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전기경제농업 중심의 경제 정책

문종의 농사를 권장하는 글

임금이 친히 유서(諭書)를 지어 황해도⋅평안도 감사에게 내리기를, “내가 들으니, 중국은 관개(灌漑) 시설을 성(盛)하게 이용하는데, 흔히 수차(水車)1)로써 성공을 거두는 예가 많다고 한다. 또 들으니, 왜나라에서도 또한 관개 시설을 이용하므로, 그 때문에 비록 조그마한 수재와 한재가 있어도 실농(失農)함이 적어서 백성의 식량이 항상 넉넉하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예전부터 하천의 제방에 물을 저장하는 곳이 많이 있었으나 이익을 줄 만한 곳이 많은 까닭에 만약 수재나 한재를 만나면 백성이 흩어져 유망(流亡)한다. 선왕(先王)께서 이를 염려하여 수차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본국(本國)은 토양의 성분이 푸석하여 물을 받을 수 없는 까닭에 수차법은 마침내 이로움을 보지 못하였다. 내가 일찍이 이를 생각하여 보니, 천지 사이에는 생기가 유행하여, 비는 적시어 주고 해는 말리어 주는 것이 자상하고 은근하다.

그러나 하늘과 땅이 크지만 반드시 유감이 있어서 혹은 큰물을 내기도 하고 혹은 가뭄을 일으키기도 하여 사람의 행위만 못하다. 그러므로 하늘은 반드시 사람에게 손을 벌리어서 사람이 능히 재량하여 만들고 도와준 뒤에야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극진히 하고서 하늘에 기대하면 천은(天恩)을 바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선왕이 수차법에 유의하시던 뜻을 생각하고 또 금년에는 북도(北道)의 백성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서 밤낮으로 백성을 구제하려는 뜻을 계승할 방법을 생각하니, 하천의 제방과 관개와 같이 급한 것이 없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우리나라는 개벽한 이래 나라를 세운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만약 관개할 만한 곳이 있었으면 옛날 사람들이 이미 다하여 지금은 반드시 새로 이용할 곳이 없을 것이다.

또 일찍이 이미 경기에 제방한 곳을 시험하였으나 모두 물 때문에 무너져서 단지 백성의 노력만을 허비하고 결국 이로운 바는 없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만약 옛사람들이 모두 다 이미 하였다고 생각하며 생각을 두지 않는다면, 즉 면화(綿花) 같은 것도 우리나라에서 심은 것이 이제 오래되지 아니하고, 화약이 그 이용을 자세하고 극진하게 한 것은 을축년(1445, 세종 27)부터였다. 이 같은 부류가 하나가 아니다. 만약 어떤 사람의 말과 같다면 이 같은 일들은 모두 오늘날에 이용할 수 없는 것이다. 경기에 시험하였으나 이익이 없었다는 것에 대하여서는 대개 또한 사람의 한 일이 미진한 것이지 어찌 하천 제방의 죄이겠는가? 무릇 수리를 다스리는 것은 옛날부터 어렵게 여겼다. 요(堯)임금 때에 곤(鯀)2)이 공적을 쌓았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징계하고, 다시 대우(大禹)를 임용하지 않았다면 천하의 중민(衆民)이 어찌 쌀밥을 먹는 공이 있었겠느냐? 지금은 다만 인력의 다소와 물[水]을 쓸 만한지의 여부를 논하여 그 경중(輕重)과 이해(利害)를 살필 뿐이요, 그 방축(防築)이 견고한지의 여부는 사람이 하는 것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대체 동에서도 할 수 있고 서에서도 할 수 있으며, 별로 커다란 폐단이 없는 일이라면 마땅히 옛날의 관례대로 하고 고쳐 만들 필요는 없으나 농사일은 늦출 수가 없다.

하삼도(下三道) 같은 곳은 본래 수전이 많고 민속(民俗)도 농사에 힘쓰니 이제 고치어 확장하지 않더라도 또한 가(可)하다고 하겠으나, 평안도⋅황해도는 근년에 계속하여 흉년이 들어서 태반이 유망하니, 만약에 구제할 만한 일만 있다면 마땅히 서둘러서 하여야 할 일이지 어찌 늦출 수가 있겠는가? 대체로 모든 농사는 물이 나면 한전(旱田)이 상하고 가물면 수전이 상하는데, 수재(水災)의 피해는 구할 도리가 없지만, 한재(旱災)의 피해는 하천을 제방하고 물을 저장하여서 구제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병인년(1446, 세종 28)⋅정묘년(1447, 세종 29) 간에 평안도와 황해도에 기근이 더욱 심하였던 것은 수전을 만든 곳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금년에도 두 도는 또한 실농(失農)하는 데 이르렀으나 수전을 만든 곳은 아주 심한 데에 이르지는 아니하였다. 이것이 내가 관개에 급급하고 수전을 만들려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내가 부지런하고 민첩하며 너그럽고 소탈한 선비 한두 사람을 택하여 수리의 책임을 오로지 위임하려고 하는 것이다.

춘추(春秋)로 순찰하면서 백성들에게 농업과 양잠[農桑]을 권장하고, 순순(諄諄)히 수전의 이익을 가르치고 타이르며 백성들의 진정한 바람에 따라 혹은 하천을 막기도 하고, 혹은 못을 파기도 하여 혹은 진펄[沮洳]에 샘이 있는 땅을 개간하게 한다. 이와 같으면 새로 개간한 첫해에는 비록 결실이 무성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수년 뒤에는 이익을 얻는 것이 자연히 배나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백성들이 만약 떨쳐 일어나서 새로운 수전을 많이 개간할 때 첫해와 2년에는 그 세(稅)를 전부 면하고, 3년째와 4년째에는 그 조세를 반납(半納)하게 하고, 5년째 뒤에는 그 전량의 조세를 거두면 대체로 또한 백성을 구제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내가 이 뜻을 가지고 대신들에게 의논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사람을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 도의 감사에게 유지를 내려서 수전을 권장하여 만들게 하면 됩니다’ 하나, 내가 다시 이를 생각해 보니, 과연 대신들의 의논과 같이 바야흐로 민간에 일이 많고, 또 사람을 보내어 새 일을 일으킨다면 고식적(姑息的)인 백성들은 훗날 이익을 헤아리지 못하고 시끄럽게 수심과 원망을 하게 될 것이므로 그 일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 보니, 그 도(道)에는 진펄의 땅이 많지만 수전 만드는 일을 백성들이 기꺼이 하려 하지 않는다고 하니, 경은 이 뜻을 알고, 나의 뜻을 가지고 두루 촌백성들을 깨우쳐 주고, 인도하기를 이익으로서 한다면 그 중에 이러한 뜻을 아는 백성이 있어서 반드시 서로 이끌고 이에 응할 자가 있을 것이다. 경은 찾아서 묻고 그들과 논의하여 수전을 많이 만들되, 혹은 샘이 있는 곳에 의거하고, 혹은 하천과 못을 막아서 민력(民力)에 해롭게 하지 말고 백성의 원망을 일으키지 말라.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견고해 질 것이요, 그 수세(水勢)로 하여금 스밀 것은 스미게 하고, 저수(貯水)할 것은 저수하게 하여, 모름지기 타인으로 하여금 간언(間言)이 없게 하라. 어떤 사람은 또 말하기를, ‘평안도의 하천은 모두 험하고 커서 막을 수 없다’ 하니, 경은 이 뜻을 아울러 살펴서 마음을 다하여 적당히 배치하고, 행할 만한지의 여부와 민정이 원하고 싫어하는지를 추후에 자세하게 계달(啓達)하라” 하였다.

문종실록』권10, 1년 11월 18일(임자)

1)수차(水車) : 물을 대는 기구의 하나로 중국이나 일본에서 관개(灌漑)에 이를 써서 성공을 거두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실패하였다.
2)우(禹)의 아버지로 요(堯)⋅순(舜) 때 9년이나 황하를 다스렸다.

上親製諭書, 下黃海, 平安道監司曰, 予聞, 中國盛用灌漑, 多以水車爲功. 又聞, 倭邦亦利灌漑, 以故雖小有水旱, 鮮有失農, 民食恒足. 我國自來, 亦多有川防貯水, 而遺利之處多, 故若遇水旱, 民散流亡. 先王念此, 立水車之法. 然本國土性浮踈, 不能載水, 故水車之法, 終不見利. 予嘗思之, 天地之間, 生意流行, 雨潤日烜, 委曲慇懃. 然天地之大, 必有所憾, 或澇或旱, 不如人爲. 故天必假手于人, 而人能栽成輔相, 然後事以成焉. 故盡人之爲以待天, 則天恩可以望矣. 故予念先王留心水車之志, 且遇今年北道民生之艱, 日夜思所以繼志救民之術, 莫若事於川防灌漑之爲急. 或者以爲, 我國自開闢以來, 立國已久, 若有可以灌漑之處, 則古之人已爲之, 今必無新利之處. 且嘗已驗於京畿所防之處, 皆爲水所毁, 但費民力, 終無所利. 予則以爲不然. 若以爲古人皆已爲之, 不復致慮, 則如綿花之種於我國, 今不久矣, 火藥之精盡其利, 在於乙丑. 如此之類非一. 若如或人之說, 則如此等事, 皆不得利用於今日. 至於驗之京畿, 而不利者, 蓋亦人事之未盡, 豈川防之罪哉? 凡治水利, 自古爲難. 當堯之時, 懲於鯀之績用不成, 不復更任大禹, 則天下蒸民, 豈有粒食之功哉? 今但當論人力之多少, 水之可用與否, 審其輕重利害而已, 其防築之牢固與否, 在人爲之如何. 大抵可東可西, 別無巨弊之事, 則當仍舊貫, 不必改作, 若農務則不可緩也. 如下三道, 則本多水田, 民俗力農, 今不更張, 亦云可也, 平安, 黃海道, 則近來連荒, 太半流亡, 若有可救之事, 則當急急爲之, 何可緩也. 大凡農事, 水則旱田傷, 旱則水田傷, 而水災之害, 無有救理, 旱災之害, 川防貯水, 可能救之. 故丙寅, 丁卯年間, 平安, 黃海道, 饑饉尤甚, 水田之處少故也. 至於今年, 兩道亦失農, 而水田之處, 不至太甚. 此予所以汲汲於灌漑, 而作水田也. 故予欲擇勤敏寬簡之士一二人, 專委水利之任. 春秋巡省, 勸民農桑, 諄諄敎諭, 水田之利, 因民情願, 或防川或築淵, 或墾沮洳有泉之地. 如此則新墾初年, 雖不秀實, 數年之後, 得利自倍. 如此而民若興起, 多墾新水田, 則初年二年, 全免其稅, 三年四年, 半納其租, 五年之後, 乃收其全租, 則蓋亦救民之一術也. 予以此意, 議諸大臣, 僉曰, 不必遣人. 下諭其道監司, 勸作水田可也. 予更思之, 果若大臣之論, 方今民間多事, 而又遣人興作新事, 姑息之民, 不計遠利, 騷然愁怨, 故寖其事. 然詮聞, 其道多有沮洳之地, 而作水田之事, 民不肯爲, 卿知此意, 以予之意, 徧曉村民, 導之以利, 則其中有知之民, 必有相率而應者. 卿可與訪問論議, 多作水田, 或因有泉, 或防川澤, 不害民力, 不起民怨, 爲之則必使堅固, 使其水勢, 可以洩可以蓄, 須使他人, 無有間言. 或者又以爲, 平安道川, 皆險大, 不可防之. 卿其幷悉此意, 盡心布置, 得宜可行與否, 民情願厭, 隨後詳悉啓達.

『文宗實錄』卷10, 1年 11月 18日(壬子)

이 사료는 1451년(문종 1년) 문종(文宗, 재위 1450~1452)이 내린 권농 유서이다. 당시 수전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수리 시설 문제가 시급하고 중요한 일로 대두되었음을 보여 준다. 수전 농법에서는 수재와 한재를 막기 위해 제언(堤堰)과 천방(川防) 관련 시설이 매우 중요하였다. 이에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말엽까지는 중국과 일본에서 널리 활용되는 수차를 보급하고자 했으나, 이 권농 유서에 따르면 문종은 기존 수차 보급 노력을 중단하는 대신 수리 시설을 널리 보급하고자 하였다.

조선 왕조의 권농 정책은 농업 생산력 발전을 위해 추진되었으며, 당시 3가지 정도의 문제가 권농 정책에서 커다란 과제로 제기되었다. 첫째는 수전을 개발하고 수도작을 발전, 보급하는 일이었다. 둘째는 농업 기술 개발을 전제로 세역전(歲役田)을 불역상경전(不易常經田)으로 전환 확대하는 일이었다. 셋째는 이와 관련해 선진 지역의 새로운 농작물이나 농업 기술을 널리 후진 지역으로 보급시켜 나가는 일이었다. 문종의 권농 유서는 하천 제방과 관개의 중요성에 대한 언급과 함께 수전 농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조선 초기 수전 개발은 두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수리 시설을 함으로써 해택지(海澤地)를 개발하고 저습(低濕)한 한지(閑地), 진지(陳地) 및 종래의 한전(旱田)을 수전(水田)으로 개발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수리 시설을 만들어 천수(天水)에만 의존하던 열악한 토지를 관개가 가능한 양전(良田)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전자는 수리 적정 지역이면 어느 곳에서든지 시행되었는데, 특히 한전 지대인 양계⋅해서⋅관서 지방에서 적극 추진되었다. 후자는 기존 수전 지대에서 추진되었다. 이 경우 수전 지대에서 수리 시설을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 수전 개발책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한전 지대에서 수전을 개발하는 일과 수전 지대에서도 수전이 될 수 없던 한지를 수전으로 개발하는 일이었다. 이 같은 한전 지대나 수전이 될 수 없던 한지에서 수전을 개발하고 수도작을 발전시키려 한 것은, 이 시기에는 농업에 대한 인식이 수전 농업을 농업의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수리작답(水利作畓)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유리하다고 보았다.

수리작답이 유리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확인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진전(閑陳田)을 작답함으로써 수입을 늘릴 수 있었다. 제언(堤堰)을 축조할 경우 수몰 지역이 있다 하더라도 수리 시설을 통해 얻는 소출이 더 많았고, 따라서 국가 수입도 늘어났다. 더욱이 국가의 재용은 쌀이 중심이어서 정부 역시 수전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수전 개발을 추진하는 가운데 수한(水旱)에 대비해서도 수전이 유리하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양계⋅해서⋅관서 지방에서의 수전 개발은 국초 이래 권장하는 일이었지만, 이를 이루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 지역 주민들은 그동안 한전 농업만 해 왔기에 수전 농업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들은 함경도 지역은 지역이 춥고 서리가 일찍 내려 풍토와 기질이 남방 지역과 달라 수전은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종성⋅길주 등의 사진(四鎭) 둔전(屯田)에서 이미 인수관개(引水灌漑)하여 수전을 경영했으므로 수전 개발이 가능하다고 확신하였다. 따라서 정부는 그 지방 농민들을 계몽시켜 수전을 개발하고자 했고, 이에 관찰사와 수령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권농 정책으로 성실히 수행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함경도 길주 이북의 수령들에게는 권농(勸農) 기경(起耕)하는 수전의 면적에 따라 시상할 것을 약속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북도(北道) 지방에서도 점차 수전을 개간하는 경우가 늘어났으며, 하삼도에서 옮겨 온 이들이 다작수전(多作水田)하여 많은 이익을 보자 이를 모방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수전 개발을 위해서는 수리 시설을 갖추는 일이 선행되어야만 했다. 한진전(閑陳田)을 개발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기존의 수전을 개량하기 위해서도 수리 시설은 꼭 필요하였다. 그러한 시설로는 제언, 방천(防川)이 전부였다. 국초부터 많은 사람이 제언과 방천의 수축과 신축을 제안하였으며,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은 평소 수리 시설에 관심이 많았던 이들을 지방에 파견하여 수리 시설을 순찰하게 하였으며, 각 도에 제언 축조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러 제언이 수축되었으며, 이러한 사업은 침체기도 있었지만 수리 정책이 궤도에 오르면서 수령칠사(守令七事)의 절목에서도 중요한 문제로 재확인되었다.

수리 시설로서 수차를 사용하는 문제도 논의되었다. 수차는 중국과 일본에서 널리 이용되었는데, 그곳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들이 수차 사용을 건의한 것이 계기였다. 세종 조는 수리 정책이 적극 추진되던 시기였으므로 정부에서는 각 도에 수차를 제조하여 반급하거나 그 제조법을 아는 장인으로 하여금 이를 지도하여 보급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수차 보급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땅의 성질이 수차를 관개용으로 이용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차 보급 정책을 철회하자 제언, 방천 등의 수리 시설 개발이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재지 유력자 지주층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국가 정책으로 장려하고 추진하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이들은 제언 축조가 불리하면 축조 수보를 방해하기도 하고, 축조의 선정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적절한 지역임에도 이를 숨기거나 보고하지 않았다. 반면 축제(築堤)로 인해 토지 분급이 있게 될 경우 이들에게 더 많은 토지가 선급되었으며 관개 수리 혜택도 이들이 전유(專有)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수리 시설은 재지 유력자들의 협력하에 축조될 수밖에 없었으며, 시설이 만들어진 후에도 이들에게 유리하게 기능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전기 권농 정책」,『동방학지』42,김용섭,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1984.
「조선전기 직전제의 운영과 그 변동」,『한국사연구』28,이경식,한국사연구회,1980.
저서
『조선시대농법발달연구』, 염정섭, 태학사, 2002.
『한국중세 토지제도사』, 이경식,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조선전기농업경제사』, 이호철, 한길사, 1986.
편저
『조선시대 농업사 연구』, 한국농업사학회 편, 국학자료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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