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전기경제농업 중심의 경제 정책

지주 전호제의 확대

상이 소대하자 시강관 정유길(鄭惟吉)이 아뢰었다.

정전법(井田法)1)을 비록 지금은 시행할 수 없지만, 만일 전지(田地)를 한정하여 함부로 점유하지 못하게 한다면 겸병(兼幷)하는 폐단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한나라 조정에서 (이를) 시행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전조(前朝)에서도 성취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금 시행한다면 반드시 장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겸병하는 폐단 때문에 부자는 전지가 서로 잇닿아 있고 가난한 사람은 송곳 하나 세울 땅도 없습니다. 똑같은 왕의 백성으로 부유함과 가난함이 서로 같지 않으니 어찌 크게 공변된 왕정(王政)의 도(道)이겠습니까. 임금이 된 이는 의당 백성의 어려운 생활에 유념하여야 합니다”

명종실록』권7, 3년 3월 28일(계묘)

1)정전법(井田法) : 중국 고대의 전지제도(田地制度). 일정한 전지를 정(井)자 모양으로 구획(區劃)하여 중앙의 100묘(畝)는 공전(公田), 밖의 800묘는 사전(私田)으로 하였다. 그 사전은 여덟 집에 나누어 주어 경작하도록 하고 중앙의 공전은 여덟 집이 공동으로 경작하여 공전에서 수확되는 곡식을 세금으로 바치고 사전에서의 수확은 개인 소득으로 하게 하였다.

上召對, 侍講官鄭惟吉曰. 井田之法, 雖不能行之於今, 若令限田, 毋得濫占, 則庶無兼幷之弊. 漢朝行之而未終, 前朝【高麗】 試之而未就, 今欲行之, 必有礙滯之患. 然兼幷成弊, 富者田連阡陌, 貧者無立錐之地. 一是王民, 豐約不同, 豈王政大公之道乎? 爲人主者, 當留念於小民之艱難.

『明宗實錄』卷7, 3年 3月 28日(癸卯)

이 사료는 1548년(명종 3년) 국왕과 신하가 만나는 자리인 소대(召對)에서 시강관인 정유길(鄭惟吉, 1515~1588)이 지주 전호제의 확대를 막기 위해 정전법을 시행하자고 건의하는 내용이다. 당시 가난한 소농민은 계속 토지를 잃고 부자들은 전지를 확대하여 겸병하는 폐단을 지적한 것으로, 이는 명종(明宗, 재위 1545~1567) 대에 직전법이 폐지되면서 수조권적(收租權的) 지배가 사라지고 지주 전호제의 생산 방식이 확대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백성들은 토지 소유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필요에 따라 토지를 취득, 경영, 처분 상속할 권리를 의미한다. 하지만 개인의 토지 소유권에는 여러 면의 제약이 따랐다. 조선 전기에는 과전법의 규제를 받아 자유로운 토지 매매가 금지되었으며, 또 토지 소유권을 갖기 위해서는 땅을 놀려서는 안 되고 경작하면서 이용해야만 했다. 여기에 신분 차별이 토지 소유권에도 영향을 미쳤다.

국가는 개인이 소유한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여 받았는데, 토지에 매겨진 세금을 전세(田稅) 혹은 전조(田租)라 하였다. 전세를 받아 내는 것이 국가의 기본 기능이었으며, 국가가 쥐고 있는 수조권을 일반 관료와 관청에 나누어 줄 경우 해당 토지에 대하여 그 관료와 관청이 수조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수조권에 근거하여 실제 토지 소유자의 소유권 일부를 제한하는 것을 ‘수조권적 토지 지배’라 부른다. 소유권의 일부를 제한하는 수조권은 고려왕조 이래 토지에 대한 권리의 하나로 이어져 왔다. 이러한 수조권에 기초한 토지 지배는 조선에 들어와 명종 무렵 직전법이 폐지되면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16세기 후반 수조권과 같은 성격의 권리를 일반 백성의 토지에 부과할 수 있는 자격은 궁방(宮房)이나 관청만 갖게 되었다. 관료들은 더 이상 수조권에 접근하지 못했으며, 이제 토지에서 경제적 소득을 얻으려면 토지를 소유해야만 하였다. 대대로 많은 토지를 상속받든가, 본인이 이곳저곳에서 토지를 개간하거나 사들여 토지 소유자가 되어야 하였다. 상속⋅개간⋅매득을 통해 확대한 토지를 경영하는 방식은 다양하였다.

대토지 소유자들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농업 경영을 하였지만 농민들의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면서 소작인에게 토지를 빌려 주고 지대를 수취하는 이른바 ‘지주 전호제’가 확대되어 갔다. 그리하여 많은 토지를 갖고 있던 지배층은 농업 생산에 직접 종사하지 않고, 지주로서 지대를 받아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17세기 중후반 이후 조선 사회의 경제 규모는 크게 변화하였다. 농산물이나 수공업 제품을 상품으로 교역하는 규모가 커지고 상평통보 등 화폐의 유통이 활발해지는 등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농촌 사회도 변화하여 농업 경영과 토지 소유 규모에서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전반적으로 재산이 많은 토호의 토지 소유가 늘어나면서 토지를 잃은 농민은 소작인이 되거나 일시적 임금 노동자 혹은 품팔이가 되기도 했고, 상업이나 수공업으로 전환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농업 기술 발달에 잘 적응하고 활용한 상민천인들 중에서도 부자가 생겨났다. 이러한 현상은 신분제 변화와 함께 나타나 18세기 이후에는 ‘서민 지주’라 불리는 양인 또는 천인 신분의 지주도 등장하게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 전기 소농민 경영의 연구」,『논문집』12,김태영,경희대학교,1982.
「조선전기 직전제의 운영과 그 변동」,『한국사연구』28,이경식,한국사연구회,1980.
「조선 전기 농업과 그 경영」,『경상논집』20,이호철,경북대학교 경제경영연구소,1992.
저서
『조선전기 토지제도사연구』, 김태영, 지식산업사, 1983.
『조선시대농법발달연구』, 염정섭, 태학사, 2002.
『한국중세 토지제도사』, 이경식,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조선전기농업경제사』, 이호철, 한길사, 1986.
편저
『조선시대 농업사 연구』, 한국농업사학회 편, 국학자료원, 2003.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