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습록』은 왕양명(王陽明)의 문인이 그 스승의 말을 기록한 것인데, 이제 몇 단락을 들어 변론하여 그 나머지를 포괄한다. ……(중략)……
서애(徐愛)
양명 왕수인의 제자
가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에 대하여 묻기를, “사람이 아비에게는 마땅히 효도하고 형에게는 마땅히 공경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효도하지 못하고 공경하지 못하니, 이것은 지와 행이 분명히 2가지인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것은 벌써 사의(私意)에 막히고 단절된 것이고, 지행(知行)의 본체가 아니다. 성현이 사람에게 지행을 가르치는 것은 바로 그 본체를 회복시키려는 것이다. 『대학』에 아름다운 여색(女色)을 좋아하듯이 하라고 하였다” 하였다. 변론은 다음과 같다. 양명이 말하기를, “요즘 사람은 우선 강습하고 토론하여 참을 알기를 기다려서 바야흐로 행(行) 공부를 하려 하니, 결국 종신토록 행하지도 못하고 종신토록 알지도 못한다” 하였는데, 이 말은 말학(末學)들의 한갓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것만 일삼는 폐단에 딱 들어맞는다. 그러나 이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억지로 천착(穿鑿)하여 지행합일이라는 이론을 만들어 내었는데, 이 조항에 대해 비록 지극히 자세하게 변론하였으나 말이 공교할수록 뜻이 더욱 멀어짐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호색(好色)을 보고 악취(惡臭)를 맡는 것을 지(知)에 소속시키고, 호색을 좋아하고 악취를 싫어하는 것을 행(行)에 소속시켰다. 그러고는 “보고 맡을 때에 이미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지, 본 뒤에 다시 마음을 세워 좋아하는 것이 아니며 맡은 뒤에 다시 마음을 세워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이것으로 지행합일의 증거를 삼았으니, 그럴 듯하다.
그러나 양명은 진실로, 사람이 선(善)을 보고 좋아하는 것이 과연 호색을 보고 저절로 좋아하는 진실과 같다고 생각하는가. 사람이 불선을 보고 싫어하는 것이 과연 악취를 맡고 저절로 싫어하는 진실과 같다고 생각하는가.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나는 덕을 좋아하기를 색을 좋아하듯 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하고, 또 “나는 불인(不仁)을 미워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대개 사람의 마음이 형기(形氣)에 발하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알고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능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있는 곳에 표리(表裏)가 한결같다. 따라서 호색을 보기만 하면 곧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서 마음에 진실로 좋아하고, 악취를 맡기만 하면 곧 나쁘다는 것을 알아서 마음에 진실로 싫어하니, 행이 지에 붙어 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의리에서는 그렇지 않다. 배우지 않으면 알지 못하고 힘쓰지 않으면 능하지 못하여, 겉으로 행하는 것이 반드시 내면에 진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선을 보고도 선인 줄 알지 못하는 자가 있으며, 선임을 알고도 마음으로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으니, 선을 본 때에 이미 스스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불선을 보고도 싫어할 줄 알지 못하는 자도 있으며, 악임을 알고도 마음으로 싫어하지 않는 자가 있으니, 악을 안 때에 이미 스스로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대학(大學)』에서 저 표리여일(表裏如一)한 호오(好惡)를 빌려서 배우는 자들에게 자기를 속이지 말도록 권면한 것은 옳지만, 양명이 저 형기의 하는 바를 끌어 대어 의리의 지행에 대한 설을 밝히려 한 것은 대단히 옳지 않다. 그러므로 의리의 지행을 합하여 말하면 참으로 서로 필요하고 병행하여 한쪽이 없어서는 안 되지만, 나누어 말하면 지를 행이라 할 수 없는 것은 행을 지라 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어찌 합하여 하나라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성현의 학문은 마음에 근본 하여 사물에 관철되므로, 선을 좋아하면 마음으로 좋아할 뿐 아니라 반드시 행하는 일에서 그 선을 이루려 하기를 마치 호색을 좋아하여 반드시 구하여 얻는 것처럼 하며, 악을 싫어하면 마음으로 싫어할 뿐 아니라 반드시 행하는 일에서 그 악을 제거하려 하기를 마치 악취를 싫어하여 결단코 없애려고 힘쓰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양명의 소견은 오로지 본심에 있어 조금이라도 밖으로 사물에 관련될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다만 본심에 나아가 지행을 하나로 인식하여 혼합하여 말한 것이다. 만일 그의 주장대로 오로지 본심만 일삼고 사물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마음이 실로 호색을 좋아하면 비록 장가들지 않고 인륜을 폐하더라도 호색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마음이 실로 악취를 싫어하면 비록 불결한 것을 몸에 뒤집어쓰더라도 악취를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양명도 자신의 주장이 편벽됨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지행을 나누지 않는 것을 지행의 본체라 하고, 지행을 나누는 것을 사의(私意)에 막히고 단절되었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옛 성현이 지행에 대하여 말한 것이 모두 사의란 말인가. “아픈 줄 알면 이미 아파하고 추운 줄 알면 이미 추워하고 주린 줄 알면 이미 배고파한다”라고 한 것은 그 말이 또한 공교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픔과 굶주림과 추위는 몸과 마음이 접합되는 일로써 상황에 따라 명명될 수 있는 것일 뿐 의리의 지행(知行)을 이르는 것은 아니다. 아픈 줄 알면 합당하게 처리해야 아픔의 지행이라 할 수 있고, 굶주리고 추운 줄 알면 합당하게 처리해야 굶주림과 추위의 지행이라 할 수 있다. 만일 단지 아파하기만 하는데 행이라고 한다면 행하는 것은 혈기일 뿐 의리는 아니며, 단지 배고파하고 추워하기만 하는데 행이라고 한다면 행하는 것은 인심일 뿐 도심이 아니다. 게다가 아프면 아픈 줄 알고 굶주리고 추우면 배고파하고 추워할 줄 아는 것은 길 가는 사람이나 걸인이나 금수도 다 할 수 있으니, 이러한 것을 지행이라 한다면 학문하는 것이 무엇이 귀하겠는가. 무릇 아픔과 가려움을 알고 굶주림과 배부름을 아는 것을 성(性)이라 한 것은 본래 고자(告子)의 “생의 본능을 성이라 한다[生之謂性]”는 설에서 나왔는데, 양명의 소견이 바로 여기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여 그 변설을 꾸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형기의 욕구에는 베풀 수 있지만 의리의 지행에는 비유할 수 없다. 그러므로 효(孝)와 제(弟)에 대해서는 “효도를 알면 이미 효도하고 공경을 알면 이미 공경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다만 “사람들 중에 효도를 칭찬하고 공경을 칭찬하는 자는 반드시 이미 효도를 행하고 공경을 행한다”라고 하였으니, 앞뒤의 말뜻이 서로 부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끝에 가서 “옛사람이 그러므로 이미 지를 말하고 또 행을 말한 것이다”라고 한 대목에서는 예전대로 둘로 나누어 말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는 도리가 본래 이와 같아서 끝내 혼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퇴계선생문집』권41, 잡저, 전습록논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