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전기정치왜란의 전개와 그 영향

의병의 봉기-고경명의 마상격문

근래에 국운이 불길하여 섬 오랑캐[島夷]가 불시에 침입하였다. 처음에는 역량(逆亮)1)이 맹약을 저버린 것을 본받더니 마침내는 구오(勾吳)의 천식(荐食)2)을 자행하여 우리가 경계하지 않는 틈을 타서 허점을 찌르고 길이 몰아치며 하늘도 기만할 수 있다 하고 마구 쳐들어 왔다.

우리 장수들은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고 수령이라는 자들은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서 저 왜적 놈들에게 임금과 부모를 내맡겼으니 이 어찌 차마 할 노릇이며, 우리 지존에게 사직을 근심하게 하였으니 그들의 마음은 평안한가? 100년 동안 휴양한 생민들이 어찌하여 일찍이 한 사람도 의기의 남아가 없다는 말인가

고립된 소수의 군사로 깊숙히 쳐들어 간 것3)여진(女眞)이 본시 병법을 몰랐기 때문이며 중항열(中行說)을 볼기 치지 못한 것은 한나라가 계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강(長江)이 갑자기 천혜의 요새를 잃어버려서 오랑캐의 군사가 이미 수도까지 침입하였다. 남조에 사람이 없다는 비방을 듣게 되니 진실로 통탄할 일이요, 북군이 날아왔다는 말4)과 지금의 상황이 불행히도 비슷하다.

드디어 우리 성상께서 태왕(太王)이 빈(邠) 땅을 떠나는5) 마음으로 명황(明皇)이 서촉(西蜀)에 행차하던 거조를 하셨으니, 6) 이는 종사를 위한 치밀한 계획에서 나온 것으로 잠깐 지방을 순시하는 수고를 꺼리지 않으신 것이다. 그렇지만 공락(鞏洛)의 자욱한 먼지에 옥안은 깊은 근심을 나타냈고, 아민(峩岷)위잔(危棧)취화(翠華)는 먼 길을 달려야 했다. 하늘이 이성(李晟)을 낸 것은 적을 숙청하는 일은 그에게 맡기기 위해서이고, 육지(陸贄)가 조서를 쓴 것7)은 애통함을 또 성조에서 내리기 위함이다. 무릇 혈기와 생명이 있는 자는 어느 누구인들 분해서 죽고 싶지 않겠는가.

어찌하여 사람의 꾀가 어긋나 나라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봉천(奉天)의 어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상주(相州)의 군사는 이미 무너졌다.8) 저 벌과 전갈[蜂蠆]처럼 어리석은 왜놈들이 아직도 경예(鯨鯢)의 죽음을 면하고 있다. 성안에서 생명을 간신히 부지하고 있으니 장막에 집을 짓고 날라다니는 제비와 무엇이 다르겠으며 서울을 점령하고 있으니 마치 우리 안에서 뛰어다니는 원숭이와 같다. 비록 중국의 군사가 소탕해 줄 것이라고 믿지만 역시 흉적의 무리가 빠져 달아날 것이라고 보증하긴 어렵구나.

고경명은 진실된 마음의 노인이며 백발 부유(腐儒)로서, 한밤중에 닭소리를 듣고 많은 고난을 견딜 수 없어 중류의 노를 쳐서 외로운 충성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이는 한갓 견마가 주인을 그리워하는 정성을 품었을 뿐이요, 모기가 태산을 짊어지는 미약한 힘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다. 이에 의병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향할 것이니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단상에 올라 눈물을 뿌리며 군중에게 맹세하는 도다. 곰을 잡고 범을 넘어뜨릴 장사들이 천둥 울리듯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하고 수레를 뛰어넘고 관문을 뛰어넘을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이고 비처럼 모이니 이는 절대로 강박해서 응하거나 억지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신하로서의 충성된 마음이 함께 지성에서 나온 것이다. 위급존망의 날에 처하여 감히 하찮은 몸을 아끼겠는가. 처음부터 의병이라 칭한 이상 직분에도 매이지 않았으며, 병졸은 곧은 것으로서 장렬함을 삼았으니 강약을 따질 것도 없다. 대소인원의 모의를 하지 않고도 뜻이 같았으며 원근의 사민들은 소문을 듣고 일제히 분발하였다.

아! 우리 열읍 수령, 각 처 사민(士民)들아! 충심이 어찌 임금을 잊을 것이며 의리상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니, 혹은 무기를 빌려 주고 혹은 군량을 도우며, 혹은 말을 달려 전장에서 앞장서고, 혹은 분연히 쟁기를 던지고 밭두둑에서 일어나리라. 제 힘이 미치는 데까지 오직 의로 돌아가서 능히 임금을 위해 난을 막는 자가 있다면 그와 더불어 행동하기를 원한다.

우리 행궁(行宮)은 멀리 서도(西道, 평안도)에 있지만 조정의 계획이 장차 정해질 것이다. 왕업이 어찌 한구석에 주저앉겠는가. 옳은 도리로 패하는 자는 멸망하지 않는 것이니 복덕성(福德星)이 바야흐로 오나라의 방위에 이르렀고, 9) 큰 근심은 앞길을 열어 주는 것이니 노래하며 더욱 한나라를 생각하는 도다. 호걸들이 세상을 바로 잡는 것이니 신정에서 눈물을 지을10) 까닭이 없고, 노인들이 임금을 기다리니 서울로 돌아오시는 날을 보리라. 의당 기운을 내서 남보다 먼저 출정함이 마땅하니, 이에 먹은 마음을 터놓고 충심으로 고하는 바이다.

『제봉선생집』권7, 정기록, 마상격문

1)역량(逆亮) : 금나라 제 4대 황제였던 완안량(完顔亮, 1122~1161, 재위 1149~1161)을 말한다. 1149년 사촌형제인 금 희종을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하였기 때문에 역적이라는 뜻의 역량(逆亮)으로 불렸다. 1161년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40만 군사로 남송 침공을 감행하였으나 채석(采石)에서 우윤문(虞允文)이 지휘하는 송군에게 대패하였다. 그 사이 거란이 서북 변경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종제인 완안옹(完顔雍)이 동경 요양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금 세종(世宗)으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남송 공략을 멈추지 않고 오히려 군사들에게 장강을 건너 진군하도록 지시하였으며, 이에 휘하의 대장 야율원의(耶律元宜)에게 자신의 막사에서 기습당하여 죽었다. 사후 해릉왕(海陵王)으로 강등되었다.
2)구오(勾吳)의 천식(荐食) : 천식(荐食)은 다른 나라를 점차 먹어들어간다는 뜻으로, 변방의 제후국이었던 오(吳)나라가 패자로 부상하여 다른 나라를 공략한 일을 말한다. 구오는 춘추전국시대 오나라(?~기원전 473)의 별칭이자, 초대 왕인 태백(太伯)의 다른 이름이다.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조부인 태왕(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왕위를 막내아들 계력(季歷)에게 물려주었으며 계력 사후 그 아들인 희창(姬昌)이 왕위에 올라 문왕이 되었다. 맏아들인 태백은 둘째 중옹(仲雍)과 함께 멀리 떠나 정착한 곳에서 왕위에 올라 구오라고 하였다. 주나라 건국 후 문왕의 아들인 무왕(武王)은 중옹의 증손이자 오나라의 군주인 주장(周章)을 찾아내어 제후로 봉하였다. 오나라는 중원과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다른 국가와 문물 교류가 별로 없다가 19대 군주 수몽(壽夢, 기원전 585~561)에 이르러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 진(晉)나라가 초(楚)나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오나라에 병법을 가르치는 등 군사 원조를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오나라는 중원 각국과 교류하기 시작하며 국력이 신장되어 갔다. 오나라는 24대 오왕 합려(闔閭) 때 제(齊)나라의 병법가인 손무(孫武)를 초빙하여 군사력을 더욱 강화하였으며, 초나라와 다섯 번을 싸워 모두 승리할 정도로 강국이 되었다.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는 중국 전역을 제패하려는 야심을 갖고 주 왕실을 보존한다는 명분 아래 제후들을 불러 회맹을 주재하였댜. 이 자리에서 주 왕족인 희성(姬姓)의 제후들 중 누가 맹주가 될 것인지 진(晉)나라 정공(定公)과 다투었으나 정공의 신하인 조앙(趙鞅)의 위협에 굴복하여 맹주의 자리를 포기하였다가, 무력을 써서 진나라 정공의 진영을 포위하고 맹주가 된 후 귀국하였다. 그러나 부차가 회맹을 주도하는 동안 오나라는 월(越)나라 군에게 기습당하였으며, 4년 뒤 오나라는 다시 월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3)고립된 소수의 군사로 깊숙히 쳐들어 간 것 :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송나라를 쳐들어간 일을 말한다.
4)북군이 날아왔다는 말 : 남북조 시기 북쪽의 수나라 군대가 순식간에 장강을 건너 남쪽의 진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이에 진나라에서는 북쪽의 군대가 강을 날아서 건넜다고 탄식하였다.
5)태왕(太王)이 빈(邠) 땅을 떠나는 : 주(周) 문왕(文王)의 조부인 태왕(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가 빈(邠) 땅을 떠나 기산(岐山)으로 옮겨 주나라를 건립한 일을 말한다.
6)명황(明皇)이 서촉(西蜀)에 행차하던 거조를 하셨으니 : 당나라 현종이 안사의 난을 피해 서촉 땅으로 파천한 사실을 말한다.
7)육지(陸贄)가 조서를 쓴 것 : 783년 수도 장안을 점령한 주차(朱泚)의 반란군을 피하여 당나라 덕종은 봉천(奉天)으로 피신하였다. 육지는 그를 따라가서 조서(詔書)를 지었는데 그 문장이 뛰어나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8)봉천(奉天)의 어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상주(相州)의 군사는 이미 무너졌다 : 정강(靖康)의 변(變)을 말한다. 북송 말년 금나라가 송나라를 침입하여 수도 개봉에 접근하자, 흠종 황제는 강화파 대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화의를 하기로 하였다. 그는 수도를 지키기 위해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각지의 송나라 군에게 해산 명령을 내리고, 동생인 강왕(康王) 조구(趙構)를 강화 사절로 보냈다. 조구는 중도에 생각을 바꾸어 금나라 진영으로 향하지 않고 상주(相州)로 가서 군사를 모았으나, 금나라 군사들은 그 사이 빠른 속도로 개봉에 도착하여 1126년 11월 금군(禁軍) 3만 명밖에 남지 않았던 도성을 쉽게 점령하고 황제의 항복을 받았다. 또한 궁궐, 사찰의 재물과 송나라의 주군현 지도를 약탈하였으며, 태상황 휘종, 흠종 황제를 비롯한 황족과 관리 3,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9)복덕성(福德星)이 바야흐로 오나라의 방위에 이르렀고 : 고대 점성술에서는 복을 주관하는 별인 복덕성이 있는 나라를 침범하면 침범한 나라가 오히려 망한다고 믿었다. 춘추전국시대 진(秦)나라가 오(吳)나라를 침범하였다가 몇 해 뒤 진나라는 멸망하고, 오나라는 후한 멸망 후 삼국의 하나로서 부활한 사실을 말한다.
10)우국충정의 비분강개하는 심정을 표현하는 말로서, 동진(東晉)이 망할 때 명사들이 모여 국가의 불운을 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頃緣國運中否, 島夷外狺. 始效逆亮之渝盟, 終逞勾吳之荐食, 乘我不戒, 擣虛長駈, 謂天可欺, 肆意直上. 秉將鉞者, 徘徊歧路, 纍郡邙者, 投竄林幽, 以賊虜遺君親, 是可忍也, 使至尊憂社稷, 於汝安乎. 是何百年休養之生民, 曾無一介義氣之男子. 孤軍深入, 女眞本不知兵, 中行未笞, 大漢自是無策. 長江遽失其天塹, 虜騎已薄於神京, 南朝無人之譏, 誠可痛矣, 北軍飛渡之語, 不幸近之. 肆我聖上, 以大王去邠之心, 爲明皇幸蜀之擧, 盖亦出於宗社之至計, 玆不憚於方岳之暫勞. 鞏洛驚塵, 玉色屢形於深軫, 峩岷危棧, 翠華遠涉於脩程, 天生李晟, 肅淸正賴於元老, 詔草陸贄, 哀痛又下於聖朝. 凡有血氣而含生, 孰不憤惋而欲死. 奈何人謀不善, 國步斯頻. 奉天之駕未回, 相州之師已潰. 惷玆蜂蠆之醜, 尙稽鯨鯢之誅. 假息城闉, 回翔何異於幕燕, 竊據畿輔, 跳躑有同於檻猿. 雖天兵掃蕩之有期, 亦兇徒迸逸之難保. 敬命丹心晩節, 白首腐儒, 聞半夜之鷄, 未堪多難, 擊中流之楫, 自許孤忠. 徒懷犬馬戀主之誠, 不量蚊虻負山之力. 玆乃紏合義旅, 直指京都, 奮袂登壇, 灑泣誓象. 批熊拉豹之士, 雷厲風飛, 超乘蹺關之徒, 雲合雨集, 盖非迫而後應, 强之使趨, 惟臣子忠義之心, 同出至性. 在危急存亡之日, 敢愛微 . 兵以義名, 初不繫於職守, 師以直壯, 非所論於脆堅. 大小不謀而同辭, 遠近聞風而齊奮. 咨我列郡守宰, 諸路士民, 忠豈忘君, 義當死國, 或藉以器仗, 或濟以糗糧, 或躍馬先駈於戎行, 或釋來奮起於農畝. 量力可及, 唯義之歸, 有能捍王于艱, 竊願與子偕作. 緬惟行宮, 逖矣西土, 廟謨行且有定, 王業夫豈偏安. 善敗不亡, 福德方臨於吳分, 殷憂以啓, 謳吟益思於漢家. 豪俊匡時, 不作新亭之對泣, 父老徯后, 佇見舊京之回鑾. 想宜出氣力以先登, 是用敷心腹而忠告.

『霽峯先生集』卷7, 正氣錄, 馬上檄文

이 자료는 임진왜란 당시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 1592년(선조 25년) 6월 북상하던 중 전주에 이르렀을 때 임진강에서 관군이 왜군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각 도의 수령과 백성, 군인들에게 보낸 격문이다. 말 위에서 작성하였다 하여 ‘마상격문(馬上檄文)’이라 불리는데, 많은 식자층을 감동시켰고 호남 지역의 많은 의병고경명의 휘하에 모이도록 만들었다. 본래 『정기록(正氣錄)』 뒷부분에 초서체로 수록되었으며, 『정기록』이 목판본으로 간행될 때 ‘격제도서(檄諸道書)’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지만 마상격문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기록』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고경명과 맏아들 고종후(高從厚, 1554~1593), 둘째 아들 고인후(高因厚, 1561~1592) 등 세 부자의 충효⋅절의 정신과 행적,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각 지방 및 각계 인사들에게 보낸 격서 및 서한 등을 수록한 책이다. 이 책은 17세기 초 『제봉집(霽峯集)』을 목판으로 간행할 때 「유서석록(遊瑞石錄)」, 「제하휘록(霽下彙錄)」, 「포충사지(褒忠祠誌)」 등의 작품과 함께 시문집 뒷부분으로 편차되었다. ‘정기록’이라는 명칭은 이 책의 서문을 쓴 윤근수(尹根壽, 1537~1616)가 남송 말기의 충신 문천상(文天祥)이 원나라 군대의 포로가 된 후 옥중에서 쓴 정기가(正氣歌)에 비유해 지은 것이다.

임진왜란 때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은 그 당시 60세였다. 일본군의 침략으로 한양이 함락되고 왕의 의주로 파천했다는 소식에 고경명은 각 처에서 도망쳐 온 관군을 모으고, 그의 두 아들 고종후⋅고인후로 하여금 이들을 인솔하여 수원에서 일본군과 항전하던 광주 목사 정윤우에게 인계하도록 하였다.

그는 전 나주부사 김천일(金千鎰), 전 정언 박광옥(朴光玉)과 의논 후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담양에서 6000여 명의 의병을 조직하고, 전라좌도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유팽로⋅안영⋅양대박을 종사관으로 삼고, 최상중⋅양사형⋅양희적을 모량유사(募糧有司)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전라도 의병 결성과 왜적을 격퇴하겠다는 출사표를 양산숙과 곽현으로 하여금 조정에 전달하도록 하고 담양을 출발해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고경명의병이 태인⋅금구를 지나 전주로 향하고 있을 때 임진강의 방어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접한 군중들이 동요하였다. 이에 고경명의병의 세를 증가하기 위해 양대박을 모병 책임자로 정하였으며, 정윤우에게 관군을 인계하고 돌아온 아들 종후로 하여금 격문을 가지고 금구⋅임피 등지에서 병기와 군량을 수집하도록 하였다. 또 제주 목사 양대수에게 전마를 보내 주도록 요청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고경명은 아들 고인후에게 의병 수백 명을 이끌고 무주⋅진안 등의 요로에 복병을 배치하도록 해서 영남에서 호남으로 진입하는 일본군을 막도록 하였다. 또 전주에서 여산으로 진을 옮겨 고종후⋅고인후와 합류하고 다시 호서⋅경기⋅해서 지방에 창의구국의 격문을 발송하였다. 전주에서 북상할 무렵 황간, 영동 등지의 왜군이 금산을 점령하고 장차 전주를 거쳐 호남을 공격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고경명은 진산에서 부대를 재편성하고, 호서 의병장 조헌(趙憲, 1544~1592)에게 서신을 보내 두 의병 부대가 함께 왜적을 토벌하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고경명은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관군과 좌⋅우익의 진을 편성해 적의 대군이 고수하던 금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왜적의 저항과 관군의 소극적 태도로 퇴각하고 말았다.

그 다음 날 다시 고경명은 부하들과 함께 곽영의 군과 합세하여 선제공격했지만 왜적은 관군이 취약한 것을 알고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관군의 진을 무너뜨렸다. 이는 의병들의 투쟁에도 영향을 미쳐 전황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고경명을 비롯한 안영, 유팽로, 고인후 등의 의병장들과 많은 의병들이 목숨을 잃고 전라도 최대의 의병 부대가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금산 전투를 비롯한 웅치, 이치 등에서의 전투는 일본군의 의지를 꺾어 전라도 침입을 단념하게 만들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임진왜란기 영⋅호남의 의병 활동 비교」,『남명학연구』16,강문식,남명학회,2011.
「제봉 고경명 선생의 생애와 사상」,『한국사상사학』4⋅5,강주진,한국사상사학회,1993.
「제봉 고경명의 사행시 연구」,『고시가연구』26,권순열,한국고시가문학회,2010.
「이순신의 해전과 호남인의 애국 정신」,『정치정보연구』7-2,김영환,한국정치정보학회,2004.
「전쟁과 문학 그리고 삶」,『일본어문학』35,박창기,한국일본어문학회,2007.
편저
「의병의 봉기」, 송정현, 국사편찬위원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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