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토지를 관에서 소유하여 백성에게 주었으니, 백성이 경작하는 토지는 모두 관에서 준 것이었다. 천하의 백성으로서 토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고 경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백성은 빈부나 강약의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토지의 소출이 모두 국가에 들어갔으므로 나라 역시 부유하였다.
토지 제도가 무너지면서 호강자(豪强者)
가 남의 토지를 겸병하여 부자는 밭두둑이 잇닿을 만큼 토지가 많아지고, 가난한 사람은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부자의 토지를 차경(借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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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땅을 빌려 경작함
하여 1년 내내 부지런하고 고생하여도 식량은 오히려 부족하였고, 부자는 편안히 앉아서 손수 농사를 짓지 않고 용전인(傭佃人)
소작인
을 부려서도 그 소출의 태반을 먹었다. 국가에서는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고 그 이득을 차지하지 못하니, 백성은 더욱 곤궁해지고 나라는 더욱 가난해졌다. 이에 한전제(限田制)나 균전제(均田制)를 시행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이것은 고식적인 방법에 불과한 것이나, 역시 백성의 토지를 다스려서 이를 백성에게 주어 경작하게 하는 것이다. 당나라의 영업전(永業田)
, 구분전(口分田)(【안】 당나라의 수전(授田) 제도는 1부(夫)가 1경(頃)의 토지를 받아서 그 중의 80묘(畝)는 구분전으로 삼고, 20묘는 영업전
으로 삼았음) 제도도 역시 인구를 계산하여 토지를 주고 스스로 경작하게 하여서 그 전조(田租)
를 국가의 비용으로 충당하였다. 그러나 식자(識者)들은 그 토지 제도가 바르지 못했음을 비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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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
의 토지 제도에는 묘예전(苗裔田)⋅역분전(役分田)⋅공음전(功蔭田)⋅등과전(登科田)과(【안】 고려의 토지 제도는 당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묘예전을 전대의 국왕 후손에게 분급(分給)하고, 역분전을 관작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인품에 따라서 주고, 공음전을 공신 및 귀화인(歸化人)에게, 등과전을 등과인(登科人)에게 특별히 주었다.) 군전(軍田)
을 두어서 그 전조
를 받아먹게 하였는데, 백성이 경작하는 경우에는 스스로 개간하고 점유하는 것을 허락하여 관에서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노동력이 많은 사람은 개간하는 땅이 넓고, 세력이 강한 사람은 점유하는 땅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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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에게 지급된 토지
⋅한인전(閑人田)1)
1)
한인전(閑人田) : 한인(閑人)에게 지급된 토지이다. 한인전의 지급 대상인 한인(閑人)의 실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직업적 무인으로서 유사시 정규군으로 징발 편성되는 존재라는 견해와, 6품 이하 관리 자녀로 아직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거나 혼인하지 않는 자라는 견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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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힘이 약한 사람은 또 세력이 강하고 힘이 센 사람에게서 토지를 빌려 그 소출의 반을 나누었으니, 이것은 경작하는 사람은 하나인데 먹는 사람은 둘이 되는 셈이다. 그리하여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져서, 마침내는 스스로 살아갈 길이 없어서 농토를 버리고 직업이 없이 떠돌아다니거나 직업을 바꾸어 말업(末業)
상공업
에 종사하기도 했으며, 심한 경우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아! 그 폐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그 제도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면서는, 세력가들이 서로 토지를 겸병하였으므로 한 사람이 경작하는 토지에는 그 주인이 더러는 7~8명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고, 전조
를 바칠 때에는 인마(人馬)의 접대며, 청을 들어 강제로 사는 물건이며, 노자로 쓰이는 돈이며, 조운(漕運)
에 드는 비용들이 또한 조세의 수효보다 배, 또는 5배 이상이나 되었다. 상하가 서로 이익을 다투어 일어나서 힘을 겨루어 빼앗으니, 화란이 이에 따라 일어나서 마침내는 나라가 망하고서야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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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殿下)
태조 이성계
는 잠저(潛邸)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집 또는 왕위 오르기 전의 신분 상태
에 있을 때 친히 그 폐단을 보고 개탄스럽게 여기어 사전(私田)을 혁파하는 일을 자기의 소임으로 정하였다. 그것은 대개 경내의 토지를 모두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키고 인구를 헤아려서 토지를 나누어 주어서 옛날의 올바른 토지 제도를 회복시키려고 한 것이었는데, 당시의 구가(舊家) 세족(世族)들이 자기들에게 불편한 까닭으로 입을 모아 비방하고 원망하면서 여러 가지로 방해하여, 이 백성들로 하여금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찌 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뜻을 같이한 2~3명의 대신들과 함께 전대의 법을 강구하고 오늘의 현실에 알맞은 것을 참작한 다음, 경내의 토지를 측량하여 파악된 토지를 결수(結數)로 계산하여 그 중의 얼마를 상공전(上供田)
에 이르기까지 공역(公役)을 맡은 자에게도 모두 토지를 주었다.
왕실 경비에 충당키 위해 지급된 토지
⋅국용전(國用田)
국가의 제사⋅빈객 등 공공 경비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지급된 토지
⋅군자전(軍資田)
군량을 충당하기 위해 지급된 토지
⋅문무역과전(文武役科田)
현직 문무 관리에게 지급된 토지
으로 나누어 주고, 한량(閑良)으로서 경성에 거주하면서 왕실을 호위하는 자, 과부로서 수절하는 자, 향역(鄕驛)⋅진도(津渡)의 관리, 그리고 서민과 공장(工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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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일이 비록 옛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토지 제도를 정제하여 1대의 전법을 삼았으니, 전조
의 문란한 제도에 비하면 어찌 만 배나 나은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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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집』권7, 『조선경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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