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전기정치왜란의 전개와 그 영향

김성일과 황윤길의 서로 다른 보고

선조 24년(1591) 봄 3월, 통신사 황윤길(黃允吉)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는데 왜국의 사신 평조신(平調信, 다이라 시게노부) 등도 함께 왔다. 황윤길이 그간의 실정과 형세를 치계(馳啓)하면서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복명(復命)한 뒤에 상이 불러 하문하니, 황윤길은 전일의 치계 내용과 같은 의견을 아뢰었는데 김성일(金誠一)이 아뢰기를,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일의 마땅함에 매우 어긋납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어떻게 생겼던가?” 하니, 황윤길이 아뢰기를,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하고, 김성일은 아뢰기를, “그의 눈은 쥐와 같아서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됩니다” 하였다. 이는 김성일이 일본에 갔을 때 황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하여 말마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말한 것이었다.

『국조보감』권30, 선조 24년

二十四年春三月, 通信使黃允吉等回自日本, 倭使平調信等偕来, 允吉馳啓情形, 以爲必有兵禍. 既復命, 上引見而問之, 允吉對如前, 誠一曰, 臣則不見如許情形, 允吉張皇論奏, 搖動人心, 甚乖事宜. 上問秀吉何狀, 允吉言其目光爍爍, 似是膽智人也. 誠一曰, 其目如鼠, 不足畏也. 盖誠一憤允吉到彼恇㤼失體, 故言言相左如此.

『國朝寶鑑』卷30, 宣祖 24年

이 사료는 황윤길(黃允吉, 1536~?)과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1590년(선조 23년)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1591년(선조 24년)에 귀국하면서 일본의 사정에 대해 보고한 내용이다. 황윤길은 1561년(명종 16년) 문과에 급제, 정언을 비롯해 황주 목사와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김성일은 경상북도 안동 출신이며 이황(李滉, 1501~1570)의 문인으로 1568년(선조 1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비롯해 홍문관 수찬, 나주 목사, 경상좌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세기 후반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등장하여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여 통일하고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전국 시대의 오랜 전투 과정에서 얻은 다이묘(大名)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함으로써 국내의 통일과 안정을 도모하고 신흥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대륙 침략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대마도주 종의조(宗義調, 소 요시시게)를 시켜서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 수호 관계를 맺도록 하였는데, 그 의도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치자는 데 있었다. 대마도주는 가신(家臣) 귤강광(橘康廣, 다치바나 야스히로) 등을 일본국 사신이라는 명목으로 부산포에 보내 통호(通好)할 것을 청하였다.

일본이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여론이 빗발쳤으며, 조정 대신의 반대도 완강하였다. 이후에도 일본에서는 수차례 사신을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암시를 받은 조선 조정은 통신사 파견의 가부(可否)를 논의하였다.

여러 차례 논의 끝에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탐지하기 위해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통신사 일행은 1590년(선조 23년) 3월 서울을 출발해 이듬해 3월 서울에 돌아왔다. 정사는 서인 황윤길이었으며 부사는 동인 김성일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보고가 서로 달랐다.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서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 보고하였다. 또한 도요토미는 안광(眼光)이 빛나고 담략(膽略)이 있어 보인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사 김성일은 일본이 침략할 낌새는 전혀 없었으며, 도요토미의 사람됨도 쥐와 같이 생겨서 전혀 두려워 할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상반된 보고를 받은 조정 대신 가운데는 정사 황윤길의 말이 옳다는 사람도 있었으며 부사 김성일의 말이 옳다는 사람도 있는 등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런데 요행을 바라던 조선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 결국 후자의 의견에 머물렀고, 따라서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 방비를 서두르던 것마저 중지하고 말았다.

그 후 종의조가 부산포에 와서 도요토미가 병선을 정비하고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조선은 이를 명(明)에 알려 청화통호(請和通好)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변장(邊將)에게 말했으나 회답이 없었다. 이에 그는 그대로 돌아가고, 왜관에 머물던 일본인들도 본국으로 소환되자 조선은 그제야 일본의 침입이 임박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대비책을 강구했으나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16세기말 성리학 이해와 현실인식-대일외교를 둘러싼 허성과 김성일의 갈등을 중심으로-」,『조선시대사학보』13,김정신,조선시대사학회,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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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 김성일의 시대와 그의 현실대응」,『민족문화』25,이병휴,민족문화추진회,2002.
「임란기 학봉 김성일의 구국 활동」,『신라문화』23,최효식,,2004.
편저
「왜란 전의 정세」, 최영희, 국사편찬위원회, 2003.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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