】

『增正交隣志』卷4, 約條

이 사료는 조선 시대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수록하고 있는 『증정교린지』중 1443년(세종 25년)에 체결된 계해약조(癸亥約條)에 관한 내용이다.

조선 전기 왜구 회유책으로 이들의 해적 행위는 줄어들었지만 대신 통교를 목적으로 하는 도항자(渡航者)가 급증하였다. 이후 통교자가 급증하고 도항 왜인의 일방적인 상리(商利) 추구로 정부의 재정 부담이 늘어나자 이를 규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태종(太宗, 재위 1400~1418) 대에서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대 초기까지 대일 통교 체제 확립 과정은 통교를 제한하거나 긴축 정책의 강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태종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대부터 본격화된 규제책은 도항자를 제한하는 방책으로 수도서제(授圖書制), 포소(浦所) 제한, 서계(書契)⋅행상(行狀)⋅문인(文引)에 의한 통제 등이 있었고, 도항자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 방책은 접대 규정 정비와 세견선(歲遣船) 정약(定約)이 실시되었다.

도항자에 대한 이상의 여러 통제책은 최종적으로는 대마도주에게 위탁하는 형식이어서 운영상의 모순과 한계가 따랐다. 결국 조선 정부로서는 통교자의 도항 횟수와 세견선수(歲遣船數), 교역량을 직접 통제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세견선수의 정약(定約)과 접대 규정의 정비로 나타났다.

계해약조의 체결과 세견선 정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견선 시초는 1424년(세종 6년) 구주탐제(九州探提)에게 봄가을로 2회 허용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운영된 시기는 1443년(세종 25년) 계해약조로 대마도주의 세견선을 정하면서부터였다. 계해약조의 주요 내용은 “대마도주에게는 매년 200석의 쌀과 콩을 하사한다”, “대마도주는 매년 50척의 배를 보낼 수 있고, 부득이하게 보고할 일이 있을 경우 정해진 숫자 외에 특송선(特送船)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계해약조는 현재 위와 같이 2항목만 전해 오고 있다. 이는 대마도주와의 세견선⋅도주특송선⋅세사미두(歲賜米豆)를 약정한 것에 불과하지만, 단순히 대마도주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조선 전기 대일 통교 체제의 기본 약조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조약을 계기로 다른 통교자들과도 모두 세견선 정약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조선 전기 이래의 교린 체제 확립 과정이 일단락을 보게 되었다.

계해약조 다음에도 삼포왜란 후 1512년(중종 7년)에 체결된 임신약조(壬申約條)나 사량진 왜변(蛇梁津倭變) 후인 1547년(명종 2년)에 약정된 정미약조(丁未約條) 등이 만들어졌지만, 모두 계해약조를 기본으로 하여 조정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계해약조는 조선 전기 대일 통교 체제의 기본적 조약이라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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