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전기사회사회 정책과 사회 제도

굶주린 사람을 구휼하는 법

군기부정(軍器副正) 권준(權蹲,)을 경기도 기민진제(飢民賑濟)경차관(敬差官)을 삼고, 시행할 사목(事目)을 내려 주었다.

1. 기민 가운데 나이가 많거나 병이 있어 관청에 왕래하여 환자(還上)나 진제(賑濟)를 받을 수 없는 자는 자세하게 조사하여 수령에게 몸소 직접 가서 구휼하도록 하라.

1. 각 고을 수령이 지난해의 환자에 대하여 헛 수량을 문서에 기록하고 그 수량을 충당하려고 음모하여, 이제 진제를 지급해 줄 때에 조금씩이라도 감하려 하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백성들의 받는 수량을 자세하게 물어서 사실을 조사하라.

1. 푸성귀는 겨울철에 벌써 다 먹고 지금 해가 긴 때를 당하여 단지 진제장(賑濟場)의 미곡만으로는 필시 굶주린 배를 채울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정이 있는 쌀을 더 주기도 역시 어려우니, 더덕⋅도라지 등 산나물을 많이 캐어서 섞어 먹게 하라.

1. 여러 날 굶어 지쳐서 쓰러진 기민은 좁쌀죽을 먹이면 즉시 죽는 법이니, 먼저 흰 죽물을 식힌 후 서서히 삼켜서 점차 주린 배를 축인 뒤에 먹을 것을 주도록 하라

1. 떠돌아다니는 인물들은 그 머물러 있는 곳에 조용히 모이게 하여 진제하여 구휼하고 농사 때가 되거든 원적지로 돌려보내도록 하라.

1. 고을 경계가 개이빨같이 들쭉날쭉하여 제 고을에서 멀리 귀빠지게 사는 백성으로 제때에 환자를 받아 가지 못하는 자는 우선 가까운 고을의 환자나 진제로 제급(題給)하여 구휼하라.

1. 뜻하지 않았던 곳에서 나오는, 깊은 산골이나 궁벽한 촌구석에 사는 기민을 우선 조사하여서 살펴보라.

1. 모든 진휼하는 일에 감고(監考)나 색장(色掌)으로서 마음을 쓰지 않는 자는 그 범행의 경중을 따라서 논죄하고, 수령이면 문초하여 위에 아뢴 뒤에 처벌할 것이다.

세종실록』권107, 27년 2월 3일(정미)

以軍器副正權蹲爲京畿飢民賑濟敬差官, 仍授事目.

一, 飢民內年老有病, 不能來往官門, 受還上賑濟者, 備悉推考題給, 守令躬親救恤.

一, 各官守令, 往年還上, 虛數載錄, 謀欲充數, 今賑濟題給時, 不無刻減之弊, 人民所受之數, 細問閱實.

一, 草食冬節盡喫, 今當日長時, 只以賑濟米穀, 必不充飢. 然有限之米, 加給亦難, 山蔘(菩)〔桔〕莄菜蔬, 多採兼食.

一, 累日絶食, 疲困飢民, 飮漿水則卽死. 先將粥水, 待冷徐徐投下, 漸致充飢, 然後給食.

一, 流移人物, 於所止處, 安集賑濟救恤, 臨農則發還元籍.

一, 犬牙斜入本官隔遠人民等, 不得趁時受出還上者, 姑以附近官還上賑濟, 題給救恤.

一, 出其不意, 幽深山谷及窮村僻巷飢民, 爲先考察.

一, 凡賑恤事, 監考色掌不用心者, 隨其所犯輕重論決, 守令則推考啓聞科罪.

『世宗實錄』卷107, 27年 2月 3日(丁未)

이 사료는 경기도에서 발생한 기민(飢民), 곧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이 권준(權蹲, ?~1459)을 경차관으로 임명한 뒤 그가 시행할 사항을 일러 준 내용이다. 여기에는 기민 상황을 직접 백성에게 물어 자세히 조사할 것과, 더불어 쌀이 부족한 상황에서 다른 산나물 등을 통해 구제하도록 한 점, 많이 굶주린 자들, 제때 구제 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구제, 떠도는 자에 대한 구제 및 구제 업무에 충실하지 않았던 수령을 비롯한 여러 인물에 대한 논죄 문제 등이 담겨 있다.

예부터 자연재해는 사람의 능력으로 막기 어려웠는데, 특히 수재나 한재는 농업 위주의 사회에서 흉작과 기근으로 이어졌다. 이에 발생한 기민을 위해 나라에서는 적극적인 진휼 정책을 펼쳤지만, 충분히 구제받지 못한 이들은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을 떠돌거나 굶주림에 시달려 죽거나 질병에 걸려 죽기도 하였다.

조선 왕조는 농업을 나라의 중심 산업으로 삼고 이를 안정, 발전시키기 위해 여러 정책을 펼쳤다. 이는 크게 3가지로 나눠 볼 수 있는데, 농업을 장려하는 권농(勸農), 농사를 감독하고 농사 형편을 파악하는 감농(監農), 흉년을 대비하거나 백성을 구제하는 황정(荒政)이다.

자연재해는 예고 없이 찾아오기 때문에 황정은 시기를 따로 두지 않고 어느 때든지 해야 할 일이었다. 국왕은 가뭄 같은 자연재해를 하늘의 뜻으로 알고 정치를 바르게 하라는 경계로 받아들여 가뭄이나 재해가 닥치면 널리 왕명을 내려 잘못된 정사를 바로잡을 좋은 방법을 신하에게 묻기도 하였다.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흉년이 되면 진대(賑貸), 진휼(賑恤), 시식(施食), 구료(救療), 상장(喪葬) 등의 대책을 시행하였다. 진대는 가난한 백성에게 창고의 곡물을 대여하고 추수 후에 환납하도록 한 제도였다. 진휼은 기민에게 식량 또는 염장(鹽藏 ), 의포(衣布) 등을 주는 것으로 진대와 달리 회수하지는 못했다. 시식은 기민을 일정한 장소에 모아 놓고 밥이나 죽을 먹여 응급 구제하는 것이었다. 구료는 기아로 말미암은 노약자나 환자를 모아 치료하는 것이며, 상장은 연고가 없는 사망자를 국가에서 직접 매장해 주는 것이었다.

이 외에도 국가에서는 진휼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 응급적인 특별 대책을 강구하여 시행하기도 하였다. 양곡 절약, 진곡 보충, 노역 중단, 구황식물 비축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양곡 절약은 일상생활에 긴요하지 않은 소비나 경비의 지출을 감축하는 것으로 금주, 연회의 중단, 또는 녹봉 감소 등이 있었다. 진곡을 보충하는 방법으로는 과전의 감축 방안을 의논하여 시행하기도 하였다. 노역 중단은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대책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기근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시행되었으며, 구황식물 비축은 흉황(凶荒)이 너무 심해 구제하기 어려운 경우 다시 논의하여 시행하며 다양한 구황식물을 채취하여 비축하고자 하였다.

진휼 기구는 곡물을 저장, 보관하여 기민을 구제하는 창제(倉制)와 환자를 치료하고 병사자는 매장하는 역할을 하는 구료소(救療所) 등이 있었다. 이러한 기구들은 사업의 성격에 따라 상설 또는 임시로 설치되었다. 창제는 상평창(常平倉)의창(義倉)사창(社倉) 등을 꼽을 수 있다. 상평창은 한성과 일부 시가지에 설치 운영되었고, 의창은 지방 각 관에 설치된 읍창이며, 사창은 각 마을에 설치되어 의창의 보급적인 성격을 띠었다. 3창은 필요할 때만 사무를 보았기 때문에 대개가 겸직이었다. 하지만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의창은 마련해 놓은 곡물이 바닥나고 해결책이 따로 없어 제 기능을 못하게 되었다. 이에 흉년 구제 사업은 환곡제 위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운영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백성을 구료하는 기구로는 혜민서(惠民署), 활인서(活人署) 등을 들 수 있다. 혜민서는 의약과 일반 서민의 치료를 맡아보았으며, 활인서는 한양 도성 내 기민의 질병을 전담 치료하는 동시에 갈 곳이 없는 사람을 수용하였다. 그 외에 구황청(救荒廳)은 진휼 사업을 총괄하는 기구이고, 진제장(賑濟場)은 기민⋅거지 중에서 구급을 요하는 사람을 먹여 주는 임시 기구였다. 진제는 16세기가 지나면서 점차 개인 차원에서 베푸는 비중이 커져 갔다. 이는 국가에서 진제 책임의 일부를 부유한 백성, 특히 사족에게 부담 지웠기 때문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15세기 자연재해의 특성과 대책」,『역사와 현실』5,오종록,한국역사연구회,1991.
「16세기 환곡 운영과 진자조달방식의 변화」,『한국사론』37,조규환,서울대학교 국사학과,1997.
「16세기 진제 정책의 변화」,『한성사학』10,조규환,한성대학교 사학과,1998.
저서
『조선초기 의창 제도 연구』, 김훈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조선전기농업경제사』, 이호철, 한길사, 1986.
편저
「진휼제도」, 김진봉, 국사편찬위원회, 2003.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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