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전기정치조선 전기의 대외 관계

해동제국기 서문

무릇 국교를 맺고 서로 예방하며 풍습이 다른 나라를 어루만지고 접촉할 때에는 반드시 그 정세를 알아야 그 예를 다할 수 있고 그 예를 다해야 그 마음을 다할 수 있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 신 신숙주(申叔舟, 1417~1475)에게 명하여 해동 여러 나라에 대한 조빙(朝聘)으로 왕래한 연고와, 관곡(館穀)을 주어 예접(禮接)한 규례를 찬술하라 하시기에 신은 명을 받고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옛 문헌을 상고하고 보고 들은 것을 참고하여 그 지세를 그려서 대략 세계(世係)의 본말과 풍토의 숭상하는 바를 서술하고, 우리나라에서 응접하던 절차까지 덧붙여서 편집하여 책을 만들어 올렸다. 신(臣) 신숙주는 오래 예관의 관직을 맡았고 또 일찍이 바다 건너 그 땅을 답사해 보니, 여러 섬이 별처럼 분포되어 풍속이 전혀 다르다. 지금 이 책을 만드는 데 있어 끝내 그 요체를 얻지 못했지만, 그러나 이를 통하여 그 줄거리만이라도 알게 되면 거의 그 정세를 더듬고 그 예를 짐작해서 환심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삼가 보건대 동해의 가운데 자리 잡은 나라가 하나만이 아니나, 그 중 일본이 가장 오래되고 또 크다. 그 지역이 흑룡강(黑龍江) 북쪽에서 비롯하여 우리 제주 남쪽에까지 이르고, 유구(琉球)와 더불어 서로 맞대어 그 지형이 매우 길다. 처음에는 곳곳마다 집단으로 모여 각기 나라를 세웠는데, 주(周) 평왕(平王) 48년에 시조 적야(狄野)가 군사를 일으켜 모조리 쓸어 버리고 비로소 주(州)⋅군(郡)을 설치하여 대신들에게 맡겨 각각 나눠서 다스리게 하니 중국의 봉건 제도와 비슷하여 그다지 간섭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습성이 강하고 사나워 칼 쓰기에 능하고 배 타기에 익숙하며, 우리와는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는 처지이기에 잘 어루만져 주면 예로써 조빙하고 잘못하면 번번이 강탈을 자행하였다. 전조(前朝)의 말엽에 국정이 문란하여 어루만짐을 잘못하니 드디어 변방에서 난리를 일으켜 연해 수천 리의 땅이 폐허가 되었는데, 우리 태조께서 분연히 일어서서 지리산⋅동정(東亭)⋅인월(引月)⋅토동(兎洞)에서 수십 차례를 싸우고서야 왜적이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하였다.

우리가 개국한 이래로 여러 성군이 서로 계승하여 정사가 밝아져 나라 안을 잘 다스려 융성하게 되자 외적이 곧 순종하여 변방 백성이 안도감을 갖게 되었다. 세조께서 중흥하시어 여러 대를 태평하게 지난 나머지 안일이 독약보다 폐해가 더 심하다는 것을 염려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부지런하며, 인재를 발탁하여 여러 정사를 함께 행하고 폐해진 것을 진흥시키고, 기강을 바로 세우며, 밤중에도 옷을 벗지 아니하고 새벽밥을 먹어 가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일을 생각해서 어진 다스림이 이미 흡족하고, 교화가 멀리 퍼지니, 만 리 밖에서도 험준한 산은 사닥다리를, 바다는 배를 이용하여 멀다고 오지 않는 자가 없었다.

신은 일찍이 들으니 이적(夷狄)을 대우하는 방도는 외부를 단속하는 데 있지 아니하고 내부를 닦는 데 있으며, 변방의 방어에 있지 아니하고 조정에 있으며, 무력에 있지 아니하고 기강에 있다 하였는데, 그 말을 여기서 증험하였다. 익(益)이 순(舜) 임금을 경계하기를, “걱정이 없는 것을 경계하시어 법도를 잃지 마시고 안일에 빠지지 마시고 풍악에 음탕하지 마시며, 어진 이에게 맡겼으면 의심하지 마시고, 간사한 자를 제거하는 데 의심을 갖지 마시며, 백성의 찬양을 구하기 위해서 도리를 어기지 마시고 내 욕심을 따르기 위해서 백성을 거스르지 마소서. 게으름이 없고 황당함이 없으면 사방의 오랑캐가 와서 조회를 드리오리라” 하였다. 순 임금 같은 성인으로 임금을 삼고도 익의 경계가 이와 같은 것은 대개 국가가 걱정이 없는 때를 당하면 법도가 해이하기 쉽고, 안락이 방종으로 흐르기 쉬운 까닭이니 수신하는 방도가 혹시 지극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조정에서 행하고 천하에 펴지며 사방의 오랑캐에게 미루어 나가는 데 있어 어디인들 그 이치를 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실로 몸을 닦고서 사람을 다스릴 수 있고 안을 닦고서 바깥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니, 또한 반드시 마음에 게으름도 없고 일에 황당함도 없는 연후에야 융성한 다스림의 교화가 멀리 사이(四夷)에 미치게 된다. 익의 깊은 뜻이 여기에 있지 아니하겠는가. 혹시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생각하며 군사를 궁지에 몰아넣고 무기를 한없이 사용하여 바깥 오랑캐를 억제하려 하면 천하가 퇴폐하여 마침내 한 무제(漢武帝)와 같이 되고 말 것이며, 또 혹시 자기의 부강만을 믿고 사치를 극도로 하여 오랑캐에게 뽐내려 하면 제 몸도 또한 유지를 못하여 마침내 수양제(隋煬帝)의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더구나 기강이 서지 아니하여 장수는 교만하고 군사는 나약한데 강한 오랑캐와 함부로 부딪치면 제 몸이 죽게 되어 마침내 석진(石晉)1)이 되고 말 것이다. 이는 모두 근본을 버리고 지엽적인 것을 따르며 안을 비우고 바깥을 치중했기 때문이니, 안이 다스려지지 못했는데 어떻게 바깥에 미칠 수 있겠는가. 걱정 없는 때를 경계하여 게으름이 없고 황당함이 없어야 된다는 의리가 있지 아니한데, 비록 정례를 참작해서 오랑캐의 마음을 거둬들이고 싶지만 될 일이겠는가. 한(漢) 나라 광무제(光武帝)가 옥문(玉門)을 닫고 서역의 볼모를 사절한 것도 역시 안을 먼저하고 바깥을 뒤로 하자는 뜻이다. 그러므로 명성이 중국에서 넘쳐흘러 먼 오랑캐의 지방에까지 미쳐서 일월이 비치고 서리⋅이슬이 내리는 곳이라면 누구나 존숭하고 친애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이야말로 하늘을 짝하는 지극한 공이요, 제왕의 거룩한 일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그쪽에서 오면 어루만져서 선물을 넉넉히 주며 대우를 후히 하는데도 그들이 보통으로 여기고, 진위를 마구 속이며 곳곳에서 머물러 시일만을 지체하여 변명을 갖가지로 부리고 있으니, 그놈들의 욕심은 끝이 없고, 조금이라도 그 뜻을 거스르면 곧바로 화를 낸다. 그래도 땅이 멀고 바다가 가로막혀서 그 실상을 파악하고 그 정세를 살필 수가 없으니, 대우는 선왕의 옛 규례에 의거하여 진정할 수밖에 없는데, 그 정세가 각기 경중이 있어서 또한 후하고 박함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따위 자잘한 절목쯤은 담당관들이 할 일이다. 성상께서 옛사람의 경계한 내용을 생각하시고 역대의 잘못된 것을 거울삼아 먼저 몸을 닦아서 조정에 미치고 사방에 미쳐서 바깥 지역까지 미치게 하시면 하늘을 짝할 만한 극치의 공을 이룩하실 것이 의심이 없는데, 하물며 자잘한 절목에 있어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동문선』권95 「서」 해동제국기서

1)석진(石晉) : 중국 오대십국 시기 오대의 왕조 중 하나인 후진(後晉, 936~946)을 말하는데, 석경당(石敬塘)이 세웠다고 하여 석진이라고도 한다. 석경당은 후당(後唐)의 개국공신으로서 후당 2대 황제인 명종(明宗) 이사원(李嗣源)의 사위가 되었으며,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북경 유수(北京留守)를 지냈다. 명종 사후 이종후(李從厚)가 즉위하였는데, 명종의 양자인 노왕(潞王) 이종가(李從珂)가 반란을 일으켜 이종후를 몰아내자 이종후를 돕지 않고 이종가에게 동조하여 자리를 보전하였다. 이종가는 즉위한 후 석경당을 경계하여 936년 석경당을 천평군 절도사(天平軍節度使)로 좌천시켰으므로, 이에 불만을 품은 석경당은 이종가를 몰아내기 위하여 요나라에게 군사 지원을 청하였다. 그는 요 태조 야율덕광에게 부자 관계가 되기를 청하고, 요나라 군대를 빌리는 대신 연운 16주(燕雲十六州)를 요에 할양하고 매년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했다. 석경당은 후당을 멸망시킨 후 요 태조에게 책봉을 받아 황제 자리에 올랐으나 재위 6년만에 사망하였다. 그가 만리장성에 걸쳐 있던 연운 16주를 바친 일은 장성 이남의 평야지대에 대한 방어물을 잃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이는 중원(中原)의 한족(漢族) 국가가 북방 민족의 침략에 시달리게 되는 원인으로 간주된다. 이후로 이 지역은 요나라, 금나라 등이 순서대로 지배하였으며, 오대의 후주, 통일 왕조 송 등이 여러 번 이 지역을 탈환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夫交隣騁問, 撫接殊俗, 必知其情, 然後可以盡其禮, 盡其禮, 然後可以盡其心矣. 我主上殿下, 命臣叔舟, 撰海東諸國朝聘往來之舊, 館穀禮接之例以來, 臣受命祗栗, 謹稽舊籍, 參之見聞, 圖其地勢, 略敍世係源委, 風土所尙, 以至我應接節目, 裒輯爲書以進. 臣叔舟久典禮官, 且甞渡海, 躬涉其地, 島居星散, 風俗殊異, 今爲是書, 終不能得其要領, 然因是知其梗槩, 庶幾可以探其情酌其禮, 而收其心矣. 竊觀國於東海之中者非一, 而日本最久且大. 其地始於黑龍江之北, 至于我濟州之南, 與琉球相接, 其勢甚長. 厥初處處保聚, 各自爲國, 周平王四十八年, 其始祖狄野起兵誅討, 始置州郡, 大臣各占分治, 猶中國之封建, 不甚統屬. 習性強猂, 精於劒槊, 慣於舟楫, 與我隔海相望, 撫之得其道則朝聘以禮, 失其道則輒肆剽竊. 前朝之季, 國亂政紊, 撫之失道, 遂爲邊患, 沿海數千里之地, 廢爲榛莽, 我太祖奮起, 如智異,東亭,引月,兔洞, 力戰數十然後, 賊不得肆, 開國以來, 列聖相承, 政淸事理, 內治旣隆, 外服卽序, 邊氓按堵. 世祖中興, 値數世之昇平, 慮宴安之鴆毒, 敬天勤民, 甄拔人才, 與共庶政, 振擧廢墜, 修明紀綱, 宵衣旰食, 勵精圖理, 治化旣洽, 聲敎遠暢, 萬里梯航, 無遠不至. 臣甞聞待夷狄之道, 不在乎外攘, 而在乎內修, 不在乎邊禦, 而在乎朝廷, 不在乎兵革, 而在乎紀綱, 其於是乎驗矣. 益之戒舜曰, 儆戒無虞, 罔失法度, 罔遊于逸, 罔淫于樂, 任賢勿貳, 去邪勿疑, 罔違道以干百姓之譽, 罔咈百姓以從己之欲. 無怠無荒, 四夷來王. 以舜爲君而益之戒如是者, 蓋當國家無虞之時, 法度易以廢弛, 逸樂易至縱恣, 自修之道, 苟有所未至, 則行之朝廷, 施之天下, 推之四夷, 安得不失其理哉. 誠能修己而治人, 修內而治外, 亦必無怠於心, 無荒於事, 而後治化之隆, 遠達四夷矣. 益之深意, 其不在玆乎. 其或捨近而圖遠, 窮兵而黷武, 以事外夷, 則終於疲弊天下, 如漢武而已矣, 其或自恃殷富, 窮奢極侈, 誇耀外夷, 則終於身且不保, 如隋煬而已矣. 其或紀綱不立, 將士驕惰, 橫挑強胡, 則終於身罹戮辱, 如石晉而已矣. 是皆棄本而逐末, 虛內而務外, 內旣不治, 寧能及外哉. 有非儆戒無虞, 無怠無荒之義矣, 雖欲探情酌禮, 以收其心, 其可得乎. 光武之閉玉門而謝西域之質, 亦爲先內後外之意矣. 故聲名洋溢乎中國, 施及蠻貊, 日月所照, 霜露所墜, 莫不尊親, 是乃配天之極功, 帝王之盛節也. 今我國家, 來則撫之, 優其餼廩, 厚其禮意, 彼乃狃於尋常, 欺誑眞僞, 處處稽留, 動經時月, 變詐百端, 溪壑之欲無窮, 小咈其意, 則便發忿言. 地絶海隔, 不可究其端倪, 審其情僞, 其待之也, 宜按先王舊例以鎭之, 而其情勢各有重輕, 亦不得不爲之厚薄也. 然此瑣瑣之節目, 特有司之事耳. 聖上念古人之所戒, 鑑歷代之所失, 先修之於己, 以及朝廷, 以及四方, 以及外域, 則其於終致配天之極功也, 無難矣, 何况於瑣瑣節目乎.

『東文選』卷95 「序」 海東諸國記序

이 사료는 1443년(세종 25년)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申叔舟, 1417~1475)가 왕명에 따라 1471년(성종 2년)에 편찬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서문이다. 그가 직접 관찰한 일본의 정치⋅외교 관계⋅사회⋅풍속⋅지리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 기록하였다. 이 책은 15세기 한일 관계와 일본 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쓰인다. ‘해동제국’이란 일본의 본국과 구주(九州), 대마도(對馬島, 쓰시마 섬)⋅일기도(壹岐島, 이키 섬)와 유구(琉球, 류쿠)를 총칭하는 말이었다.

신숙주세조(世祖, 재위 1455~1468) 때의 중신으로 일찍부터 국가의 중요한 업무에 참여하였다. 세조의 명에 따라 영의정으로서 예조의 사무를 겸장하면서 외교 업무를 전담하기도 하였다. 성종(成宗, 재위 1469~1494)이 즉위한 후에는 옛 제도를 정비하고 새로운 제도를 입안하면서 해동제국의 외교사절 응접 사례 등을 개정해서 외교상의 면목을 일신하기도 하였다. 『해동제국기』는 그의 견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그 당시 일본에서 전래된 문헌과 왕년(往年)의 견문, 예조에서 관장한 기록 등을 참작해 교린 관계에서 후세의 규범이 될 만한 것을 만들기 위해 편찬한 것으로, 조선 초기 대일본 인식을 정리하는 한편 향후 대일 외교의 준칙을 마련한 저술이다.

조선 왕조의 대일 외교 정책의 기본 방향은 왜구를 막고 통교 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왜구를 막기 위해서 건국 직후부터 태조(太祖, 재위 1392~1398)는 무로마치 막부에게 왜구의 금압과 잡혀 간 조선인의 송환을 요구하면서 교섭하였지만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왜구에게 영향력이 있는 유력한 제후나 상인 세력과 직접 교섭을 하고 이들과 통교하였다. 이렇듯 조선과 일본의 통교는 중앙 정부 사이의 일원적인 관계가 아니라 다원적이었으며, 유력 제후나 상인들은 조선에 조공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후 왜구의 피해는 점차 감소되어 갔다.

또한 조선은 일본인에게 근해에서 어로와 교역, 귀화를 허용하였다. 일부 공이 있거나 뛰어난 인물에게는 관직을 주기도 했는데, 이는 왜구를 줄이는 효과는 있었지만 재정 부담이 컸다. 또 교역을 유지하면서 교역량은 최소화하여 통제하고자 하였다. 이에 1426년(세종 8년) 부산포, 제포, 염포의 3포를 개항하여, 3포에는 사절단의 접대와 통상을 위한 왜관을 설치하였다. 또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와 슈고(守護) 다이묘(大名)의 사절 등을 제외한 통교자에 대해서는 쓰시마의 도주인 소(宗, 종씨) 가문이 발행하는 도항 증명서인 문인(文引)의 휴대를 의무화하였으며, 1442년(세종 24년)에는 쓰시마의 소씨와 교역 선박 수 등을 정하는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하였다. 이때 소씨에게 문인 발행권 등 무역의 독점적 특권 등을 부여하여 이들을 조선 중심의 질서에 편입하고자 하였다.

계해약조 성립 후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3포를 통한 통교 체제가 안정되어 갔으나, 1460년대가 되면서 일본으로부터의 내왕자나 항거 왜인의 수가 급증하자 통교 체제와 규정의 정비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성종은 1471년 예조판서였던 신숙주에게 해동제국의 조빙 왕래 연혁과 그들의 사신을 접대하는 규정 등에 대한 구례를 찬술하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신숙주는 조선과 일본의 옛 전적을 참고하고 또 일본에 통신사 서장관으로 다녀온 체험을 바탕으로 그 해 말 『해동제국기』를 완성하게 된 것이다.

신숙주는 『해동제국기』 서문에서 그 편찬 목적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는 일본인의 습성과 일본과의 통교 필요성에 대해 일본인의 습성이 강하고 사나우며, 무술을 좋아하고, 배를 잘 다루는데, 우리나라에서 도리대로 이들을 잘 어루만져 주면 예의를 차려 조빙하며, 그렇지 않으면 노략질을 하는데, 고려 말에 왜구가 극성한 것이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고 지적했다. 그 후 태조의 왜구 토벌이 성공한 후, 정치가 안정되고 변방도 편안해져 세조 대에 이르러서는 기강을 바로 잡으면서 주변에서 모두 내조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어서 주변국을 대하는 방법은 무력에 의한 정벌이나 제압보다는 내치와 기강을 바로 잡는 것에 있으며, 기강을 바로 잡는 것이 구체적인 접대 규정을 만들어 예를 다하여 그들을 접대하는 것이라 하였다. 더 나아가 접대에 관하여 내조자에 대하여 지금까지 예로써 후하게 대했지만 그들의 욕심이 한정이 없어 항상 불화가 빚어졌으며, 따라서 선왕의 구례와 접대 규정을 다시 정비하여 기강을 바로 잡아야 할 필요가 있기에 『해동제국기』를 편찬하게 되었다고 했다.

신숙주는 『해동제국기』에서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 일본 지도, 삼포 지도 총 10장을 수록하고, 이어 일본 왕과 국왕의 역사와 한일 관계의 시작을 삼국 시대 유교 문화의 전수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간략하게 일본 문화의 단면을 소개하고 있다. 가장 많이 할애하여 서술한 부분은 조선에 통교한 내조자였으며 이들 내조자들을 예에 의해 접대하여 일본과 신의를 잃지 말고 교린(交隣)해야 한다고 하였다. 신숙주성종에게 유언으로 일본과 화의를 잃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해동제국기』의 역사지리학적 연구」『인문과학연구』15,,손승철,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2006.
「조선시대 『해동제국기』와 『화국지』를 통해 본 일본의 표상」,『경제연구』44,손승철,한양대학교,2008.
「조선 초기 지배층의 일본관」,『인문논총』9,조영빈⋅정두희,전북대학교 인문학연구소,1981.
편저
「일본의 동향」, 하우봉, 국사편찬위원회, 2003.
『한일 교류의 역사』, 한국역사교과서연구회⋅일본역사교육연구회, 혜안,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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