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전기사회신분 제도의 정비

서얼 금고법에 대한 비판

서얼(庶孼) 자손에게 과거와 벼슬을 못하게 한 것은 우리나라의 옛 법이 아니다.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살피건대, 1415년(명나라 영락 13)에 중국 명나라의 우대언(右代言) 서선(徐選) 등이 서얼 자손에게는 높은 벼슬을 주지 말아서 그것으로 적서(嫡庶)를 구별하자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건대 1415년 이전에는 현직(顯職)도 주었는데, 그 이후로는 과거를 문무 양반에게만 허가하였다. 이후 『경국대전』을 편찬한 뒤부터 비로소 벼슬길을 막았으니, 지금까지 100년이 채 못 된다. 세상 천지에 땅에 자리 잡고 나라라고 이름한 것이 어찌 일백 개 정도만 되겠는가마는, 벼슬길을 막는 법이 있다는 것을 아직 듣지 못하였다. 하물며 향리(鄕吏)수군(水軍) 등의 천인과거를 보러 가서 조상의 계보를 말해도 애당초 근거로 삼을 만한 본관(本貫)도 없을 것이고, 혹은 유민(流民)에게 시집가고 혹은 도망한 사람에게 장가들기도 하였으니, 누가 능히 그 양민천인을 가릴 수 있겠는가. 경대부(卿大夫)의 아들이지만, 오직 외가가 하찮아서 대대로 벼슬길이 막혀, 비록 뛰어난 재주와 쓸 만한 그릇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끝내 남에게 머리를 숙이고 들창 밑에서 죽어 향리수군만도 못하니 불쌍하도다.

『패관잡기』권2

庶孼子孫, 不許科擧仕路, 非三韓舊法也. 按經濟六典, 永樂十三年, 右代言徐選等陳言, 庶孼子孫, 勿敍顯職, 以別嫡庶之分. 以此觀之, 永樂十三年以前, 則顯職亦敍, 以後則只許科擧正班而已. 自撰定大典之後, 始加禁痼, 至今未百年矣. 覆載之內, 九州之外, 據土地而以國名者, 奚啻百數, 而未聞有禁痼之法. 況鄕吏水軍役之至賤, 而猶赴科擧, 語其內外世系, 則初無本貫可據, 或嫁流民, 或娶逃人, 誰能辨其良賤哉. 以卿大夫之子只無外家, 而世世禁痼, 雖出衆之才適用之器, 終屈首死牖下, 曾鄕吏水軍之不若, 可憐哉.

『稗官雜記』卷2

이 사료는 서얼(庶孼)의 차별 대우를 비판한 자료로,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에 수록되어 있다. 어숙권은 서얼 출신으로 중국어에 뛰어나 사신을 수행하여 중국에 다녀오기도 하였고, 『고사촬요』와 『패관잡기』 등의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서얼사족의 혈통을 받았으면서도 어머니가 정실 처가 아니라 첩이었기 때문에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게 된 존재였다. 서(庶)는 양인 첩의 자손을, 얼(孽)은 천민 첩의 자손을 뜻하는 말이었다. 서얼에 대한 차별 대우가 관념적으로나 법제적으로 강화된 것은 조선 전기 태종(太宗, 1367~1422, 재위 1400~1418) 대 이후였다. 조선 전기에 처와 첩 사이에 엄격한 구분이 제도화되면서 그 자식들도 구분할 필요가 생기면서 서얼에 대한 차별이 제도화된 것이었다.

서얼에 대한 차별은 품계와 관직 진출의 제한에서 시작되었다. 태종 대에 천민 첩의 자손부터 적용되기 시작하다가, 이후 『경국대전』이 편찬되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양민 첩의 자손에게까지 적용되었다. 서얼은 제한된 품계의 범위 안에서 관직에 나갈 수 있었는데, 문⋅무관2품 이상의 양첩 자손은 정3품 당하관, 천첩의 자손은 정5품까지 서용(敍用)하였으며, 3품 이하 6품 이상 관리의 양첩 자손은 정4품, 천첩의 자손은 정6품까지 서용하였다. 7품 이하의 관리에서 관직이 없는 사족에 이르기까지는 양첩의 자손은 정5품, 천첩의 자손은 정7품까지 서용하였다. 아울러 서얼은 현직(顯職)의 임용도 제한하였다. 현직은 현관(顯官)이라고도 하는데, 대체로 청요직(淸要職)과 같은 주요 관직을 뜻한다. 현직에 있는 사람의 자손 가운데 한 명은 과거 시험을 치르지 않고 관료가 되는 음서(蔭敍)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는데, 서얼은 현직에 진출하는 것이 금지되어 그러한 특권을 누릴 수 없었다.

서얼과 그 자손이 양반 관료가 되는 길을 막기 위하여 그 출발인 과거 제도에 응시하는 것도 금지하였다. 조선 전기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의 특허로 유자광(柳子光, 1439~1512) 등 일부 서얼이 문⋅무과를 거쳐 관인이 된 적이 있기는 하였으나, 『경국대전』에서는 이를 금지시켰다. 즉 서얼과 그 자손이 생원⋅진사시와 문⋅무과에 응시하는 것을 불허하는 규정이 『경국대전』에 명시된 것이다. 얼마 후 『경국대전』에 주석(註釋)을 추가하면서 서얼 자손 부분을 ‘서얼 자자손손(庶孽子子孫孫)’으로 확대시켜 서얼의 자손들이 대대로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영원히 금지하였다. 서얼에 대한 이 같은 관직 진출이나 과거 응시에 대한 제한은 적서의 구분을 엄격히 하려는 풍조 하에서 취해진 조치였다.

한편 서얼은 문⋅무과에 응시하고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 제한되었지만 기술관으로의 진출은 가능하였다. 이것도 2품 이상 고위 관료 자손들에게만 허용되는 제한이 있기는 하였다. 『경국대전』에서는 2품 이상 관리의 첩 자손의 경우에는 각각의 재능에 따라 사역원⋅관상감⋅전의감⋅내수사⋅혜민서도화서⋅산학⋅율학 등의 기술관직에 임용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는 서얼의 증손과 현손(玄孫)에게도 적용되었다.

결국 서얼은 조선 전기 신분제의 재편성에 따라 지배 신분층이 양분화되는 과정에서 하급 지배 신분층으로 격하된 존재였다. 상급 지배 신분층인 사족의 자손이기는 하였으나, 어머니가 양첩 또는 천첩이라는 이유로 천시되어 차별 대우를 받게 됨으로써 상급 지배 신분층인 사족 신분층에 들지 못하였던 것이다.

16세기 이후 서얼에 대한 차별 대우를 개선하려는 노력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비롯해 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이이(李珥, 1536~1584)조헌(趙憲, 1544~1592) 등이 이 문제의 심각성을 거론하면서 그 대책을 내놓았다. 예컨태 이이는 국가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군량미 혹은 구휼미 등을 납속(納贖)서얼에게는 과거에 응시할 기회를 허가하자고 하였다. 조헌은 명나라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예를 언급하며 서얼을 비롯해 어머니가 새로 결혼한 자녀의 자손에게까지도 관직 진출을 허용하자고 하였다. 서얼의 차별을 해소하려는 이러한 노력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이나 최석정(崔錫鼎, 1646~1715) 등도 서얼 차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였다. 서얼 자신들도 선조 대 이후에는 여러 명이 모여 연명 상소를 올리면서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전기 서얼의 사회적 지위」,『사학연구』30,박천규,한국사학회,1980.
「조선전기 처첩 분간과 서얼」,『대구사학』41,배재홍,대구사학회,1991.
「서얼차대고」,『역사학보』27,이태진,역사학회,1965.
「조선 초기 서얼의 차대와 신분」,『역사학보』204,최이돈,역사학회,2009.
편저
「중인」, 신해순, 국사편찬위원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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