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전기문화문학과 예술의 융성

예악 정신과 음악-악학궤범 서문

음악은 하늘에서 나와서 사람에게 붙인 것이요, 공허한 데서 출발하여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사람의 마음으로 하여금 감동하여 움직이게 하고 혈맥이 통하고 정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느낀 바가 같지 않기 때문에 소리도 같지 않아 기쁜 마음을 느끼면 그 소리가 날려 흩어지고, 노한 마음을 느끼면 그 소리가 거칠어서 매서우며, 슬픈 마음을 느끼면 그 소리가 급하여서 날카로우며, 즐거운 마음을 느끼면 그 소리가 느긋하여 태연하게 되는 것이다. 그 같지 않은 소리를 합해서 하나로 만드는 것은 임금의 인도 여하에 달렸다. 인도함에는 정(正)과 사(邪)의 다름이 있으니 풍속의 성쇠 또한 여기에 달렸다. 이것이 음악의 도(道)가 백성을 다스리는 데 크게 관계되는 이유이다.

오제(五帝)의 음악을 논하면 당우(唐虞) 때보다 더 성(盛)함이 없었는데, 이는 오로지 후기(后夔)의 협찬(協贊)에 맡겼고, 삼왕(三王)의 음악을 논하면 성주(成周) 1)때보다 더 완비(完備)됨이 없었으되, 일체 주공(周公)에게 제작(制作)을 맡겼으니, 당시의 음악의 진설(陳設)과 시행(施行)의 법이 전모(典謨)와 「주례(周禮)」에 모두 실려 있다. 이는 모두 예악(禮樂)을 먼저하고 형벌을 뒤로 하여 교화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므로 사방(四方)이 교화된 공효가 있었고, 40년 동안 형벌이 없는 융성함이 있었다.

세교(世敎)가 쇠함으로부터 순박한 풍속이 없어지고 오로지 형벌로만 통치를 돕게 하여, 법 맡은 관리를 귀하게 여기고 예의(禮義)를 갖춘 선비를 천하게 여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선왕(先王)의 악이 남김없이 사라지고 숭상하는 것이 모두 음란하고 경박한 세속의 음악이어서, 그 음이 흘러 정(鄭)⋅위(衛)의 상간(桑間)⋅복수(濮水)의 음악이 되었고, 흩어져 진(陳)⋅초(楚)의 무당의 풍속이 되어서 마침내 문란(紊亂)이 잇달아 서로 망해 버리게 되었으니, 장홍(萇弘)과 사광(師曠)의 귀 밝음과 계찰(季札)과 중니(仲尼) 같은 성인(聖人)으로서도 구제할 수 없었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숙손통(叔孫通)이 불타고 남은 것을 수습하여 겨우 의제(儀制)를 만들었으나, 음악에 있어서는 진나라의 구악(舊樂)을 인습(因襲)하여 종묘 악장(宗廟樂章)만을 찬(撰)했을 뿐, 음악의 본원(本源)을 총괄(總括)하지 못했다. 이러므로 문제(文帝)는 국초(國初)라서 겨를이 없었다는 말이 있었고, 무제(武帝)는 뜻은 있었으나 찬조(贊助)할 적격자가 없어, 이연년(李延年)이 방중가(房中歌)를 지었지만 끝내는 사사로운 연회악(宴會樂)이 되었으며, 경방(京房)은 60률(律)을 창설(創設)하였으나 견강부회(牽强附會)1)의 고루함을 면치 못하였다.

진(晋)의 순욱(荀勗)⋅장화(張華), 진(陳)의 정역(鄭譯), 수(隋)의 우홍(牛弘), 당(唐)의 조효손(祖孝孫), 송(宋)의 화현(和峴)⋅진양(陳暘)으로 말하면 대대로 악(樂)을 맡은 자가 있어서 악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말단(末端)만 맞추었을 뿐 근본을 몰랐으니 어찌 더불어 악도(樂道)의 묘(妙)를 논할 수 있겠는가. 다만 송나라 채원정(蔡元定)의 저술이 깊이 율려(律呂)의 본원(本源)을 얻었으나, 탄법(彈法)과 지법(指法)을 널리 펴서 성(聲)과 율(律)에 맞게 못하였으니, 이는 마치 호미와 쟁기는 있지만 갈고 맬 줄 모르는 것과 같다.

이로써 보면 악(樂)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악은 저절로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하여 허물어지는 것이다. 황제(黃帝)의 함지(咸池), 제곡(帝嚳)의 육영(六英), 순(舜)의 소(韶), 탕(湯)의 호(濩)의 음악이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은 당시의 세상이 태평했던 까닭이지 악의 공(功)이 아니며,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이 모든 사람에게 비난받는 것은 당시 임금이 방탕했던 까닭이지 악의 죄는 아니다.

우리나라는 삼한(三韓)이 정립한 시대 이래로, 나라마다 악이 있었으나 악기가 미비하고 성음의 결함이 많고, 저속한 음악에 섞여 있으니, 누가 그것을 바로잡겠는가? 고려 중엽에 이르러 송나라 황제가 태상악(太常樂)을 하사하였다. 아조(我朝)에 이르러는 명나라가 어부(御府)의 소장 악기를 하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경(磬)⋅관(管)⋅생(笙)⋅우(竽)⋅금(琴)⋅슬(瑟)의 악기가 또 갖추어지게 되었다.

삼가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군(聖君)으로, 음률(音律)에 정통(精通)하시어 종전의 누습(陋習)을 깨끗이 씻으려 하였는데, 마침 거서(巨黍)가 해주(海州)에서, 채석(彩石)이 남양(南陽)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이것은 하늘이 동방(東方)에 화기(和氣)를 펴서 유능하신 임금에게 내려주시어 새로 악을 제작토록 하신 것이다. 이에 거서로 황종의 율관(律管)을 정하고 채석으로 경(磬)을 만들며, 또 악의 강(腔)을 만들고 그 강에 의하여 악보를 만들어 절주(節奏)의 완급을 자세히 표시하였는데, 당시 악(樂)을 맡은 사람은 박연(朴堧)뿐이었다. 그러나 박연이 습득(習得)한 것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으니, 어찌 대왕(大王)의 계획에 만분의 일이나마 도움을 주었겠는가? 찬조(贊助)에 불과하였을 뿐이다. 세조대왕은 더욱 악에 정통하시어 많은 가곡(歌曲)을 지으셨고, 또 제사악(祭祀樂)을 찬정(撰定)하시어 종묘(宗廟)에 쓰셨는데, 그것을 지으신 법(法)은 선왕의 뜻을 좇아 만든 것이다. 다만 그때 찬조(贊助)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 한스럽다.

지금 전하(성종)께서는 성군으로서 성군을 이으셔서, 성헌(成憲)을 준수하여 전성(前聖)이 개발하지 못한 것을 개발하셨으니, 예악(禮樂)으로 태평 시절을 일으키실 때가 바로 지금이다. 장악원(掌樂院) 소장의 의궤(儀軌)와 악보(樂譜)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 해어졌고, 요행히 보존된 것 역시 모두 소략하고 오류가 있으며 빠진 것이 많다. 이에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성현(成俔), 주부(主簿) 신말평(申末平), 전악(典樂) 박곤(朴棍)⋅김복근(金福根)에게 명하여 다시 교정하게 하였다. (이들은) 먼저 율(律) 만드는 원리(原理)를 말하고 다음에는 율(律) 쓰는 법을 말하였으며, 악기⋅의물(儀物)의 형체(形體)⋅제작(制作)하는 일과, 무도(舞蹈)⋅철조(綴兆)하는 진퇴(進退)의 절차에 이르기까지 모두 기재하였다. 책이 만들어지자 『악학궤범(樂學軌範)』이라고 명명하였다.

생각건대 5음(音) 12율(律)은 악의 근본이다. 물(物)이 생기면 감정(感情)이 있게 되고 감정이 발하여 음이 된다. 음에는 다섯 가지가 있어서 오행(五行)에 분배되며, 관(管)의 길고 짧음에 따라 청성과 탁성이 있으며, 율에는 열둘이 있어서 12월(十二月)에 분배되고, 5음과 12율이 서로 맞아 12율을 삼분손일(三分損一)하여 하생(下生)하고, 삼분익일(三分益一)하여 상생(上生)하여 그 쓰임이 무궁하여 여덟 가지의 악기에 붙이는 것이 다 법칙에 맞는다. 노래는 말을 길게 하여 율에 맞추는 것이고, 춤은 팔풍(八風)을 행하여 그 절조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자연의 법칙이지 개인의 지혜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지의 중화(中和)를 얻으면 발라서 제자리를 얻거니와 만일 중화를 잃으면 인심이 음일(淫溢)해져서 간사한 데로 흐르게 된다. 이에 변치(變徵)⋅변궁(變宮)의 2음(音)이 그 진정(眞正)을 깍고, 청성(淸聲) 넷이 그 본정(本正)을 빼앗게 되므로 군신과 사물의 분별이 어지러워진다. 그러나 소리에 변성과 청성이 있는 것은 마치 음식에 짜고 심심한 것이 있어서 오로지 대갱(大羹)⋅현주(玄酒) 같은 맛만 쓸 수는 없는 것과 같은데, 다만 정성(正聲)이 항상 주(主)가 되어 변성(變聲)을 제어(制御)함으로써 중화(中和)의 기(氣)에 어긋나지 않게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음악은 세 가지가 있으니, 즉 그것은 아악(雅樂)⋅당악(唐樂)⋅향악(鄕樂)으로, 다시 말하면 제사에 쓰는 것, 조회(朝會)와 연향(宴饗)에 쓰는 것, 민간에서 우리말로 익히는 것이 있는데, 그 대요(大要)는 7균(均) 12율(律)을 쓰는 데 지나지 않는다. 무릇 재능(才能)은 균일하지 않기 때문에, 음악을 알기 어려운 사람과 알기 쉬운 사람이 있는 것이므로, 수법(手法)에 묘(妙)한 사람이 장단을 모르기도 하고, 장단에 능(能)한 사람이 근본을 모르기도 하여서, 일부분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전체를 환하게 아는 사람은 적으니, 심하구나, 음악의 어려움이여!

좋은 음악도 귀를 스쳐 가면 곧 없어지고, 없어지면 흔적이 없는 것이 마치 그림자가 형체(形體)가 있으면 모이고, 형체가 없어지면 흩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악보가 있으면 음의 느리고 빠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림이 있으면 악기의 형상을 분변(分辨)할 수 있을 것이고, 책이 있으면 시행(施行)하는 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신등이 졸렬한데도 불구하고 이 책을 찬(撰)한 이유이다.

홍치(弘治) 6년(1493, 성종 24) 8월 상한(上澣)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예조판서 겸 동지춘추관사 세자우빈객(禮曹判書兼同知春秋館事世子右賓客) 신(臣) 성현(成俔)은 삼가 서(序)한다.

『악학궤범』 서

1)성주(成周) : 주(周)나라 성왕(成王)과 주공(周公)의 시대를 말하는 것으로, 주나라가 통일되고 가장 융성한 시기로 간주된다. 주 왕조는 건국 초(武王) 무왕 때 서쪽의 호경(鎬京)을 수도로 하여 주나라의 종묘를 두고 종주(宗周)라 하였는데, 곧 주나라의 서도(西都)이며 현재의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지역이다. 성왕과 그를 보필하던 주공은 주 왕실 내부의 반란 및 멸망한 은나라 왕족인 무경의 반란을 토벌한 후 동쪽으로 낙읍(洛邑)을 건설하여 동도(東都)로 삼았다. 이는 성주(成周)로도 불렸으며 현재의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근처였다. 주공과 성왕 두 지도자에 의하여 제후국 분봉이 대부분 완료되고 주나라는 정치적 안정기에 들어갔으며, 이러한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성왕의 아들 강왕(康王)은 주의 황금 시대를 열 수 있었다. 따라서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두 개의 도성을 세운 시기를 서주 시대(BC 1122~BC 770)라고 하며, 견융(犬戎)의 침략을 받아 유왕(幽王)이 죽고 평왕(平王)이 낙읍(洛邑)으로 패퇴한 후의 시기를 동주 시대(BC 770~BC 256)라 한다.
1)견강부회(牽强附會) : 가당치도 않은 말을 억지로 끌어다 붙여 조리에 맞추려 함.

樂也者, 出於天而寓於人, 發於虛而成於自然, 所以使人心感而動盪, 血脉流通而精神怡悅也. 因所感之不同, 而聲亦不同, 其喜心感者發以散, 怒心感者粗以厲, 哀心感者噍以殺, 樂心感者嘽以緩. 能合其聲之不同而一之者, 在君上導之如何耳. 所導有正邪之殊, 而俗之隆替係焉. 此樂之道所以大關於治化者也. 論五帝之樂, 則莫盛於唐虞, 而專委后夔之贊襄, 論三王之樂, 則莫備於成周, 而一任周公之制作, 其當時施設之方, 盡見於典謨周禮之書. 是皆先禮樂而後刑罰, 以興敎化. 故有四方風動之效, 有四十年刑措之隆. 自世敎衰, 漓淳散朴, 專以刑罰補治, 貴治獄之吏, 賤禮義之士. 所謂先王之樂蕩盡無餘, 而所尙者皆荒淫浮靡之風, 流而爲鄭衛桑濮之音, 散而爲陳楚巫覡之俗, 卒至亂轍相繼而淪胥以亡, 雖以萇弘師曠之聰, 季札仲尼之盛, 而不能救也. 漢興, 叔孫通收拾於灰燼之餘, 僅得成儀, 然於樂則因秦之舊, 只撰廟章, 未能該括本原. 是故, 文帝有未遑之語, 武帝雖有志, 而所贊者非其人, 延年製房中之詞, 而終致燕昵之私, 京房創六十之律, 而未免附會之說. 至如晉之荀勖張華, 陳隋之鄭譯牛弘, 唐之祖孝孫, 宋之和峴陳暘, 莫不代有其人, 以制其樂. 然徒揣其末, 而不知其本, 是奚足與語樂道之妙哉. 惟蔡元定之書, 深得律呂之源, 可謂知其本矣, 然未能布瓜指而諧聲律, 是猶抱鋤耒而未諳耕耘之術也. 由玆以觀, 樂非自成, 因人而成 樂非自敗, 因人而敗. 咸英韶濩之音, 人皆贊之者, 時世雍和也, 非樂之功, 玉樹後庭花, 霓裳羽衣曲, 人皆惡之者, 時君放蕩也, 非樂之罪也. 惟我大東, 自三韓鼎峙以來, 國皆有樂, 然樂器未備, 聲音多缺, 雜於夷靺, 鄙俚之作, 孰有釐正之者. 至高麗中葉, 宋帝賜太常之樂. 至我朝, 大明錫御府之藏. 由是磬管笙竽琴瑟之器又備矣. 恭惟世宗大王, 以天縱之聖, 精於音律, 欲洗從前之陋習, 適巨黍生於海州, 彩石產於南陽. 是天敷和氣於東方, 授大有爲之君以新制作也. 於是取黍定律, 取石作磬, 又作樂腔, 因腔作譜, 以審節奏之疾舒, 當時掌樂者, 只朴堧一人. 然堧之所得, 土苴耳, 豈有裨於聖算之萬一. 不過贊助而已. 世祖大王, 尤精於樂, 多製歌曲, 又能撰定祀樂以薦於廟, 其作成之方, 遹追先志而爲之. 顧其時無贊助之者, 是可歎也. 今我殿下以聖繼聖, 仰遵成憲, 發前聖所未發, 興禮樂於太平, 此其時矣. 樂院所藏儀軌及譜, 年久斷爛, 其幸存亦皆疏略訛謬, 事多遺闕. 爰命武靈君臣柳子光曁臣俔與主簿臣申末平,典樂臣朴,臣金福根等, 更加讎校. 先言作律之源, 次言用律之方及夫樂器,儀物,形體,制作之事。舞蹈,綴兆,進退之節, 無不備載. 書成, 名曰樂學軌範. 臣竊惟, 夫五音十二律, 樂之本也. 物生有情, 情發爲音, 音有五而分配於五行, 因管之長短, 而有聲之淸濁, 律有十二, 而分配於十二月, 音與律相協, 上下損益, 而其用無窮, 以寓於八者之器, 莫不皆然. 歌所以永言而和於律, 舞所以行八風而成其節. 是皆取法乎天也, 非經營於私智也. 得天地之中和, 則正而獲其所如, 或失其中和, 則人心淫溢而趨邪. 於是, 二變得以耗其眞, 四淸得以奪其本, 而君民事物之分亂矣. 然聲之有變淸, 猶飮食之有鹹淡, 不可專用大羹玄酒之味, 使正聲常爲之主, 而能得以制變, 不悖中和之氣則可也. 我國之樂有三, 曰雅曰唐曰鄕, 有用於祭祀者, 有奏於朝會宴饗者, 有習於鄕黨俚語者, 其大要不過七均十二律之用也. 夫才之能否不一, 故其知樂有難易, 妙於手子, 或迷於節, 能於節者, 或失其原, 知一隅者雖多, 而能兼該曉暢者蓋寡, 甚矣樂之爲難也. 好音過耳而便滅, 滅則無跡, 猶影之有形而聚, 無形而散也. 苟能有譜則可知緩急, 有圖則可辨形器, 有籍則可知施措之方. 此臣等所以不揆鄙拙而撰之也. 弘治六年癸丑八月上澣, 資憲大夫禮曹判書兼同知春秋館事世子右賓客臣成俔謹序.

『樂學軌範』 序

이 사료는 1493년(성종 24년)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은 『악학궤범(樂學軌範)』의 서문이다. 성현은 1462년(세조 8년) 23세로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예조판서⋅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악학궤범』은 1493년 중국의 역대 악서에 기록된 각종 이론과 조선조의 기존 악보, 관련 문헌 등을 조사하여 새롭게 편찬한 책으로, 조선 초기의 음악 이론에 관해서도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유교에서는 ‘예악’이라 하여 예법과 음악을 중시한다. 풍속과 민심을 바꾸는 건전하고 좋은 음악을 장려하기 위해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은 악기와 노래 제작 등 음악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고려 후기 이후 전쟁과 민란을 거치면서 많은 악기들이 분실되고 사라져 조선 초기에 제대로 된 연주를 할 수 없자, 세종이 새로운 악기를 제작하도록 하여 이후 합주가 가능할 정도로 많은 악기가 만들어졌다. 세종 대에 만들어진 종묘제례악인 정대업, 보태평 등은 지금까지 500여 년간 연주되고 있다. 또한 우리 음악에 맞는 악보가 만들어졌는데 이를 ‘정간보’라고 한다. 이처럼 예악을 기저로 나라의 기틀을 세워야 한다는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완성과 함께 『악학궤범』이 편찬되었다.

세종 대에 오면 유학의 발전과 함께 예악 면에서 괄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난다. 특히 박연(朴堧, 1378~1458)을 발탁하여 악율 연구를 심화시키고, 악서를 편찬해 악의 전체적인 정리 작업을 하였다. 세종 연간의 유교 정치는 바로 예악을 실천하였던 정치로, 이것은 일단 오례와 악보로 정리되어 실록에 등재되었다. 『악학궤범』의 편찬은 오례의 운영에서 악의 연주 시기, 내용, 악장 등에 이르는 의제와 조화되는 악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즉 음률에서 연주의 숙련을 위해 최대한 기록⋅보존하는 방법으로 『악학궤범』이 편찬된 것이다.

성현은 『악학궤범』 서문에서 ‘무릇 사람의 재능은 균일하지 않아 음악의 전모를 환히 다 아는 이가 드물다는 점, 아무리 좋은 음악도 한번 흩어지고 나면 형체가 없어지는 점’에 주목하고, 이를 악보와 악기 그림, 음악을 시행하는 법을 기록하여 보완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조선 왕조의 음악은 여러 차례의 전쟁과 국가 혼란으로 인해 단절이 불가피한 때에도 『악학궤범』을 참고로 국가 예악 제도를 전승할 수 있었다. 즉 『악학궤범』 편찬의 가장 중요한 음악사적 의의는 조선의 국가 의례 음악의 전승에 중요한 규범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악학궤범』은 이 밖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악학궤범』은 조선 전기에 이루어진 폭넓은 악론(樂論) 연구의 내용을 보여 줄 뿐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내용을 기술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악학궤범』에서 특히 빛나는 부분은 악기 설명이다. 아악기(雅樂器)⋅당악기(唐樂器)⋅향악기(鄕樂器) 순서로 기록한 악기 항목에서는 악기에 관한 다양한 전거(典據)는 물론, 악기 제작 방법⋅조현법⋅연주법 등을 그림으로 그려 상술하였다. 그 중 향악기에 관한 내용은 국악기 연구에 전무후무한 기록으로서 정보의 다양성과 구체성 면에서 국악기에 관한 전 역사상 가장 중요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국악기의 조현법과 연주법, 거문고⋅가야금⋅당비파⋅합자법(合字法) 등의 내용은 음악사의 변천 과정을 살피는 데 가장 중요한 전거이기도 하다. 또한 『악학궤범』에는 삼국 시대 이래 궁중 공연을 통해 전승되어 온 노래들이 기록되었다는 점, 음악뿐 아니라 국가 의례에 소용된 악가무(樂歌舞)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특히 궁중 정재의 공연 내용과 궁중 정재에 소용되는 의복⋅소품 등을 상세히 수록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악학궤범』은 율학(律學)과 율에 관련된 역대의 악론을 소개하고, 조선에서 시행할 국가 의례 음악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다음 세대에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되는 악규(樂規)’를 세밀하게 기록함으로써, 조선 건국 이후 완비한 조선의 예악 문화를 영원히 전승시킬 수 있는 문헌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훌륭한 음악사의 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악학궤범』의 체계와 상세하고 정확한 정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음악 관련 기록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악학궤범』권6의 편찬과정 소고」,『음악과 민족』12,로버트 프로봐인 지음, 정영진 옮김,민족음악학회,1994.
「『악학궤범』의 음악사적 조명-인용기사를 중심으로-」,『진단학보』77,송방송,진단학회,1995.
「악학궤범에 대한 연구성과와 그 의의에 관한 일고」,『한국음악연구』21,신대철,한국국악학회,1993.
「악학궤범의 예악론」,『진단학보』77,이범직,,1994.
「악학궤범 사상체계의 형성 배경과 성격」,『한국음악사학보』33,이숙희,한국음악사학회,2004.
「『악학궤범』의 칠지」,『한국음악연구』33,황준연,,2003.
저서
『악학궤범 악론 연구』, 남상숙, 민속원, 2009.
『악학궤범의 악조 연구』, 남상숙, 신아출판사, 2002.
『한국음악논전』, 손태룡, 영남대학교 출판부, 2002.
『악학궤범』, 이혜구, 국립국악원, 2000.
『악학궤범』, 진단학회, 일조각,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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