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전기문화훈민정음의 창제와 활용

용비어천가

제1장

해동(우리나라)의 여섯 용이 나시어서, 그 행동하신 일마다 모두 하늘이 내리신 복이시니,

그러므로 옛날의 성인의 하신 일들과 부절을 합친 것처럼 꼭 맞으시니.

제2장

뿌리가 깊은 나무는 아무리 센 바람에도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꽃이 좋고 열매도 많으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끊이지 않고 솟아나므로, 내가 되어서 바다에 이르니.

제3장

옛날 주(周)나라 대왕이 빈곡((豳谷)에 사시어서 제업을 여시니. 1)

우리 시조가 경흥(慶興)에 사시어서 왕업을 여시니. 2)

제4장

적인(狄人)들이 모여 사는 가운데에 가시어, 적인들이 침범하거늘 기산으로 옮기신 것도 하늘의 뜻이시니. 3)

야인들이 모여 사는 가운데에 가시어, 야인들이 침범하거늘 덕원(德源)으로 옮기신 것도 하늘의 뜻이시니. 4)

제5장

칠수(漆水)와 저수(沮水) 두 강가에 있는 움을 후세 성인이 말씀하시니, 임금 노릇하기의 조심스럽고 힘듦이 저러하시니. 5)

붉은 섬 안에 있는 움을 이제도록 보나니, 임금되기의 어려움이 이러하시니. 6)

제6장

상(商)나라의 덕망이 쇠퇴하매, 주(周)나라가 장차 천하를 맡으실 것이므로, 서수(西水) 강가가 저자 같으니. 7)

고려의 운명이 쇠퇴하매, 조선이 (장차) 나라를 맡으실 것이므로, 동해(東海) 해변이 저자와 같으니. 8)

제7장

붉은 새가 글을 물어 침실의 지겟문에 앉으니, 이것은 그 성자(聖子)가 혁명을 일으키려 하매, 하늘이 내리신 복을 보일 것이니. 9)

뱀이 까치를 물어 나뭇가지에 얹으니, 이것은 성손(聖孫, 태조)이 장차 일어나려 하매 그 아름다운 징조가 먼저 나타난 것이니. 10)

제8장

태자를 하늘이 가리시어, 그 형의 뜻이 이루어지시매, (하늘이) 성손(聖孫)을 내신 것입니다. 11)

세자를 하늘이 가리시어, 황제의 명이 나리시매, (하늘이) 성자(聖子)를 내신 것입니다. 12)

「용비어천가」

1)주나라의 시조 후직(后稷)의 12세손인 태왕(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는 빈곡(豳谷)에서 덕을 쌓아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는 주나라의 건국이 무왕 때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그 기초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2)목조(穆祖)로 추존된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는 본래 전주 사람으로 고향을 떠나 삼척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동북면의 의주(함경도 덕원부)로 옮겼는데, 전주로부터 그를 따라온 사람들 및 삼척과 덕원 등지에서 합류한 사람들로 인하여 휘하에는 큰 이주민 집단이 형성되었다. 고려 정부는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의주병마를 주었다. 그러나 원나라가 쌍성(雙城) 이북 지방을 개원로라는 행정구역에 속하게 하고 원나라 장수인 산길대왕(散吉大王)을 통하여 그에게 항복을 요구하였으므로 이안사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투항하였다. 몇 차례의 이주를 거쳐 그는 1254년 개원로 남경(南京)의 알동(斡東, 함경도 경흥)으로 옮긴 후 원나라 황제로부터 알동천호소(斡東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 겸 다루가치(達魯花赤)로 임명되었다.
3)고공단보(古公亶父)가 빈곡에 살 때 적인(狄人)들의 침략이 잦았는데, 이들에게 재물을 주어 달랬으나 다시 침입하여 땅과 백성을 요구하였다. 사람들이 노하여 모두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고공단보는 백성들이 자신을 위해 싸우면 헛되이 목숨을 희생할 뿐이라는 논리를 들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빈곡을 떠나 기산(岐山)으로 갔다.
4)익조(翼祖)로 추존된 이성계의 증조부 이행리(李行里)는 이안사의 뒤를 이어 알동(斡東, 함경도 경흥)에서 알동천호소(斡東千戶所) 수천호(首千戶) 겸 다루가치(達魯花赤)로 있으면서 인심을 얻었다. 원나라의 통치력이 약화되고 원나라 장수 산길대왕(散吉大王)의 영향력이 사라지면서 북방의 여진족이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두만강 인근의 적도(赤島)로 피신하였다가 그를 따르는 경흥 사람들과 함께 덕원으로 옮겼다.
5)주나라 태왕(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가 기산으로 옮기는 중 칠수(漆水)와 저수(沮水) 인근에서 움을 파고 살았다는 내용이다.
6)익조(翼祖), 곧 이성계의 증조부 이행리(李行里)가 두만강 근처 적도(赤島, 붉은 섬)으로 피신하였을 때 움을 파고 살았다는 내용으로, 왕업(王業)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7)주나라 태왕(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가 기산으로 옮기는 중 칠수(漆水)와 저수(沮水) 인근에서 움을 파고 살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와서 강변이 마치 저자(시장)과 같이 북적였다는 내용이다.
8)목조(穆祖), 곧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는 전주에 살 때 아끼는 기생을 둘러싸고 전지주사(知全州事) 및 산성방호별감(山城防護別監)과 사이가 나빠져서 동해, 곧 강원도 삼척현으로 옮겼는데 그 때 가솔과 함께 전주의 백성 170여 호가 그를 따라갔다. 그런데 후에 강원도에 안렴사(按廉使)로 부임한 사람이 전주에서 기생의 일로 다투었던 산성방호별감이었므로 이안사는 다시 함경도로 옮겼는데 그 때 170여 호의 백성이 다시 그를 따라갔다.
9)붉은 새가 단서(丹書), 곧 붉은 종이 한 장을 입에 물고 와서 문왕의 침실 창문턱에 놓고 날아갔다. 이는 주나라가 천명을 받았다는 증거로 간주되었다. 성자(聖子)란 거룩한 왕의 아들, 곧 문왕의 아들 무왕을 말하는 것으로 혁명이 일어날 징조가 미리 나타났음을 말하는 내용이다.
10)도조(度祖)로 추존된 이성계의 조부 이춘(李椿)은 이행리(李行里)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알동천호소(斡東千戶所) 수천호(首千戶) 겸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물려받았다. 어느날 이춘이 군영에 있을 때 두 마리의 까치가 군영 안의 큰 나무에 앉았는데, 그는 멀리서 화살을 쏘아 한 살로 두 마리를 모두 떨어뜨렸다. 이때 큰 뱀이 나타나 까치를 물고 다른 나무에 얹어놓고 먹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생각하였다. 성손은 이춘의 손자, 곧 태조 이성계를 말한다. 따라서 이 일화는 이성계가 나라를 세울 것이며 그 징조가 미리 나타났음을 말하는 부분이다.
11)태자는 고공단보의 막내아들 계력(季歷), 그 형은 계력의 맏형인 태백(太伯)이며, 성손은 문왕을 뜻한다. 계력은 아들 창(昌)을 낳았는데 그때 상서로운 길조가 있었으므로, 태왕 고공단보는 세 아들 중 막내아들 계력을 왕으로 세워 다시 손자인 창(昌)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장자 태백은 태왕의 의도를 알고 동생 우중(虞仲)과 함께 형만으로 달아나 계력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이로써 왕위에 오른 창은 문왕(文王)이 되었으며, 그 아들인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멸망시켜 주나라가 건국될 수 있었다. 아울러 이 모든 일은 하늘의 뜻에 의한 것임을 마지막에 설명하고 있다.
12)세자는 환조로 추존된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 황제는 원나라의 황제이며, 성자는 태조 이성계를 뜻한다. 목조 이안사가 받은 알동천호소(斡東千戶所) 수천호(首千戶) 겸 다루가치(達魯花赤)의 벼슬은 이행리(李行里, 익조), 이춘(李椿, 도조)에게 이어졌다. 도조 사후 그 장자인 이자흥(李子興)이 뒤를 이었으나 곧 사망하였다. 이자흥의 아들 이교주(李咬住)는 이춘의 첫째 부인 박씨의 소생으로 나이가 어렸는데, 이를 이용하여 이춘의 둘째 부인인 조씨(趙氏)와 그 두 아들이 직위를 빼앗았다. 박씨와 이교주, 이자춘이 원나라 조정에 사정을 알리자, 황제는 이춘의 차자인 이자춘(李子春, 환조)이 임시로 관직을 맡게 하였다. 교주가 성장하자 이자춘은 관직을 돌려주려고 하였으나 교주가 사양하여 그대로 관직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자춘은 이후 원나라의 정책에 반대하여 1355년(공민왕 4) 공민왕을 찾아 신하가 되어 동북면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공격하여 친원 기씨(奇氏) 세력을 몰아냈다. 공민왕은 그에게 동북면을 안정시키는 책임을 주고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의 관직을 내렸다. 이로써 그는 동북면의 유력자로서 지위를 유지하였으며, 이성계가 그 뒤를 이어받아 조선 건국의 세력 기반이 마련되었다.

第一章

海東 六龍이 샤 일마다 天福이시니

古聖이 同符시니

第二章

불휘 기픈 남 매 아니 뮐 곶 됴코 여름 하니

미 기픈 므른 래 아니 그츨 내히 이러 바래 가니

第三章

周國 大王이 豳谷애 사샤 帝業을 여르시니

우리 始祖ㅣ 慶興에 사샤 王業을 여르시니

第四章

狄人ㅅ 서리예 가샤 狄人이 외어늘 岐山 올샴도 하디시니

野人ㅅ 서리예 가샤 野人이 외어늘 德源 올샴도 하디시니

第五章

漆沮  움흘 後聖이 니시니 帝業憂勤이 뎌러시니

赤島 안 움흘 至今에 보니 王業 艱難이 이러시니

第六章

商德이 衰거든 天下 맛시릴 西水ㅅ 져재 니

麗運이 衰거든 나라 맛시릴 東海ㅅ 져재 니

第七章

블근 새 그를 므러 寢室 이페 안니 聖子革命에 帝祜 뵈니

야미 가칠 므러 즘겟가재 연니 聖孫將興에 嘉祥이 몬제시니

第八章

太子 하히 샤 兄ㄱ디 일어시 聖孫 내시니다.

世子 하히 샤 帝命이 리어시 聖子 내시니다.

「龍飛御天歌」

이 사료는 1445년(세종 27년)에 완성된 악장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이다. 『용비어천가』는 조선 왕조 건국의 역사를 장엄한 서사시로 표현한 작품이다. 악장은 궁중에서 나라의 공식적인 행사에 쓰이는 노래 가사를 총칭하는 일반적 개념으로, 우리 문학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조선 시대 초기(15세기) 송축가를 지칭한다. 악장의 중심 담당층은 15세기 조선 왕조를 건국하고 그 기틀을 확고히 다져 나간 신흥 사대부 가운데 핵심 관료층으로 정도전(鄭道傳, 1342~1398)⋅하륜(河崙, 1347~1416)⋅변계량(卞季良, 1369~1430)권근(權近, 1352~1409)⋅윤희 등이다.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은 조선 왕조 건국의 역사를 장엄한 서사시로 편찬하고자, 정인지(鄭麟趾, 1396~1478)⋅권제(權踶, 1387~1445)⋅안지(安止, 1377~1464) 등으로 하여금 『용비어천가』를 짓도록 하였다.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1년 전인 1445년에 완성되었다. 세종이 직접 노래 이름을 지었고, 노래에서 다룬 사적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음을 염려해 최항(崔恒, 1409~1474)⋅박팽년(朴彭年, 1417~1456)강희안(姜希顔, 1417~1464)신숙주(申叔舟, 1417~1475) 등에게 명하여 자세한 주해를 붙이도록 하였다. 2년에 걸친 주해 작업을 끝내고 마침내 1447년(세종 29년) 2월 완성을 보았다. 그해 10월에 간행된 책 550부를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용비어천가』는 건국 시조들을 찬양하고 조선 왕조의 창건을 합리화하는 노래이며, 삼국 시대나 고려 시대에도 있었던 건국 신화를 표방하였다. 민간전승까지 조사해서 신기하고 기이한 내용을 갖추고, 필연적인 힘에 따라 영웅적인 투쟁을 거쳐 위대한 과업을 성취했다고 하는 오랜 전통을 이은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유학에 입각한 합리적 통치 방식이 더욱 강조되는 시기였지만 문학을 통해 민심을 장악하는 것은 계속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용비어천가』를 노래 부를 때 곡명은 여민악이라고 했는데, 이는 감화가 백성에게까지 미쳐 함께 즐기게 될 것을 기약한 것이다. 『용비어천가』는 세 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우리말 노래가 있고, 이어서 같은 사연이 한시로 표시되어 있으며, 그 다음에는 역사적인 사실 또는 설화를 자료로 한 자세한 주해가 있는데 이것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용비어천가』라는 작품은 우리말 노래로 한정된다. 노래는 모두 125장이다. 제1장은 한 줄이고 그 다음부터는 계속 두 줄씩이며 마지막의 제125장은 세 줄이다.

제1장과 제2장에 전체의 주제가 요약되어 있다 해동의 6룡은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태조(太祖, 재위 1392~1398)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이다. 목조부터 환조까지는 태조 이성계선조이다. 여진족이 사는 곳까지 밀려갔던 가문이 오랫동안 기반을 다져 마침내 왕조를 창건했음을 자랑하고 선조들을 높이고자 6대에 걸친 내력을 노래했다. 해동 6룡이 하늘로 날아올랐다는 말은 『주역(周易)』의 건괘(乾卦) 설명에 나타난 상징을 배경에 두고 뜻을 마음껏 펼쳤다는 것과 임금 자리에 올랐다는 것을 나타내니, 용비어천가라는 노래 이름이 그런 뜻을 지닌다. 즉 위대한 과업은 하늘이 복을 실현하면서 이루어졌고 옛날 성인들의 경우와 일치한다고 하고, 근본이 단단하니 앞으로도 계속 번영을 누리리라는 것을 비유를 들어 나타냈다.

이처럼 조선 전기에는 건국 시조들을 찬양하고 조선 왕조의 창건을 합리화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인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으로 저술한 최초의 책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며, 세종 대의 대표적인 문화적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세종대 용비어천가의 창제배경과 음악화 과정 연구」,『고시가연구』24,김세종,한국고시가문학회,2009.
「세종조 용비어천가 보수의 정황과 실상」,『어문논집』59,김승우,민족어문학회,2009.
「용비어천가 찬술의 역사사회적 의미에 관한 연구」,『한국전통문화연구』7,박승길,대구가톨릭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1991.
「용비어천가 어휘연구」,『자하어문논집』17,변혜원,상명어문학회,2002.
「용비어천가의 주해문 일고」,『한민족어문학』56,정무룡,한민족어문학회,2010.
「용비어천가와 조선 건국의 정당화」,『동양정치사상사』7-1,최연식,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2008.
「단군신화와 용비어천가에 나타난 통치자의 모습」,『역사와 사회』3-24,최희식,국제문화학회,1999.
저서
『용비어천가(역사로 읽는)』, 김성칠, 들녘, 1997.
『용비어천가』, 조규태, 한국문화사, 2010.
편저
『용비어천가와 세종의 국가경영』, 박병련 외,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1.
『세종시대의 문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태학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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