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전기사회신분 제도의 정비

양반의 성립 과정-사재소감 박강전

박강(朴强)은 영해부(寧海府) 출신으로 대대로 영해부의 아전 노릇을 해 왔다. 영해는 곧 옛적의 덕원도호부(德原都護府)였는데 동여진(東女眞)이 들어와 침략할 때 성이 함락되었기에 격을 낮추어 지관(知官)으로 만들고, 관할하던 보성(甫城)은 복주(福州)에 귀속시키게 되어, 온 읍(邑)이 이를 수치로 여겼지만 도로 찾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박강의 증조인 박성절(朴成節)이 마침내 상계리(上計吏)가 되어 서울에 가서 드디어 도당(都堂)에 진정하였는데, 임금에게 보고되어 예주목(禮州牧)으로 올리고, 다시 보성을 복귀시키고 주목(州牧)의 인(印)을 주조하여 내려 보냈다. 지금 쓰고 있는 것이 곧 그 도장이다.

주(州)의 인사로서 조정에 올라가서 벼슬하는 사람이나 시골에 있는 사람이나 모두 박성절에게 공적을 돌려 그에게 아전의 역(聽)에 대한 면제를 허락하였다. 박성절은 말하기를, “나는 지금 늙었으니 비록 나의 복무를 면제한다 할지라도 다시 양반 노릇은 못할 것이니, 나의 자손이나 면제하여 주십시오. ” 하였다. 여러 사람이 모두, “그러시오. ” 하고 증명을 써서 주었다. 이에 그의 아들인 박학여(朴學如)와 손자인 박천부(朴天富)는 모두 고을에서 아전 노릇을 하지 않았다.

박천부는 곧 박강의 아버지다. 현릉(玄陵)이 임금이 되기 전에 북경에 있었는데, 박천부가 그 밑에 따라다녔다. 박천부는 힘이 세어 한쪽 팔로 현릉을 번쩍 들고 한 바퀴 돌며 고함을 치곤 했으므로, 현릉이 즐거워하며 그를 좋아하였다. 명릉(明陵)이 죽고 황제가 현릉을 임금으로 세우기를 명하여 임금의 행차가 떠나려 하는데, 본국(고려)의 환자(宦者)인 용봉(龍鳳)이 황제의 사랑을 받았는데 황제에게 말하여 참람되게 충정왕(忠定)으로 갈아 세우니, 그때에 현릉을 따르던 자들이 모두 새 임금에게로 달라붙고 오직 박천부만이 들어와서 뵈었다.

현릉은 비장히 이르기를, “오직 너만이 아직 내 곁에 있구나. 나라고 어찌 본국으로 돌아갈 날이 없겠느냐. 너도 꼭 머물러 있다가 나와 함께 가자. 내가 만일 돌아가게 될 때에는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지금 상도(上都)에 있으려 하는데 네가 나를 따라가겠느냐” 하니, 박천부가 꿇어앉아 말하기를, “신은 다만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받들고 가는데 때로는 등에 업고 가기까지 하였다. 뒤에 현릉이 미처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중국에서 바다를 건너오다가 배가 침몰하여 죽었다.

지정(至正) 신축년(공민왕 10, 1361)에 홍건적이 경성을 함락하고 현릉이 안동(安東)에 행차하여 군대를 보내어 수복할 때에 박강이 처음으로 군에 응모하여 총병관(摠兵官)인 정세운(鄭世雲)을 따랐다. 전투가 시작되려 할 때에 적이 성중에서 목채[寨]를 쌓아 올리어 항전하므로 모든 군대가 전진할 수가 없게 되었다. 박강이 곧 말에서 내려 어떤 집에 들어가서 판자로 만든 대문짝을 얻어 가지고 메고 나와서 사다리를 만들어서 올라가며 칼을 뽑아 크게 고함을 치니, 목채 위에 올라 있던 적들이 모두 무서워 땅에 떨어져서 저희끼리 서로 짓밟혔다. 박강이 따라 내려가서 수십 명을 마구 베니 여러 군대가 계속 전진하여 문을 열고 들어가서 적의 괴수인 사류(沙劉)를 베었다. 이로 말미암아 싸움을 크게 이기자 총병관이 이를 장렬히 여겨 계급을 특진시켜 상을 주고 중랑(中郞)으로 추천하기 위하여 명부에 올려 두었었는데, 바로 세 원수(元帥)1)가 총병관을 죽였다. 이로 인하여 진급시키려던 대로 되지 못하고 마침내 산원(散員)에 임명되었다.

계묘년(공민왕 12, 1363)에 원수인 박춘(朴椿)을 따라 이성(泥城)에 가서 두 번이나 강을 건너서 정탐하였는데 그 공로로 별장에 임명되었다. 이때에 반란을 일으킨 신하인 최유(崔濡)가 왕실의 서자(庶子)로서 일찍 중이 됐던 자를 세워서 임금으로 삼아 변경을 침입하여 수주(隨州)를 함락하였다. 여러 장군이 항전하여 물리쳤는데 박강이 선봉이 되어 그들을 추격하여 압록강까지 갔다가 돌아와서 또 낭장에 승진되었다. 을사년(공민왕 14, 1365)에, 임금은 박강이 용력이 있다는 말을 듣고 또한 그의 아버지가 자기를 업으며 이끌고 다니던 공로를 생각하여 그를 불러 보고 시위한 군사로서 힘이 센 자와 씨름을 부쳐 보았더니 군사들이 모조리 넘어졌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국고의 쌀을 내리고 바로 중랑장에 임명하여 임금을 시위하는 부대에 소속시켰다.

정미년(공민왕 16, 1367)에 왜적이 서강(西江)을 침범하여 나진(羅進) 등을 보내어 바다에 나아가 추격하여 잡기를 명하고, 강도 함께 가게 하면서 철갑(鐵甲)과 활과 칼을 주었는데, 왜를 만나 여러 번 이겼다.

홍무(洪武) 신해년(공민왕 20, 1371) 겨울에, 원수인 이희필(李希泌)을 도와 울라산(鬱羅山)에 가서 공격할 때에도 임금은 또 말을 주어 보냈다. 성을 공격하여 먼저 올라가서 그 괴수를 잡았다. 그리고 돌아와서 또 사재소감(司宰少監)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옮겨서 예의총랑(禮儀摠郞)에 이르렀다. 그 뒤에 시골에 은퇴하여 있다가 병인년(우왕 12, 1386)에 나라에서 원수 육려(陸麗)를 보내어 영해(寧海)에 주둔할 때에 강은 또 따라가서 경주 송라촌(松蘿村)에서 왜적과 싸웠는데 칼을 휘둘러 5~6명의 목을 베니 육공(陸公)이 조정에 보고하여 중현대부(中顯大夫)의 관계로 서운정(書雲正)의 벼슬에 올려 주었다.

무진년(우왕 14, 1388) 10월 축산도 병선 도관령(丑山島兵船都管領)이 되었는데 왜적의 배가 갑자기 들이닥쳐 우리의 배를 포위하고 영해성(寧海城)을 침범하려 하는데,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어서 인심이 흉흉하였다. 박강이 한 번 활을 쏘아 적의 괴수를 맞히고 잇달아 4~5명을 쏘아 맞히니, 적은 그만 포위를 풀고 달아나서 다시 오지 않아 온 고을이 지금까지 편히 잠잘 수 있는 것도 박강의 힘이었다.

기사년(공양왕 1, 1389) 겨울에, 내가 영해에 귀양 가서 비로소 강을 알았는다. 날마다 나를 찾아왔는데 예가 공손하고 말이 적었으며, 글을 약간 알아 나의 강설(講說)을 재미있게 들으며 가지 아니하였다. 나는 그가 근신하며 순후한 사람으로 여겨 중시하였지만 그에게 그런 특이한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다. 과거에 판사를 지낸 백공(白公) 진(瑨)이 또한 이 고을에 살았는데, 젊어서 백당(柏堂)에 벼슬하여 일찍 총병관의 참좌(參佐)가 되어 문서를 맡아 보면서 강을 데리고 함께 다니며 직접 판자 대문짝을 메고 목채를 점령하던 분이었다. 상세히 나에게 이야기하여 주었기 때문에 박강이 힘이 세고 용맹하며 또한 공로가 있으면서도 자랑하지 않는 사람인 줄을 알았으니 더욱 더 중히 여기게 되었다. 이때 박강의 나이가 벌써 59세였는데도 힘이 조금도 줄지 아니하였다. 몸이 크고 기걸하며 수염이 길었다. 천성적으로 술을 마시지 못하는데, 시골 사람이 농담으로 말하기를, “그 외모를 보아서는 두어 말이라도 마실 수 있을 듯한데 그 입으로는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대개 건장하고 힘이 센 사람은 술주정이 많은 법인데, 강이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또 가상한 일이다.

아, 신축년 난리에 능히 먼저 올라가서 도성을 회복하였고, 계묘년 전쟁에는 선봉이 되어 반역을 무찔렀으니 그 공적이 얼마나 컸는가. 전쟁이 일어난 이후로 충의를 가진 용사가 위급함을 당하여 목숨을 바치고, 팔을 걷어붙이고 먼저 소리치며 칼날을 무릅쓰고 강한 적을 꺾어서 용맹을 얻어 적을 막아 내어 훌륭한 공적을 세웠으나, 위에서 추천하여 발탁해 주는 사람이 없고 아래로는 그것을 기록하여 주는 친구가 없으니 운수가 나빠서 공신에 오르지도 못하고, 사적이 없어져서 전하지도 못하여, 마침내 시골에서 죽어 버리어 초목과 함께 썩고 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것은 가엾은 일이다. 그러므로 박강에 대하여 전기를 쓴다.

『양촌집』권21 「전류」 사재소감박강전

1)고려 말기 중국에서 침략해 온 홍건적을 몰아낸 안우(安禑)⋅김득배(金得培)⋅이방실(李芳實) 등 세 사람이다. 그들은 총대장인 정세운(鄭世雲)을 죽여 그 죄로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朴強, 寧海府人也, 世爲本府吏. 寧海卽古德源都護府, 東女眞入寇城陷, 降爲知官, 以所管甫城, 歸于福州, 擧邑恥之, 莫得申理. 時強之曾祖成節, 適爲上計吏如京, 遂訴于都堂, 聞于內, 陞爲禮州牧, 復還甫城, 鑄州牧印以賜. 至今所用, 卽其印也. 州之人士, 仕于朝者, 及居鄕者, 皆歸功于成節, 聽其免役, 成節曰, 吾今老矣, 雖免吾役, 不復能爲士矣, 請免吾子孫. 衆皆曰然, 署牌以給. 故其子學如及其孫天富, 皆不役于鄕.

天富卽強之父也. 玄陵潛邸, 在燕都, 天富實從之. 天富有力, 能以一臂, 擔玄陵, 周麾而呼. 玄陵樂而愛之. 及明陵薨, 帝命玄陵爲王, 車駕將啓行, 本國官者, 龍鳳有寵, 白于帝, 替立忠定, 其從玄陵者, 皆附新君, 獨天富入見. 玄陵悵然曰, 惟爾尙獨在耶, 雖孤豈無歸國之日. 爾留當與我偕行. 孤若得返, 不敢忘. 孤今欲往上都, 爾能從我耶. 天富跪曰, 臣惟命矣, 遂奉以往, 或時背負而行. 後未及繼統之日, 先自燕浮海而來, 舡敗而死,

至正辛丑, 紅賊陷京城, 玄陵幸安東, 遣軍收復, 強始應募, 從揔兵官鄭世雲. 及將戰, 賊於城中, 築寨拒守, 諸軍不得進. 強乃下馬, 入一屋, 得板扉, 擔以進, 爲梯而上, 拔劒大呼, 賊登寨者, 皆懼而墮, 自相蹂躝. 強隨而下, 亂斫數十級, 諸軍繼進, 開門入斬賊魁沙劉, 由是大捷, 揔兵官壯之, 欲超資以賞, 擬以中郞, 置薄而記, 旣而三元帥殺揔兵官. 由是不得如所擬, 乃拜散貟.

歲癸卯, 從元帥朴椿, 赴泥城, 二渡江偵伺. 以勞除別將. 于時叛臣崔濡, 立支庶甞爲僧者爲王, 侵彊陷隨州. 諸將拒却, 強爲先鋒, 追奔至鴨綠江而還, 又陞郞將. 乙巳, 上聞強勇力, 且念其父負曵之勞, 召見之, 令衛士有力者相抵, 衛士連趺. 上大悅, 賜廩米, 俄授中郞將, 命充宿衛.

丁未, 倭犯西江, 遣羅進等, 泛海追捕, 與強俱,上賜鐵甲弓劒, 遇倭屢捷.

洪武辛亥冬, 佐元帥李希泌, 往攻欝羅山, 上又賜馬以遣. 攻城先登, 獲其渠帥. 旣還, 拜司宰少監, 累遷禮儀揔郞. 厥後退于鄕, 丙寅, 國家遣元帥陸麗鎭寧海, 強又從之, 與倭戰於雞林松羅村, 奮劒斬五六級, 陸公申報于朝, 加中顯書雲正.

戊辰十月, 爲丑山島兵船都管領, 倭艦奄至, 圍我船, 將侵寧海城, 彼衆我寡, 人心洶懼. 強一箭射中賊魁, 連中四五級, 賊卽解圍去, 不敢復來, 一郡迄今奠枕, 強之力也.

己巳冬, 予謫寧海, 始知強. 日來謁予, 禮恭言寡, 粗知書, 聞予講說, 亹亹樂聽, 不能去. 予以爲謹厚者而重之, 未甞知有異能也, 前判事白公瑨, 亦居是邑, 少仕栢堂, 甞爲揔兵官參佐, 掌文簿, 引強與俱, 親自擔扉拔寨者也. 具爲予語之, 然後知強勇且有功而不伐, 益可重也. 時強年已五十九, 膂力不小衰. 軀幹魁奇, 鬚髥輒張. 性不能飮酒, 鄕人戱曰, 觀其貌, 若可飮數斗, 而其口不能吸一滴. 大抵壯有力者, 多使酒, 強不飮, 又可尙也.

嗚呼, 辛丑之難, 能先登, 克復都城, 癸卯之役, 爲先鋒, 糾逖王慝, 其功, 不旣大矣乎. 自兵興來, 忠義之士, 見危授命, 奮臂先呼, 冒白刃摧堅鋒, 得雋制敵, 以立異効, 上無薦拔之知, 下無紀述之友, 數奇不俟, 事泯不傳, 卒死閭巷, 草木同腐, 幾何人哉. 是可哀也已. 故於強爲立傳云.

『陽村集』卷21 「傳類」 司宰少監朴強傳

이 사료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이름을 떨친 권근(權近, 1352~1409)이 박강(朴强)이란 인물에 대해 기록한 글이다. 권근은 1389년(창왕 1년) 첨서밀직사사로서 문하평리 윤승순(尹承順)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명나라 예부자문(禮部咨文)을 도평의사사에 올리기 전 미리 본 죄로 우봉(牛峯)⋅영해(寧海)⋅흥해(興海) 등지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그때 영해에서 만난 박강이란 인물에 대한 일종의 전기문으로, 나라의 존망을 지키고자 신명을 다 바친 한 노장(老將)의 일생이다. 박강의 조상은 향리였으며 자신도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하는 데 군공(軍功)을 세워 관직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사항은 박강이란 인물의 됨됨이다. 박강은 군공을 세워 관직에 진출하였지만 당시 석학이던 권근과 교류가 가능하였다. 이는 훗날 조선 시대를 주도하는 세력이 박강과 같은 신흥 세력이었지만, 이들을 단순히 군공 같은 것에 의존하지 않고 학문적 소양도 있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려 말의 신흥 세력들은 왜구의 출몰과 홍건적의 침입 등 전란을 통해 그 공을 인정받아 관직을 부여 받고는 있었으나, 단순히 무인으로서의 자질보다는 문인으로서의 자질도 겸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이 건국 후 박강과 같은 인물이 양반 계층으로 재편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위의 사료는 조선 초기 신흥 세력들이 양반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는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살피는 데 하나의 사례가 되는 중요한 기록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조선의 사회와 사상』(개정증보판), 이성무, 일조각, 2004.
『조선전기사회사상연구』, 한영우, 지식산업사, 1983.
『조선시대 신분사연구』, 한영우, 집문당, 1997.
편저
『국왕,의례,정치』, 이태진 외, 태학사, 2009.
『조선신분사연구; 신분과 그 이동』, 이화여자대학교, 법문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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