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동래(東萊)가 이미 함락되어 왜적들이 계속 몰려와 곧장 진격하니 가는 곳마다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대가(大駕)
왕의 어가
가 이미 평안도로 들어가자 황해도 이남에서 동래까지 오직 패전 소식만 들려오고 전혀 다른 소식은 없었다. 그런데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
은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
과 약속하여 한산도(閑山島)에서 회합하였다. 이때에 이순신
이 전선(戰船) 80척을 거느리고서 마침내 이 해 5월 6일에 옥포(玉浦) 앞바다로 나아가니, 적선(賊船) 30여 척이 사면에 휘장을 두르고 기다란 장대를 세워 홍기(紅旗)⋅백기(白旗)들을 현란하게 달았으며, 나머지 왜적들은 육지로 올라가 마을 집들을 불사르고 겁탈하였다. 왜적들은 수군(水軍)
을 보고는 노(櫓)를 빨리 저어 진지(陣地)를 나와 아군(我軍)과 바다 가운데서 만났는데, 아군이 적선 26척을 불살라 버렸다. 이튿날 다시 두 사람이 큰 싸움을 전개하기로 약속하였으나, 대가가 평안도로 행행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러 장수가 도착하지 않아, 그대로 서로 모여 통곡하고는 마침내 9일에 제각기 본진(本鎭)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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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에 이순신
과 원균
이 재차 노량(露梁)에서 회합하여 적선 1척을 만나 불살라 버렸는데, 조금 후에 보니 바닷가의 산 하나에 왜적 100여 명이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있고 그 아래로는 전선 12척이 벼랑을 따라 나란히 정박하고 있었다. 때마침 일찍 들어온 조수(潮水)가 벌써 빠져나가 바닷물이 얕아져 큰 배는 나아갈 수 없었다. 이순신
이, “우리가 거짓 퇴각하면 왜적들이 반드시 배를 타고 우리를 추격할 것이니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큰 군함(軍艦)으로 합동하여 공격하면 승전(勝戰)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였다. 배를 돌리고 1리를 가기도 전에 왜적들이 과연 배를 타고서 추격해 왔다. 아군은 거북선으로 돌진하여 먼저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쏘아 대어 왜적의 배를 모조리 불살라 버리니, 나머지 왜적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발을 구르며 울부짖었다. 한창 전투할 적에 철환(鐵丸)이 순신의 왼쪽 어깨를 명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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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에 당포(唐浦)에 도착하니 적선 20척이 강 연안에 죽 정박하였는데, 그 중에 큰 배 한 척은 위에 층루(層樓)를 설치하고 밖에는 붉은 비단 휘장을 드리워 놓고서, 적장이 금관(金冠)에 비단옷을 입고 손에 금부채를 가지고서 모든 왜적을 지휘하고 있었다. 중위장(中衛將) 권준(權俊)이 배를 돌려서 노를 재촉하여 바로 그 밑으로 돌진하여 그 배를 쳐부수고, 적장을 쳐다보며 활을 쏘니, 시위를 놓자마자 적장이 거꾸러졌다. 4일에 당포(唐浦) 앞바다로 나아가자 전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와 회합하니 여러 장수가 기운이 증가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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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에 외양(外洋)으로 나가다가 적선이 고성(固城) 당항포(唐項浦) 앞바다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듣고, 이순신
이 배 3척을 먼저 보내야 형세를 정탐하도록 하였는데, 겨우 바다 어귀를 나가자마자 바로 포(砲)를 쏘아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모든 군사가 일시에 노를 재촉하여 앞뒤를 고기꿰미처럼 연결하여 나아가 소소강(召所江)에 이르니 적선 26척이 강 연안에 죽 벌여 있었다. 그 중에 큰 배 한 척은 위에 3층 판각(板閣)을 설치하고 뒤에는 검은 비단 휘장을 드리우고 앞에는 푸른 일산을 세워 놓았으며, 휘장 안에는 여러 왜적이 죽 나열하여 시립하고 있었다. 모든 군사가 처음 한 번 교전하고 거짓 패한 척하여 퇴각하니, 층각(層閣)을 세운 큰 배가 돛을 달고 먼저 나왔다. 모든 군사가 양쪽에서 공격하니 적장이 화살을 맞고 죽었다. 그러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 불을 질러 적선 100여 척을 소각해 버리고 왜적의 머리 210여 급(級)을 베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적은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었다. 6일에 잔여 왜적을 외양(外洋)에서 추격하여 또 한 척을 불살라 버렸다. 9일에 모든 군사가 전투를 중지하고 본진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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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6일에 이순신
이 이억기와 노량에서 회합하였는데, 원균
은 부서진 선박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정박하고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永登浦)에서 견내량(見乃粱)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8일에 수군
이 바다 가운데에 이르니, 왜적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모든 군사가 추격하여 가 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地勢)가 좁은 데다 험악한 섬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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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치고는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들을 연속적으로 쏘아 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 버리니, 잔여 왜적 400여 명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10일에 안골포(安骨浦)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첫째 배는 위에 3층 큰집을 지었고 둘째 배는 2층집을 지었으며 그 나머지 모든 배는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그 지역이 협착하였다. 아군이 두세 차례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가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 버렸다. 이 전투에서 3진(陣)이 머리를 벤 것이 2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적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쳤다.
이순신
등이 그의 군관 이충(李沖)을 보내 장계를 올리고 수급을 바치도록 하니, 행조(行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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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 이동하여 설치한 조정
에서는 상하가 뛸 듯이 기뻐하며 경하(慶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충이 오자 임금이 영남의 일을 하문하니, 대답하기를 “감사
김수(金睟)가 함양(咸陽)에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소식이 통하지 않고 있습니다. 적이 직로를 따라 올라오기 때문에 좌⋅우도가 두 조각으로 갈라져서 호령이 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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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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