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법(禮法)은 본국의 풍속을 따라야 합니다. 대체로 신이 듣건대 서하(西夏)는 그 나라의 예의범절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백 년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원호(元昊)
도 또한 매번 수도인 상경(上京)의 풍속을 생각하며 언제나 잊지 않았습니다. 요(遼)나라에는 남부(南府)⋅북부(北府)가 있었고, 원(元)나라에는 몽관(蒙官)⋅한관(漢官)이 있었습니다. 원나라 사람은 그 근본을 중히 여겼기 때문에, 비록 중원(中原)을 잃었어도 고비 사막 이북의 본토는 옛날과 같았습니다.
서하(西夏)의 경종(景宗) 이낭소(李曩霄)
는 본시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금의(錦衣)와 옥식(玉食)은 번국(蕃國) 사람 체질에 편리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금(金)나라의 세종(世宗)
'세종(世宗)' 관련자료
우리 동방 사람들은 대대로 요수(遼水) 동쪽에 살았으며, 만리지국(萬里之國)이라 불렀습니다. 삼면이 바다로 막혀 있고, 일면은 산을 등지고 있어 그 구역이 자연적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풍토와 기후도 역시 달라서 단군 이래 관아(官衙)와 주군(州郡)을 설치하고 독자적인 위엄과 교화를 펴 왔습니다. 고려의 태조(太祖)
는 신서(信書)를 지어 국민을 가르쳤는데, 의관(衣冠)과 언어는 모두 본국의 풍속을 준수하도록 하였습니다. 만일 의관과 언어가 중국과 다르지 않다면 민심이 정착되지 않아서 마치 제(齊)나라 사람이 노(魯)나라에 간 것과 같게 될 것입니다. 고려 때 불만을 품은 무리가 서로 잇달아서 몽고로 투화한 것은 한 국가로서는 매우 온당치 않은 일입니다. 바라건대 의관은 조복(朝服) 이 외에는 반드시 모두 중국 제도를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언어도 역관
이 외에는 옛 관습을 변경하는 것이 불필요합니다. 비록 연등(燃燈)⋅척석(擲石)이라 할지라도 역시 옛 관습을 따라도 안 될 것은 없습니다.
'태조(太祖)' 관련자료
'역관' 관련자료
『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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