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전기사회신분 제도의 정비

양인과 천인을 구분하는 법규

의정부에서 노비와 호구(戶口)에 관한 법을 아뢰었다.

1. 우리나라에서 공노비사노비를 부리는 법은 모두 고려 왕조의 옛 전적(典籍)을 그대로 따랐는데,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진위(眞僞)가 뒤섞여서 쟁송이 날로 치열하고 번잡해졌습니다. 이제 교지를 받으니 나라 안의 쟁송은 날짜를 정해 놓고 해결하라 하셨습니다. 바라옵건대, 담당 관원에게 올해 10월 초하루부터 시작하여 공사(公私)의 천적(賤籍)과 각각 거주하는 지역을 도성의 각부와 지방 각 관아는 화명(花名)으로 보고토록 하고, 아울러 모두 관아에 제출하여 확실하게 대조한 다음에 새로 호적을 만들어 나누어 주고, 옛 호적은 하나같이 모조리 불태우도록 하소서. 만일 공처노비(公處奴婢), 타인노비(他人奴婢)양인 자녀(良人子女)를 아울러 기록하여 관아에 바치게 하여 불법적으로 만든 호적을 받은 자나 옛 호적을 숨기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에게 고발하도록 허락하여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1)로 논죄(論罪)하고, 역사노비(役事奴婢)를 아울러 조사하여 절반은 고발한 자에게 상으로 주고, 나머지 반은 관에 귀속시키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1. 지난번에 내리신 교지에서 양천(良賤)이 서로 소송하는 데 문서를 찾지 못한 경우에는 아울러 분변하여 해결하라 하셨습니다. 신들이 의논한 결과, 양천이 서로 소송함에 있어 문서를 비록 발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장부를 바친 것이 명백하고 3촌이나 4촌에 양인 친척이 남아 있고 천적(賤籍)이 분명하지 않은 자는 양인으로 삼도록 판결하고, 비록 장부를 바쳤다 하더라도 양인 친척이 나타나지 않고 천적이 분명하지 않은 자는 사재감(司宰監)에 귀속시키고, 천적이 명백하고 사역한 지가 이미 오래된 자는 천인으로 삼도록 판결함이 어떠하겠습니까?

1. 교지를 받들어 담당부사에 하달하여 양측 피고(被告)가 갖추어진 것은 판결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담당 부서의 관원들이 네 차례나 기한을 넘겨 오늘에 이르렀는 데도 여전히 판결하지 못한 자가 있으니, 그 교지를 따르지 아니한 죄는 진실로 통렬히 응징하여야 마땅합니다. 사헌부로 하여금 담당 부서에 아직 판결을 끝마치지 못한 사유를 살피도록 하여, 방장(房掌)⋅행수(行首)부터 교서를 어긴 형률로 논죄하게 하소서.

1. 판결한 뒤에도 노비를 그대로 부리고 있는 자는 형조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여 3품 이상은 그 아들이나 사위를 가두고, 4품 이하는 바로 당사자를 가두어 교지를 따르지 않은 형률로 논죄하소서. 또 기한이 지났는데 일을 다시 올리는 자가 있으면 이달 15일부터 시작하여 또한 주무 담당 관리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또 아뢰었다.

“삼가 『경제호전(經濟戶典)』을 살펴보니, 최근에 이르러 호구의 법이 분명하지 않아 역(役)을 부과함이 고르지 못하고 양인천민이 뒤섞여 그 폐단이 적지 아니합니다. 지금부터는 서울과 지방의 관아에서 성적(成籍)을 살펴 호수인(戶首人), 부부(夫妻)의 내외 4조(內外四祖)와 함께 사는 자손과 제질(弟姪)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기록하게 하소서. 바라건대, 각 도의 관리들로 하여금 금년 7월 15일부터 시작하여 양반인리(人吏)⋅백성⋅각색인(各色人)의 세계(世系)를 자세히 파악하여 성적(成籍)을 작성하게 하여, 한 부는 호조에 바치고, 한 부는 각 감사영(監司營) 문서고에 비치하고, 한 부는 해당 고을에 비치하며, 서울 한성부에서는 내년 7월 15일부터 시작하여 그 본관을 파악하여 보고하는 일을 또한 위 항목의 예대로 하여 성적(成籍)을 확실하게 살피도록 하소서. 만약 8조(八祖) 모두 싣기를 스스로 원하는 자가 있으면 들어 주고, 단지 혹은 조부나 혹은 부친만을 기록하고자 하는 자도 역시 들어 주소서” 임금께서 모두 그대로 따랐다.

태종실록』권27, 14년 4월 2일(을사)

1)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 : 중국 명나라 법전인 『대명률(大明律)』에서 제서(制書, 왕의 조칙)를 받들어 시행하는데 위반하는 자는 장 100에 처하고 왕의 뜻을 잘못 깨달은 자는 3등을 감한다는 규정을 말한다.

議政府啓奴婢及戶口法.

一, 國朝公私奴婢役使之法, 皆仍前朝舊籍, 歲月旣久, 眞僞相混, 爭訟日繁. 今蒙敎旨, 中外相訟, 刻日決絶. 乞令主掌官 以今年十月初一日爲始, 公私賤籍及各其所居京中各部, 外方各官花名呈報, 竝皆納官, 推考覈實, 改成分給, 舊籍一皆燒毁. 如有公處奴婢, 他人奴婢及良人子女, 幷錄納官, 冒受成籍者及舊籍隱藏者, 許人陳告, 照依制書, 有違律論罪. 役使奴婢, 竝皆推考, 一半告者充賞, 一半屬公, 何如.

一, 前者下旨, 良賤相訟文書未覓者, 竝令分辨決絶事, 臣等議得, 良賤相訟, 文書雖未覓出, 納簿明白, 三四寸良族現存, 賤籍不明者, 從良決絶. 雖有納簿, 良族不現, 賤籍不明者, 屬司宰監, 賤籍明白, 役使已久者, 從賤決絶, 何如.

一, 奉敎行移各司, 分決兩隻俱備事, 各司員四經限朔, 以至今日, 尙不畢決者有之, 其不從敎旨之罪, 誠宜痛懲. 許令憲司考其各司未畢決辭由, 房掌行首, 以制書有違律論罪.

一, 決後奴婢仍執者, 令刑曹推考, 三品以上囚其子壻, 四品以下直囚當身, 以敎旨不從論罪. 又有以限朔後事新呈者, 以今月十五日爲始, 亦令主掌官聽理, 何如.

又啓,

謹按經濟戶典, 近年以來, 戶口之法不明, 差役不均, 良賤混淆, 其弊不小. 今後京外官推考成籍, 戶首人夫妻內外四祖及率居子孫弟姪, 以至奴婢年歲備載. 乞令各道各官 以今年七月十五日爲始, 兩班人吏百姓各色人世系, 備細推考, 分揀成籍, 一件納于戶曹, 一件置于監司營庫, 一件置于其官, 京中漢城府 以明年七月十五日爲始, 考其本貫呈報, 亦以上項例, 覈實成籍. 如有自願八祖具載者聽, 止錄或祖或父者亦聽. 皆從之.

『太宗實錄』卷27, 14年 4月 2일(乙巳)

이 사료는 1414년(태종 14년) 노비와 호구(戶口) 법규를 제정하기 위해 의정부에서 논의한 사항을 기록한 것이다. 양인천인의 구분은 새 왕조의 지배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꼭 필요한 1차적인 과제였다. 그러나 이는 고려 말의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 설치 이후 계속 제기된 문제로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도 쉽사리 해결되지 못하였다. 관인층 사이에서도 노비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높았기 때문이다.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은 국가 통치 체제를 확립하는 데에 주력하면서 시한을 정해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즉, 그는 강력한 중앙 집권적 관료 체제 확립을 추구하면서, 그 일환으로 국역(國役) 대상인 양인 계층의 폭을 넓히려 하였다. 이 법규는 태종의 명에 따라 의정부가 최종 상의하여 올린 것으로, 가능하면 양인을 많이 확보하려는 방향에서 천적(賤籍)을 새로 정리, 작성하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정하고 있다.

조선 사회는 신분을 양인천민으로 구분하는 양천 제도를 법제화 하였다. 양인과거에 응시하고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자유민으로, 대신 조세⋅군역 등의 의무를 부담하였다. 천민은 비자유민으로 개인이나 국가에 예속되어 천역(賤役)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천제의 원칙에만 입각하여 신분 제도가 운영되지는 않아서, 관직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던 양반(兩班)은 세월이 지나면서 하나의 특권 신분으로 굳어졌고, 양반 관료를 보좌하던 중인도 하나의 독립된 신분층으로 정착되었다. 이리하여 지배층인 양반과 피지배층인 상민 간의 차별을 두는 반상(班常) 제도가 일반화되고, 양반중인상민천민의 4계층으로 구분하는 신분 제도가 점차 고착화되어 갔다.

한편, 조선 정부는 부담을 기준으로 양인천인 신분을 법으로 정하여 천인 이외의 사람들에게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였다. 기본적으로 양인은 자유인이며 공민(公民)으로서 국가에 군역요역 그리고 공부(貢賦)를 부담하는 의무를 지는 대신 과거에 응시해서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지만, 천인은 비자유인으로서 각종 제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재산으로 취급되면서 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했고, 벼슬길도 원천적으로 막혀 있었다.

조선 사회에서 노비는 사회 경제적 조직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계급적 질서를 유지하고 예속(禮俗)을 진작시키는 데 필수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노비공노비사노비로 구분되었는데, 공노비는 왕실과 관아에 예속된 국가의 소유물이었고, 사노비는 개인의 소유물로 상속도 가능하였다.

첫 번째 사료에서는 공노비사노비의 숫자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호구 조사를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당시 노비가 국가와 개인의 재산으로 간주됐기 때문에 노비에 대한 철저한 관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호적을 폐기하고 공노비사노비의 새로운 호적을 각각 거주하는 곳에 따라 철저히 조사한 후에 호적 대장을 호조와 감사영(監司營)의 문서고, 고을에 각각 1부씩 비치하여 관리하도록 하였다.

위의 사료를 통해 조선 초기 신분 제도의 형성 배경을 알 수 있다. 즉, 조선 초기의 신분 제도는 한편으로는 고려 말⋅조선 초에 걸쳐 이루어진 사회⋅경제적 변화와 성리학적 신분 관념을 기반으로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층인 양반의 배타적⋅신분적 우위를 확보한 산물임을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지배 신분의 이원화와 함께 국역을 부담할 양인층의 확대 및 노비 신분을 시급하게 확정해야 하는 조치가 시행되었던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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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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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노비 연구』, 김용만, 집문당,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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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회사연구』, 송준호, 일조각, 1987.
『조선초기 신분제 연구』, 유승원, 을유문화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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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양반 사회와 노비』, 전형택, 문현, 2010.
『조선초기 노비신분연구』, 지승종, 일조각, 1995.
『조선전기 사회경제연구』, 한영우, 을유문화사, 1983.
『조선시대 신분사 연구』, 한영우, 집문당, 1997.
편저
「지방상업」, 유원동, 국사편찬위원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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