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전기경제상업 활동과 백성의 경제 생활

16세기 농민들의 처지

또 백성들이 떠돌고 곤궁해짐을 보고도 관리들이 돌봐 주지 않고 관아에서 부리는 조례(皂隷)로 삼아 노역을 시키므로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논밭을 가지지 못하고, 논밭을 가진 자는 오직 대규모 상인이거나 양반일 뿐이니, 백성의 곤궁함이 어찌 지금 같은 때가 있었겠습니까. 조례(皂隷)수군(水軍) 뿐 아니라 각 고을의 관아에서 잡무에 종수하는 일수(日守)와 서원(書員)들도 노역을 하게 되면 모두 도망을 갑니다. 이는 대체로 수령이 그들을 소나 양처럼 부리므로 고통에 시달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밖에 작은 폐단들에 대해 어찌 모두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중종실록』권75, 28년 7월 14일(을묘)

사헌부가 아뢰기를, “근래에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공공연하게 노략질을 하며 양민을 학살합니다. 방자한 행동이 거리낌이 없는데도 주현(州縣)에서 금하지 못하고 병사(兵使)도 제대로 잡지 못합니다. 그들의 기세가 점점 뻗쳐 여러 곳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심지어는 서울에서도 나라를 어지럽히는 간사한 무리가 떼로 일어나 빈 집에 진을 치고 밤이면 모였다가 새벽이면 흩어집니다. 간혹 칼로 사람을 다치게 하는데도 포도대장이란 자가 도적을 잡았다는 말은 한 번도 듣지 못했으니 매우 한심합니다. 포도대장 등을 심문하여 죄를 다스린 후에 도적을 잡기 위한 대책을 각별히 계획하소서.” 하였다. 명종(明宗, 1534~1567, 재위 1545~1567)이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명종실록』권14, 8년 5월 22일(정묘)

나라에서 물건이나 세금을 거두는 공부(貢賦)의 제도를 만들 때 각 고을에서 산출되는 토산물(土産物)로 나누어 책정하여 스스로 해당 관청에 납부하게 하였으니, 그 본래의 뜻이야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해당 관청의 관리가 간사한 꾀를 부려 이익을 취하였으므로 공물을 바칠 때 물품의 중요한 정도와 좋고 나쁨은 따지지 않고 오직 화폐만을 중시하였는데, 그들의 뜻에 차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공물을 가지고 가도 끝내 일을 마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공물 하나를 바치려면 하리(下吏)들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열 곱절이 넘어야 바칠 수 있었다. 심한 경우는 아주 흔한 대추와 밤도 두어 되를 바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몇 필의 포(布)를 허비해야 했다. 이 때문에 각 고을에서는 마침내 토산물은 잊어버리고 곧장 민간에서 쌀과 베를 모아 실어다 바치게 되었다. 해당 관청의 하인들은 해당 읍의 공물이 오고 안 오는 것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고 자기들이 준비해 두었다가 바쳤다. 이렇게 한 후에는 그 읍에 독촉하는데,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뜻에 맞지 않으면 공물을 바친 문권(文券)을 내어 주지 않았다. 수령은 해유(解由)의 법을 두려워하고, 관리와 백성은 오고 가는 수고로움이 싫어서 스스로 납부하지 못했으면 어떠한 물건을 납부하도록 하는 것이 의례적인 규칙으로 자리 잡았다. 이것이 방납의 폐단인데, 간사한 무리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이익을 독점하는 여러 궁가(宮家)에서도 간혹 빼앗아 대신 납부하기도 하였다. 이럴 경우 백성에게 터무니없이 받아들이는 값이 아랫것들보다 곱절이나 되었다. 그러니 어렵게 살아남은 백성들이 어떻게 견디어 내겠는가? 지금의 폐단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이것이 더욱 심하므로 학식과 견문이 있는 이가 탄식하는 바이다.

선조실록』권149, 35년 4월 21일(임자)

且見百姓流移困弊之事, 官吏未嘗推恕, 以皀隷定役, 則擧族逃散. 百姓無有田地者, 其有田地者, 唯富商⋅大賈⋅士族之家而已. 百姓窮困, 安有如此時乎? 非但皂隷⋅水軍⋅各邑日守⋅書員, 定役則皆逃散. 蓋守令使之如牛羊, 迫於困苦而然耳. 此外細瑣之弊, 豈盡上達?

『中宗實錄』卷75, 28年 7月 14日(乙卯)

憲府啓曰: “近來盜賊蜂起, 公然刦掠, 戕殺良民. 恣行無忌, 而州縣不能禁, 兵使不能捕, 其勢滋蔓, 遍于諸處. 至於輦轂之下, 奸宄朋興, 屯聚空家, 夜聚曉散. 或有刃傷人物, 而爲捕盜將者, 未聞有捕一盜獲一賊, 至爲寒心. 捕盜大將等, 請推考治罪後, 捕盜之策, 各別規劃.” 答曰: “如啓.”

『明宗實錄』卷14, 8年 5月 22日(丁卯)

國制, 貢賦, 各以土産, 分定列邑, 使之自納於該司, 本意非不美也. 該司之吏, 以刁蹬爲利, 納貢之際, 不論物之輕重美惡, 唯貨幣是視, 苟不滿於其意, 則雖持美貢, 終不得售. 故貢一物, 則利歸於下吏者, 不啻十倍, 然後方得納焉. 甚者, 棗栗, 至賤果也, 而數升之納, 亦必費數疋之布. 由是列邑, 遂忘其所産之物, 直聚米布於民以輸之, 該司下人, 亦不問本邑貢物之來否, 自備而旣納, 則督迫於其邑, 少不如意, 輒不與納貢之文. 守令畏解由之法, 吏民憚往復之弊, 旣不得自納, 則一物之納, 例成濫觴之式. 此乃防納之弊, 奸細之徒, 有不足說, 而諸宮尃利之家, 或奪而代納之. 其濫徵於民, 則又倍於下流. 孑遺之民, 其何以堪之哉? 當今之弊非一, 而此尤甚焉, 有識痛歎之.

『宣祖實錄』卷149, 35年 4月 21日(壬子)

이 자료는 16세기 농민들의 곤한 사회 경제적 처지를 설명하는 자료이다. 첫 번째 자료는 농민들이 토지를 상실하고 부유한 상인이나 양반들에게 토지가 집중되는 상황을 설명하였다. 두 번째 자료는 공물 제도의 운영과 방납으로 인한 폐단을 설명하였고, 세 번째 자료는 이 같은 사회 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농민이 도적이 되어 각종 폐단을 일으키게 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16세기 조선은 사회 경제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의 바탕에는 농업 생산력의 향상이 있었다. 14세기 말 이후 수리(水利) 기술과 시비법(施肥法)이 개선되면서 몇 년에 한 번씩 쉬는 휴한지가 줄어들고, 대신 해를 거르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연작 농법이 실현된 결과였다. 이를 바탕으로 유통 경제가 발달하면서 시장이 늘어나고 대외 무역이 활발해졌다.

농업 생산력의 발달에 따른 시장 경제 확대로, 토지 제도를 비롯해 각종 부세 제도도 변화하였다. 먼저 토지 제도는 이전의 과전법(科田法) 체제가 폐지되고 지주제가 확대되었다. 그러면서 관인 지주층이 중심이 되어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였다. 권력을 배경으로 하는 농장에 파산한 농민들이 찾아와 몸을 의탁하는 일이 생겨났다. 아울러 농장 운영은 병작반수제(竝作半收制)로 진행되었다. 병작반수제란 수확의 반을 땅값 이용 대금으로 납부하는 운영 방식이었다. 이런 농장의 발달은 상당수 농민이 토지를 상실하는 원인이 되었고, 결국 소농민층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한편 공물 제도에서는 공물을 대신 납부하고 이자를 받는 방납(防納)이 광범위하게 시행되면서 농민의 부담이 가중되었다. 공물 제도는 지방의 특산물과 수공업품을 납부하는 제도였다. 각 관아에 배정된 공물 중에는 애초부터 생산되지 않는 공물도 있어 마련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다. 이 외에도 촉박한 납부 기한과 철 지난 물품의 요구 등으로 백성들의 고통이 심했다. 이러한 불합리한 공물 분배로 인하여 백성들은 부득이하게 방납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방납은 납부의 대가가 점차 커지면서 이익을 도모하는 방법으로 활용되어, 당대의 실권자들이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중앙 관리를 통해 수령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방납을 강요하였다. 수령은 책망을 피하려는 면책 수단으로, 중앙 관리는 권세가의 요청에 못 이겨서 이 요청을 들어 주었으므로 그 폐해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방납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그 주체도 확대되었고, 대상 공물도 다양해졌다.

군역의 부담 역시 증가하였다. 조선의 군역은 정병(正兵)으로 입역하는 경우와 그 정병에 대한 경제적 보상을 위해 포를 납부하는 보인(保人) 체제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정병으로 입역하는 대신, 보인에게서 받은 포를 이용해 사람을 사서 대신 입역하게 하는 대립(代立) 방식이 유행하였다. 이른바 방군수포(防軍收布) 방식이 확산된 것이다. 이 같은 대립 방식은 15세기인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 대에 수군에서 시행된 적이 있었는데, 16세기에는 모든 병종에 적용되었다. 대립은 농민들 스스로가 희망하여 시행된 측면도 있었다. 입역이 가혹해지고 생업인 농업에 지장을 주면서, 직접 입역하지 않고 입역에 따른 각종 부담 등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면서 대립가(代立價)가 폭등하자 군역은 이제 양민층을 상대로 자행되는 수탈로 변하고 말았다. 대립가로 몇 배를 요구하는 경우들도 있었고, 높은 대립가를 감당하지 못한 농민들이 결국 도산하면서, 부족분을 이웃에게 징수하는 인징(隣徵)이나 친척에게 걷는 족징(族徵) 등이 행해지게 되었다. 농민의 입장에서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결국 이 같이 백성들이 부담해야 할 세금이 턱없이 늘어나면서 조선 사회는 동요하게 되었다. 도산하는 백성이 증가하면서 일부 백성은 승려가 되었으며, 또 일부 백성은 서로 모여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연산군 대의 홍길동(洪吉同)이나 명종 대 임꺽정(?~1562)과 같은 도적떼가 출현한 것도 모두 이러한 사회 문제 때문이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16⋅17세기 공납제 개혁의 방향」,『한국사론』12,고석규,서울대학교 국사학과,1985.
「조선초기의 공물대납제」,『사학연구』22,김진봉,한국사학회,1973.
「조선초기의 수군」,『조선초기 사회구조연구』,이재룡,일조각,1984.
「공납⋅요역제의 붕괴와 대동법」,『이조공납제의 연구』,전천효삼(田川孝三),동양문고,1964.
편저
「상품의 유통과 공납제의 모순」, 고석규, 국사편찬위원회, 1996.
「군역제도의 붕괴」, 김종수, 국사편찬위원회, 1996.
「군역의 변질과 납포제 실시」, 이태진, 육군본부, 1968.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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