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전기경제상업 활동과 백성의 경제 생활

양반의 경제적 기반

요즈음 말을 더듬는 계집종이 종아리가 아파서 잡초를 뽑지 못했다. 개금(介今)에게 혼자 매도록 해 봤자 골고루 매어 주기가 어렵다. 비단 콩밭에 풀이 무성할 뿐 아니라 두 군데 논은 네 번이나 풀을 매 주지 않았다. 인력이 곱절이나 들 것이니 참으로 고민이다.

『쇄미록』병신 7월 초1일

오늘은 소를 빌려 둔답(屯畓)을 갈려고 하였다. 조윤공(趙允恭)이 어제 소를 주기로 허락했는데 오늘은 사정이 있다고 빌려 주지 않았다. 고용한 사람이 이미 아침밥까지 먹었는데도 일을 시키지 못하니 매우 유감이다.

『쇄미록』병신 3월 12일

且近日訥隱婢痛脛, 不得芸草. 只令介今獨芸, 勢不及周. 非但根豆茂草, 兩畓獨未四除, 人力必倍, 可悶可悶.

『瑣尾錄』丙申 七月 初一日

且今日借牛欲耕屯畓, 趙允恭昨己許牛, 今則托故不借. 傭人已食朝飯, 而不得使, 深恨不已.”

『瑣尾錄』 丙申 三月 十二日

이 자료는 오희문(吳希文, 1539~1639)의 일기인 『쇄미록(瑣尾錄)』의 일부로, 16세기 후반 경 지주들의 농업 경영 실태를 보여 주는 자료다. 첫 번째 자료는 김매기를 하는데 계집종이 아파서 다른 계집종 혼자 하기 어렵다는 내용이다. 노비를 넉넉하게 보유하지 못했던 오희문 집안의 토지 경영 모습을 보여 준다. 두 번째 자료는 밭을 가는데 소를 이용하려고 조윤공(趙允恭)이라는 사람에게 부탁했으나 빌려 주지 않아 작업을 할 수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조선 시대 양반들의 재산은 노비 및 토지와 가옥 등이 중심이 되었다. 재산상에 있어 토지와 노비의 비중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토지보다 노비에 더 비중이 두어졌다. 노비는 당시 양반들의 사회 경제적 생활은 물론이고 재산의 생산성이나 수익성으로 볼 때도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양반의 체통 유지는 노비의 노동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개인적인 심부름을 비롯해 농경이나 길쌈을 할 때도 노비는 꼭 필요한 존재였다. 노비의 수를 늘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공훈을 세우거나 관직을 통하여 획득할 수 있었으며, 아버지와 어머니 혹은 아내의 친정으로부터 상속받을 수도 있었다. 이 외에도 매매를 통해 노비를 얻기도 하였다. 이렇게 확보한 노비노비의 신분 내지 소유가 대대로 전해지는 세전법(世傳法)에 따라 시간이 흐르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 이와 더불어 양인천인이 결혼하여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게 하였는데, 어머니가 노비일 경우 어머니 주인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노비의 숫자는 더욱 증가하였다.

토지의 경우 양반들은 상속 및 분배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소유 토지를 늘려 나갔다. 지방에 살면서 지방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여말 선초의 재지 사족은 한량(閑良)으로 불렸는데, 이들은 지방군에 복무하는 대가로 과전법(科田法)에서 규정한 군전(軍田)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 중앙 정계에서 낙향하는 관료들의 경우에는 당시 가족 제도와 자녀 균분 상속제에 따라 각기 어머니 혹은 아내의 고향으로 가서 안착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재지 사족은 조선이 세워진 후 불교가 억압받으면서 생겨난 폐사(廢寺)의 토지와 노비를 점유하기도 하였고, 소유 노비를 이용해 황무지를 개간하며 논밭을 확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개간 가능한 토지는 노동력만 있으면 쉽게 얻을 수 있었으며, 외거 노비를 시켜 경작하게 하면 노비로부터 일종의 소작료인 신공(身貢)도 받을 수 있었다.

양반의 토지 축적 방법으로는 무엇보다 양민천민의 토지를 매입 또는 겸병하는 것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양인의 경우는 대개 곡물을 꾸어 주고 이자와 함께 받는 환자(還上), 곡식을 꾸어 주고 높은 이자를 받는 장리(長利) 등의 부채 상환, 병역 부담, 기근 등의 이유로 자기 논밭을 부근에 사는 양반에게 팔았다. 흉년과 기근이 빈번하게 일어나던 때에는 일정한 재산을 갖고 있던 양반은 적은 재화로써 많은 토지를 살 수 있었다. 천인의 경우도 양인과 마찬가지로 기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또는 빚이나 신공의 독촉에 못 이겨 논밭을 팔거나 상납했던 것이다.

양반들은 또한 노비에게 상행위를 시켜 재산을 늘리기도 하였다, 상품 유통이 활발하지 못했던 조선 전기 사회에서 생산지와 소비지 사이에는 물건의 가격 차가 매우 컸다. 이를 이용하여 일정한 자산을 가진 양반들은 노비를 시켜 상행위를 하였다. 그 방법은 계절에 따라 곡물과 포목(布木) 가격이 등락하는 점을 고려하여 쌀 등의 미곡이나 포목으로 신공을 받아 그 차액을 얻는 것이 있었다. 곡물을 생선이나 소금으로 바꾸거나 과일과 채소, 약재 및 기타 생활 용구 등을 지방 시장을 통해 거래하는 경우도 있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조선시대 양반가의 농업 경영』, 김건태, 역사비평사, 2004.
편저
「사림세력의 성장기반」, 이수건, 국사편찬위원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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