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전기문화역사⋅지리책의 편찬

동국여지승람 서문

토지에 관한 책이 있은 지가 옛날부터입니다. 황제(黃帝)는 들을 구획하여 나누었고, 당우(唐虞) 때에는 12주로 나누었으며, 하나라 때에는 〈우공(禹貢)〉이 있었고, 주나라 때에는 〈직방(職方)〉이 있었으며, 진한(秦漢) 이후로는 각각 지(誌)와 도(圖)가 있었습니다. 송나라 가희(嘉熙) 연간에 건안(建安)의 축목(祝穆)이 『방여승람(方輿勝覽)』을 편찬하여 사물의 중요한 것을 널리 채택하여 구절마다 각 주(州) 밑에 나누어 넣었으니, 그 문장이 칭찬할 만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송(南宋) 시대에 천지가 분열되어 남쪽과 북쪽을 다 차지하지 못한 탄식이 있었습니다. 공경히 생각건대, 명나라가 천하를 차지하여 문자와 궤도(軌道)가 통일되자, 『일통지(一統誌)』를 지어서 온 천하를 포괄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아, 훌륭합니다.

생각건대, 우리 동방은 단군이 나라를 처음 세우고, 기자(箕子)가 봉함을 받았는데, 모두 평양(平壤)에 도읍하였고, 한나라 때에는 사군(四郡)과 이부(二府)를 두었습니다. 이로부터 삼한(三韓)이 오이처럼 쪼개어져 마한(馬韓)은 54국을 통솔하고,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은 각각 12국을 통솔하였습니다. 그러나 상고할 만한 도적(圖籍)이 없고, 그 뒤로는 신라⋅고구려⋅백제 세 나라가 솥발처럼 나누어졌습니다. 신라의 땅은 동남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지리산, 북쪽으로는 한강에 이르렀으며, 고구려는 동으로는 바다, 남쪽으로는 한강에 이르며, 서북으로는 요하(遼河)를 넘었습니다. 백제는 서남으로는 바다, 동으로는 지리산, 북으로는 한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삼국이 강토가 비등하여 서로 위가 되지 못하다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니 강토가 더욱 넓어졌으나, 그 말기에 이르러 영역이 날로 줄어들어 궁예(弓裔)는 철원(鐵原)에 웅거하여 후고려(後高麗)라 칭하고, 견훤(甄萱)은 완산(完山)에 웅거하여 후백제(後百濟)라 칭하니, 강토가 갈기갈기 찢겨져 통일되지 못하였습니다.

……(중략)…… 우리 전하가 즉위하신 10년 무술년(戊戌年, 1478) 봄 1월에 신 양성지(梁誠之)가 『팔도지지(八道地誌)』를 바치고, 신 등이 『동문선(東文選)』을 바쳤더니, 전하께서는 드디어 선성부원군 신 노사신(盧思愼), 우찬성 신 강희맹(姜希孟), 지중추부사 신 성임(成任), 남원군(南原君) 신 양성지, 대사성 신 정효항(鄭孝恒), 참의 신 김자정(金自貞), 승문원 판교 신 이숙함(李淑瑊), 좌통례(左通禮) 신 박숭질(朴崇質), 행 호군 신 박미(朴楣) 및 신 서거정(徐居正) 등에게 명하여 시(詩)와 문(文)을 ‘지지(地誌)’에 넣게 하셨습니다. 신 등이 공손히 엄하신 명을 받아 사신(詞臣)을 가려서 거느리고 분과를 나누어 이루기를 구하여 위로는 관각(館閣)의 도서(圖書)로부터 아래로는 개인이 보관한 초고(草藁)까지 열람하지 않음이 없이 일체 나누어 넣었습니다.

연혁(沿革)을 먼저 쓴 것은 한 고을의 흥폐를 먼저 몰라서는 안 되기 때문이고, 풍속과 형승을 다음에 쓴 것은 풍속은 한 고을을 유지시키는 바이며, 형승은 사경(四境)을 공대(控帶)하는 바이므로 명산대천(名山大川)을 경위(經緯)로 삼고, 높은 성과 큰 보루를 금포(襟抱)로 삼았습니다. 묘사(廟社)를 맨 먼저 기재한 것은 조종(祖宗)을 높이며 신기(神祇)를 존경해서이고, 다음에 궁실(宮室)을 쓴 것은 상하의 구분을 엄하게 하고, 위엄과 무거움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오부(五部)를 정해서 방리(坊里)를 구분하며, 여러 관청을 설치하여 모든 사무를 보는데, 능침(陵寢)은 조종의 길이 편안한 곳이며, 사(祠)와 단(壇)은 또 국가의 폐하지 못할 전례입니다. 학교를 일으키는 것은 일국의 인재를 교육하려는 것이고, 정문(旌門)을 세우는 것은 삼강(三綱)의 근본을 표창하려는 것입니다. 사찰(寺刹)은 역대로 거기에서 복을 빌었고, 사묘(祠墓)는 선현(先賢)을 사모하여 추숭(追崇)한 것입니다. 토산은 공부(貢賦)가 나오는 바이고, 창고는 공부를 저장하는 곳입니다. 누대(樓臺)는 때에 따라 놀며 사신(使臣)을 접대하는 것이고, 원우(院宇)는 여행객을 접대하고 도적을 막는 것입니다. 관방(關防)을 웅장하게 한 것은 도적을 방비하기 위해서이고, 참(站)역(驛)을 벌여 놓은 것은 사명(使命)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인물(人物)은 과거의 어진 이를 기록한 것이고, 명환(名宦)은 장래에 잘하기를 권한 것입니다. 또 제영(題詠)을 마지막에 둔 것은 물상(物像)을 읊조리며 왕화(王化)를 노래하여 칭송함은 실로 시(詩)와 문(文)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도(京都)의 첫머리에 총도(摠圖)를 기록하고, 각각 그 도(道)의 앞에 도(圖)를 붙여서 이 양경(兩京) 8도로 50권을 편찬하고 정서하여 바치나이다. 신 등이 지금 세상에 살면서 역대의 사적을 모두 찾아야 하고, 서울에 거처하면서 사방의 먼 곳까지를 상고하자니, 이것은 들고 저것은 빠뜨리며 그릇된 것은 그대로 따르고 진실은 잃은 것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책을 펴서 그 일을 상고하고 도(圖)를 펼쳐 그 자취를 본다면 태산(泰山)에 오르거나 황하(黃河)의 근원을 끝까지 파고들 것 없이 8도의 지리가 마음과 눈에 환하여 문을 나가지 않고도 손바닥을 보듯이 분명히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한때의 선비들이 임금의 총명을 열어 넓히고 융성한 정치를 도울 뿐이겠습니까? 반드시 장차 성자(聖子)⋅신손(神孫)이 조종의 넓은 토지와 멀리까지 미친 왕화(王化)를 이어받아 길이 만세토록 지킬 것이 의심이 없습니다. 성화(成化) 기원 17년 창룡(蒼龍, 태세(太歲)) 신축 4월 하완(下浣)에 순성명량 좌리공신 숭정대부 달성군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오위도총부 도총관 신 서거정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서문을 쓰나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수, 동국여지승람

輿地有書, 古矣. 黃帝畫分野, 唐虞分十二州, 夏有禹貢, 周有職方, 秦漢以降, 各有誌有圖. 宋嘉熙中, 建安祝穆, 撰方輿勝覽, 博採事要, 逐節分入諸州之下, 其文雅有足可尙. 然趙宋渡江, 天地分裂, 不能無南北不盡之歎欽. 惟皇明馭宇, 文軌攸同, 作一綂誌, 四海萬國, 莫不包括, 猗歟盛哉.

念我東方, 自檀君肇國, 箕子受封, 皆都平壤, 漢置四郡二府. 自是三韓瓜分, 馬韓綂五十四國, 辰卞韓各綂十二國. 然無圖籍可考, 厥後新羅高勾麗百濟, 三國鼎峙. 新羅之地, 東南至海, 西至智異山, 北至漢水, 高勾麗東至海, 南至漢, 西北踰遼河. 百濟西南至海, 東至智異, 北至漢. 然三國地醜, 莫能相尙, 新羅滅麗濟, 幅貟益廣, 及其衰, 境壤日蹙, 弓裔據鐵原, 稱後高麗, 甄萱據完山, 稱後百濟, 土地幅裂, 莫能綂屬.

……(中略)…… 我殿下即位之十年, 戊戌春正月, 臣梁誠之進八道地誌, 臣等進東文選, 上遂命宣城府院君臣盧思愼, 右賛成臣姜希孟, 知中樞府事臣成任, 南原君臣梁誠之, 大司成臣鄭孝恒, 參議臣金自貞, 承文院判校臣李淑瑊, 左通禮臣朴崇質, 行護軍臣朴楣, 曁臣居正等, 以詩文添入地誌. 臣等恭承嚴命, 簡率詞臣, 分科責成, 上自館閣圖書, 下至私藏草藁, 無不披閱, 一切分入.

先之以沿革者, 以一邑興廢, 不可不先知也, 繼之以風俗形勝者, 風俗所以維持一縣, 形勝所以控帶四境也, 以名山大川, 爲之經緯, 以高城大砦, 爲之襟抱. 先書廟社, 所以尊祖宗, 敬神祇也, 次書宮室, 所以嚴上下, 示威重也. 定五部而辨坊里, 設諸司而治庶務, 陵寢乃祖宗永安之地, 祠壇又國家不刋之典. 興學以育一國之才, 旌門以表三綱之本. 寺刹歷代以之祝釐, 祠墓前賢以之追崇. 土産者貢賦之所自出, 倉庫者貢賦之所以貯. 樓臺所以時遊觀而待使臣也, 院宇所以接行旅而禁盜賊也. 壯關防以待暴客, 列站驛以傳使命. 人物記已往之賢, 名宦勸將來之善. 又終之以題詠, 所以吟詠物像, 歌頌王化, 實不外乎詩與文也.

錄揔圖於京都之首, 各付圖於其道之先, 以此兩京八道, 撰成五十卷, 繕寫以進. 臣等居今世, 而窮歷代之迹, 處都下而考四域之逺, 焉能免擧此而遺彼, 循訛而失實哉. 然披書以考其事, 覽圖以觀其迹, 則泰山不必登, 河源不必窮, 八道地理瞭然心目, 曾不出戶而視如指掌矣. 然則豈徒一時士子, 開廣聦明, 仰賛盛治而哉. 必將聖子神孫, 承祖宗輿地之廣, 聲敎之逺而永言持守於萬世也, 無疑矣. 成化紀元之十七年, 蒼龍辛丑四月下浣, 純誠明亮佐理功臣, 崇政大夫達城君兼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經筵, 春秋館, 成均館事, 五衛都揔府, 都揔管, 臣徐居正拜手稽首謹序.

『新增東國輿地勝覽』卷首, 東國輿地勝覽序

이 사료는 1481년(성종 12년)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완성한 후 지은 서문이다. 여기에 따르면, 조선 전기 관각 문인들은 우리 국토의 독자성을 드러내기 위해 『동국여지승람』을 집필하였고, 우리 문학의 독자성을 과시하기 위해 『동문선(東文選)』을 선집하였다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은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가 완성된 지 4년 뒤인 1481년에 편찬되었다. 성종(成宗, 재위 1469~1494)은 왕위에 오르자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을 통해 왕권의 권위를 확보함과 동시에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서문에는 중국의 『방여승람(方輿勝覽)』과 『일통지(一統志)』의 영향을 받아 지리지를 편찬한다는 것과, 단군 이래 우리 역사와 지리를 개관하고 있다. 이어 지리지에 포함해야 할 항목과 이유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관찬 지리지로서, 지리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역사⋅행정⋅군사⋅사회⋅민속⋅예술⋅인물 등 지방 사회의 모든 방면을 담은 종합 인문 지리서의 성격을 지녔다.

국가적 사업으로 세조(世祖, 재위 1455~1468) 조부터 진행되어 온 『동국여지승람』의 편찬 및 간행은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추진되었다. 따라서 다른 편찬 사업과 마찬가지로『동국여지승람』 편찬 사업에는 당시의 지식층을 대표하는 명망 있는 관원들이 대폭적으로 참여하였다. 『동국여지승람』의 경우 지리지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지리 자료집으로 편찬된 것은 아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는 달리 『동국여지승람』은 인문 지리지로서 편찬자의 주관하에 자료를 선택했는데, 특히 내용상의 인물이나 시문 등은 편찬자의 주관이 강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편찬자 및 수찬자가 훈구파사림파가 섞여 있는 상황에서 각기 그들의 입장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의 서문에 나타나는 편목 설정은 대체적으로 국가와 왕조의 위엄을 과시하고, 유교 문화가 발전⋅정착되어 가는 과정에서의 문화 의식을 강조하는 입장이 반영되고 있다. 즉 편찬자들은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 입각한 역사 의식하에 항목을 설정하여 내용을 편찬하였던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편찬 항목의 설정과 그 이유가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다.

이 외에도 『동국여지승람』의 편찬 목적은 인반(印頒)을 통해서 유교 문화를 널리 선양할 것을 주장하는 등 인문적인 면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또한 군사적인 목적을 위해서도 유용한 자료였으며, 국가의 보위와 지리 정보는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나라의 봉강(封疆)을 안전하게 지키고 치민을 위한 생활 기반을 확보하며 군수(軍需)의 조달을 위한 방편으로도 새로운 지지의 편찬이 필요하였다. 인적, 물적 자원을 각 도, 각 읍별로 구체적이면서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여 중앙 집권적 통치 체계를 확립하는 한편 군현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지역의 크기, 연혁(沿革), 관원(官員), 성씨, 호구, 전결, 물산, 군액(軍額) 등을 조사, 수록하는 것은 제일의 기초 작업이다.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은 이러한 목적 수행과도 관련이 있었다.

동국여지승람』은 완성 이후에도 꾸준한 교정, 증보 작업이 계속되었다. 1485년(성종 16년) 김종직(金宗直, 1431~1492) 등에 의해 1차 교정이 이루어졌고, 1499년(연산군 5년)에는 임사홍(任士洪, ?~1506)⋅성현(成俔, 1439~1504) 등에 의해 2차 교열이 진행되었다. 1528년(중종 23년)에는 새로운 보충 작업에 착수하여, 보완된 곳에 ‘신증(新增)’이란 두 글자를 첨가하였다. 그 결과 1530년(중종 25년)에는 속편 5권을 합쳐 전 55권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완성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크게 권수, 본문 내용 55권, 권말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권수에는 이행(李荇, 1478~1534) 등이 작성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진전문, 서문 및 찬수 관원 직명과 성명이 수록되어 있다. 그 다음에는 노사 등의 『동국여지승람』 진전문과 서거정의 『동국여지승람』 서문 및 찬수 관원의 직명과 성명이 기재되어 있다. 뒤를 이어 55권의 목차가 기재되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팔도총도」가 수록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당시 『동국여지승람』의 문제점이 여러 차례 제기되면서 편찬이 시작되었다.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후 김종직경연 석상에서 산천의 위치에 대한 기록이 읍인들에게 물어서 기록한 것일 뿐 측량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과 차이가 많다는 것과, 토산물은 상공(上貢)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읍인들이 꺼려서 실상을 말해 주지 않아 실제와 차이가 많다는 점을 들었다. 이에 1497년(연산군 3년) 기존에 누락된 부분을 보충하여 개정되었다. 이후 중종(中宗, 1488~1544)이 즉위한 후 연산군(燕山君, 1476~1506) 대의 잘못된 관제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은 작업이 진행되면서, 지방 군현의 연혁에 변화가 많아 다시 개편이 논의되었다. 그로 인해 연산군 대의 관제를 경신하고, 그동안에 생긴 효자⋅열녀의 행실과 아름다운 시문을 새로 가려 기록하여 증보하여 바치도록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구성상 『세종실록지리지』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각 도에 조선 전도인 「팔도총도」1)를 수록한 점이며, 각 해당 도의 전도를 삽입하고 있어서 양성지의 『팔도지리지』를 그대로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처음부터 일정한 편찬 규식(編纂規式)이 작성되어 이에 따라 내용을 서술하여 전체적인 통일성을 기하려 했던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대의 지리지를 본받고 대명 일통지의 항목 체재를 좇음으로서 구성상의 외적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이는 열람의 편의성과 의례의 정연함을 중시하였던 당시 관찬서의 특징을 보여 준다. 이는 지리에 관련된 모든 사상을 체계적으로 갖추어 조선조의 문화유산을 조감할 수 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체계적인 국토 인식은 조선 후기 지리지 편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영조(英祖, 재위 1724~1776)는 『여지도서(輿地圖書)』,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해동여지통재(海東輿地通載)』를 간행했고,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의 『택리지(擇里志)』, 김정호(金正浩, ?~?)의 『대동지지(大東地志)』와 같은 사찬(私撰) 지리지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택리지의 지형 관련 기록이 갖는 의의」,『한국지형학회지』14-3,범선규,한국지형학회,2007.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체재와 특징에 대한 일고찰」,『실학사상연구』12,서인원,역사살학회,1999.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자와 수찬자 분석」,『실학사상연구』13,서인원,역사실학회,1999.
「동국여지승람의 종합적 검토-동람도의 특성과 지도발달사에서의 위치-」,『진단학보』46⋅47합,이찬,진단학회,1979.
저서
『동국여지승람 연구』, 서인원,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조선 초기 지리지 연구』, 서인원, 혜안, 2002.
『한국고지도 발달사』, 이상태, 혜안, 1999.
『동국여지승람의 서지적 연구-초고본부터 신증본까지-』, 정의성,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토산물로 본 조선』, 최두환, 경남,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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