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전기사회유교적 지배 질서의 확립

유교적 전례의 정비-국조오례의 서문

공손히 생각하여 보건대, 우리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께서는 큰 창업을 빛내어 여시고, 규범을 만세에 드리우셨다. 태종(太宗) 공정대왕(恭定大王)께서는 기업(基業)을 이어받아 더욱 전왕의 공렬(功烈)을 빛내었으나, 때가 바야흐로 혼미한지라 그 제작에 겸양하여 겨를이 없었다. 우리 세종(世宗) 장헌대왕(莊憲大王)에 이르러서는 문치(文治)가 태평에 도달하여, 마침내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이에 예조판서 신 허조(許稠, 1369~1439)에게 명하여 여러 제사의 차례 및 길례 의식을 상세히 정하도록 하고, 또 집현전 유신들에게 명하여 오례 의식을 상세히 정하도록 하셨다.

모두 두씨(杜氏)의 『통전(通典)』1) 을 모방하고, 두루 여러 서적에서 채집하였으며, 겸하여 중국 조정의 『제사직장(諸司職掌)』⋅『홍무예제(洪武禮制)』2) 와 우리나라의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3) 등을 참작해서 빼고 더하였다.

성심으로부터 재가를 받았으나, 미처 시행하지 못하고 빈천(賓天)함이 이에 닥쳤으니, 아 애통하도다. 생각건대, 우리 세조(世祖) 혜장대왕(惠莊大王)께서는 집안을 일으켜 나라를 세우시고 법을 세우고 기강을 펴서 빛나도록 새롭게 하셨는데, 오히려 조문이 크고 번거로워 앞뒤가 어그러질까 염려하여 감히 대번에 법으로 삼지 못하셨다. 이에 조정의 신하들에게 명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나누어 편찬하게 하시고, 또 세종(世宗) 조에 제정했던 오례의에 의거하여 옛 것을 상고하고 지금의 것을 실증하게 하셨다. 일에 시행하여 무방할 만하기를 기약하며 이름 하여 ‘오례의’라 하고 「예전」의 끝에 붙이셨다.

강희맹(姜希孟)과 이조판서 신 성임(成任)이 실제로 이 명령을 받아서, 글을 아직 탈고하지 못했는데 문득 예척(禮陟)하셨다. 그 뒤 예종(睿宗) 양도대왕(襄悼大王) 및 우리 주상 전하께서 선왕의 뜻을 추념하여 이 사업을 더하여 완수하게 하였다.

대전이 완성되자 거듭 신 강희맹과 중추봉조하(中樞奉朝賀) 정척(鄭陟),예조판서 이승소(李承召),참의 윤효손(尹孝孫)에게 명하여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 박숙진(朴叔秦),전내섬시정(前內贍寺正) 정영통(鄭永通),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 이경동(李瓊仝),이조정랑 유순(柳洵),권지승문원검교(權知承文院檢校) 구달손(丘達孫),승문원저작(承文院著作) 최숙경(崔淑卿) 등과 대전의 내용을 가려내게 하셨다. 그리고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신숙주(申叔舟)에게 특명을 내려 이 일을 총괄하게 하셨다.

갑오년(성종 5, 1474) 여름이 지나 비로소 능히 책이 완성되어 본뜨고 인쇄하여 장차 발행하고자 하였다. 이에 신이 가만히 살펴보건대, 예를 기술한 것이 3300가지의 글이 있기는 하나 그 요점은 길⋅흉⋅군⋅빈⋅가(吉凶軍賓嘉)라고 말하는 5가지에 불과할 뿐이다. 제사로 말미암아 길례가 있고, 사상(死喪)으로 말미암아 흉례가 있으며, 대비와 방어로 말미암아 군례가 있고, 교제와 관혼의 중요함으로 말미암아 빈례와 가례가 있다. 예는 이 5가지만 갖추면 사람 도리의 처음과 끝이 구비되는 것이니, 천하 국가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이를 버리면 할 수가 없다.

지금 이 책은 다시 역대 성인의 췌마(揣摩)의 공을 거쳐 그 정밀함이 지극하다.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로는 사대부서인에 이르기까지 각각 정해진 예가 있어 서로 넘지 않으며, 천경지위(天經地緯)곡례(曲禮)의 소소한 예절이 찬란하고 문란하지 않으니, 실로 우리 동방 만세의 훌륭한 책이다. 아아, 예악은 반드시 100년을 기다린 뒤에야 흥한다. 그러므로 주나라는 후직(后稷)이 기업(基業)을 창시한 것으로부터 문⋅무왕을 거쳐 수백 년이 지나 성왕에 이르러서야 크게 갖추어졌다. 우리 조정은 태조께서 개창하신 이래로부터 대대로 임금들이 서로 받들어서 깊은 인정(仁政)과 두터운 은택을 쌓은 지가 이미 오래이니, 어찌 형통(亨通)4) 하고 아름다운 모임이 바로 오늘에 있지 아니하겠으며 세상을 다스리는 제도의 성대함이 성상(聖上)을 기다림이 있지 아니하겠는가. 그러한 즉 이러한 교화의 시행이 마땅히 주나라의 『의례』 한 책과 더불어 길이길이 전해질 것은 의심할 바 없을 것이다.

성화(成化) 10년(1474) 여름, 5월 상한(上澣) 추충정난 익대순성 명량좌리공신 숭정대부 행 병조판서 겸 지경연 춘추관사 진산군 신 강희맹은 삼가 서문을 쓴다.

『사숙재집』권8, 오례의

1)중국 당(唐)나라 두우(杜宇)가 지은 것으로 중국 고대부터 당 현종(玄宗)까지의 제도를 8부문으로 나누어 엮은 책이다. 특히 『통전』은 200권 중 절반이 예제(禮制)에 관한 것이고 항목도 길례⋅가례⋅빈례⋅군례⋅흉례로 나누고 거기에 관련되는 세부 항목이 배열되어 있어 상고(詳考)하기에 편리하므로 『오례의』편찬 시에 크게 중시되었다.
2)명나라 개국 이래 예제(禮制)를 일신하기 위하여 각종 사전(祀典)을 상고하여 제작한 것으로, 홍무(洪武)연간에 간행⋅반포되었다. 진하례의(進賀禮儀)⋅출사례의(出使禮儀)⋅서압체식(署押體式)⋅관리봉급(官吏俸給) 등 11개 항목으로 분류하여 사례를 적고 있다.
3)고려 인종 대 최윤의(崔允儀)가 만든 책으로, 고려 초기 이래의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와, 고려왕실과 문반 관료와의 정치 권력 구조 상황이 만들어 냈다. 이후 『고려사』 예지 편찬의 기초 자료가 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주례적 요소에 바탕을 두고 당에서 정리된 오례의 개념, 즉 왕실 중심의 정치적 질서를 중시하는 예제(禮制)를 추구하였다.
4)『소학』 「소학제사(小學題辭)」에 “원(元)은 시절에 있어서는 봄이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인(仁)이 되며, 형(亨)은 시절에 있어서는 여름이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예(禮)가 되며, 이(利)는 시절에 있어서는 가을이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의(義)가 되며, 정(貞)은 시절에 있어서는 겨울이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지(智)가 된다.[元於時爲春 於人爲仁 亨於時爲夏 於人爲禮 利於時爲秋 於人爲義 貞於時爲冬 於人爲智]”는 구절이 나온다.

恭惟我太祖康獻大王, 光啓鴻業, 垂範萬世. 太宗恭定大王, 丕承基緖, 益光前烈而時方草昧, 其於制作, 謙讓未遑. 及我世宗莊憲大王, 文致太平, 適當千一之期. 乃命禮曹判書臣許稠, 詳定諸祀序例及吉禮儀, 又命集賢殿儒臣, 詳定五禮儀.

悉倣杜氏通典, 旁采羣書, 兼用中朝諸司職掌,洪武禮制,東國今古詳定禮等書, 參酌損益. 裁自聖心, 未及施用, 而賓天斯迫, 嗚呼痛哉. 惟我世祖惠莊大王, 化家爲國, 立經陳紀, 煥然一新, 猶慮條章浩繁, 前後乖舛, 未敢據以爲法. 爰命朝臣, 分撰經國大典, 且依世宗朝所定五禮儀, 考古證今. 斯可以施於事而無妨, 名曰五禮儀, 附于禮典之末.

臣希孟與吏曹判書臣成任, 實膺是命, 書未脫藁, 奄爾禮陟. 厥後睿宗襄悼大王及我主上殿下, 追念先志, 俾完斯事. 大典旣成, 仍命臣希孟,知中樞奉朝賀臣鄭陟,禮曹判書臣李承召,參議臣尹孝孫,與通禮院左通禮臣朴叔秦,前內贍寺正臣鄭永通,奉常寺僉正臣李瓊仝,吏曹正郞臣柳洵,權知承文院檢校臣丘達孫,承文院著作臣崔淑卿等撰定. 特命高靈府院君臣申叔舟總裁焉.

越甲午夏, 始克成書, 模印將行. 臣竊觀記禮者, 有三千三百之文, 然其要則不過曰吉凶軍賓嘉五者而已. 由祭祀有吉之禮, 由死喪有凶之禮, 由備禦有軍之禮, 由交際冠婚之重, 有賓與嘉之禮. 禮備乎五者, 而人道之始終具焉, 欲爲天下國家者, 舍是無以爲也.

今是書更歷數聖人揣摩之功, 極其精密. 上自朝廷, 下至士庶, 各有定禮. 不相踰越, 天經地緯, 曲禮小節, 粲然不紊, 實吾東方萬世之令典也. 嗚呼, 禮樂, 必待百年而後興. 故周自后稷肇基, 歷文武數百年, 迄于成王而大備. 則我朝自太祖開創以來, 列聖相承, 深仁厚澤, 積累也旣久, 豈非亨嘉之會, 正在今日, 而經世制作之盛, 有待於聖上歟. 然則是化之行, 當與周家禮儀一書, 並傳不朽也無疑矣.

成化十年夏五月上澣, 推忠定難翊戴純誠明亮佐理功臣,崇政大夫,行兵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事,晉山君臣姜希孟, 謹序.

『私淑齋集』卷8, 五禮儀序

이 사료는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지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서문이다. 강희맹세조(世祖, 재위 1455~1468) 때 『신찬국조보감(新撰國朝寶鑑)』⋅『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과 사서삼경을 언해했고,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때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국조오례의』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던 인물이다.

국조오례의』는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이 당시 예조판서 허조(許稠) 등에게 고금의 예서를 참작하고 『통전(通典)』을 모방하여 오례(五禮)의 편찬에 착수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완성되지 못하고 세조강희맹의 손을 거쳐 1474년(성종 5년) 신숙주(申叔舟, 1417~1475) 등의 책임하에 완성하였다. 오례의 예법과 절차 등을 그림을 곁들여 구성하였는데, 국가의 기본 예식인 오례, 즉 길례(吉禮)⋅가례(嘉禮)⋅빈례(賓禮)⋅군례(軍禮)⋅흉례(凶禮)에 관한 규정을 다루었다. 이 책은 조선 시대 『경국대전』과 더불어 국가의 기본 예전(禮典)이 되었다.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흉례가 91개조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길례가 56개조, 가례가 50개조, 군례가 7개조, 빈례가 6개조로 되어 있다. 길례에는 사직종묘와 각 전(殿) 및 산천 등 국가에서 제사를 드리는 의식 등을 기록하였으며, 가례에는 조서(詔書)⋅칙서(勅書)를 받는 의식, 조참(朝參)과 상참(常參), 납비(納妃)⋅책비(冊妃) 등 왕실의 혼례 절차, 세자의 관례⋅책례⋅입학례와 양로연(養老宴)에 관한 내용 등을 기록하였다. 빈례에는 중국 사신 및 일본⋅류큐 등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의식 등을 기록했으며, 군례에는 친사(親射)⋅열병(閱兵)⋅강무(講武)에 관한 군사 의식을 기록하였다. 흉례에는 왕의 국장(國葬)을 비롯해 왕실의 상장례 의식과 절차를 기록하였다.

일반적으로 조선은 건국 후 유교 이념을 국시(國是)로 삼고 이를 체계화한 예서 편찬에 주력하였다. 태조(太祖, 재위 1392~1398)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제정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이 효시인데, 이후 구체적인 내용을 보충하여 세종 때 『경제육전속전(經濟六典續典)』이 지어졌고 『국조오례의』가 상정되었으며, 『경국대전』 중의 예전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국조오례의』에 규정된 각종 의례는 궁중과 관련한 사항이 압도적으로 많이 편성되었으나 사대부나 서인(庶人)을 위한 규정도 마련하고 있다. 따라서 『국조오례의』는 강희맹이 쓴 서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편찬 과정과 함께 오례를 유교 이념의 중심으로 삼아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자 한 조선 전기의 국정 방향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책은 1744년(영조 20년)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1751년(영조 27년) 『국조속오례의보(國朝續五禮儀補)』 등이 편찬될 때 저본으로 활용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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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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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
『조선의 국가 제사』, 한형주 외,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관련 사이트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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