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李生)은 거친 들판에 숨어서 겨우 목숨을 보전하다가, 도적이 이미 다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님이 사시던 옛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 집은 이미 싸움 통에 불타 없어졌다. 또 최랑의 집에도 가 보았더니 행랑채는 황량했으며, 쥐와 새들의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이생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작은 누각으로 올라가서 눈물을 거두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날이 저물도록 우두커니 홀로 앉아 지나간 일들을 생각해 보니 완연히 한바탕 꿈만 같았다.
이경(二更)
오후 9시경부터 11시경 사이
쯤 되자 희미한 달빛이 들보를 비춰 주는데 낭하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멀리서부터 차츰 가까이 다가왔는데 이르고 보니 바로 최랑이었다. 이생은 그가 이미 죽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너무도 사랑하는 마음에 의심하지도 않고 물어 보았다. “당신은 어디로 피난 가서 목숨을 보전하였소?” 여인이 이생의 손을 잡고 한바탕 통곡하더니, 이내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저는 본디 양가의 딸로서 어릴 때부터 가정의 교훈을 받아 수놓기와 바느질에 힘썼고, 시서(詩書)와 예법을 배웠어요. 그래서 규방의 법도만 알 뿐이지, 그 밖의 일이야 어찌 알겠어요? 마침 당신이 붉은 살구꽃이 핀 담 안을 엿보았으므로, 제가 푸른 바다의 구슬을 바친 거지요. 꽃 앞에서 한 번 웃고 평생의 가약을 맺었고, 휘장 속에서 다시 만날 때에는 정이 백 년을 넘쳤었지요.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슬프고도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군요. 장차 백 년을 함께하자고 하였는데, 뜻밖에 횡액을 만나 구렁에 넘어질 줄이야 어찌 알았겠어요? 늑대 같은 놈들에게 끝까지 정조를 잃지 않았지만, 제 몸은 진흙탕에서 찢겨졌답니다. 천성이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지, 인정으로야 어찌 그럴 수 있었겠어요? 저는 당신과 외딴 산골에서 헤어진 뒤에 짝 잃은 새가 되었었지요. 집도 없어지고 부모님도 돌아가셨으니, 피곤한 혼백을 의지할 곳도 없는 게 한스러웠답니다. 절의(節義)는 중요하고 목숨은 가벼우니, 쇠잔한 몸뚱이일망정 치욕을 면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지요. 그러나 마디마디 끊어진 제 마음을 그 누가 불쌍하게 여겨 주겠어요? 한갓 애끊는 썩은 창자에만 맺혀 있을 뿐이지요. 해골은 들판에 내던져졌고 간과 쓸개는 땅바닥에 널려졌으니, 가만히 옛날의 즐거움을 생각해 보면 오늘의 슬픔을 위해 있었던 것 같군요. 이제 봄바람이 깊은 골짜기에 불어오기에, 저도 이승으로 돌아왔지요. 봉래산 12년의 약속이 얽혀 있고 삼세(三世)의 향이 향기로우니, 오랫동안 뵙지 못한 정을 이제 되살려서 옛날의 맹세를 저 버리지 않겠어요. 당신이 지금도 그 맹세를 잊지 않으셨다면, 저도 끝까지 잘 모시고 싶답니다. 당신도 허락하시겠지요?“
이생이 기쁘고도 고마워하며 말하였다. “그게 애당초 내 소원이오” 그러고는 서로 정답게 심정을 털어 놓았다. 재산을 얼마나 도적들에게 빼앗겼는지 이야기가 나오자 여인이 말하였다. “조금도 잃지 않고 어느 산 어느 골짜기에 묻어 두었답니다” 이생이 또 물었다. “두 집 부모님의 해골을 어디에 모셨소?” 여인이 말하였다. “어느 곳에다 그냥 버려두었지요” 정겨운 이야기를 끝낸 뒤에 잠자리를 같이하였는데, 지극한 즐거움이 예전과 같았다.
이튿날 여인이 이생과 함께 자기가 묻혀 있던 곳을 찾아갔는데, 과연 금과 은 몇 덩어리가 있었고, 재물도 약간 있었다. 또 두 집 부모님의 해골을 거두고 금과 재물을 팔아 각각 오관산 기슭에 합장하였다. 나무를 세우고 제사를 드려 예절을 모두 다 마쳤다.
그 뒤에 이생도 또한 벼슬을 구하지 않고 최씨와 함께 살게 되었다. 목숨을 구하려고 달아났던 종들도 또한 스스로 돌아왔다. 이생은 이때부터 인간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잊어버렸으며, 아무리 친척이나 손님들의 길흉사가 있더라도 방문을 닫아걸고 나가지 않았다. 언제나 최씨와 더불어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금실 좋게 지냈다.
그럭저럭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저녁에 여인이 이생에게 말하였다. “세 번이나 가약을 맺었지만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즐거움이 다하기도 전에 슬프게 헤어져야만 하겠어요” 여인이 목메어 울자 이생이 놀라면서 물었다. “어찌 이렇게 되었소?” 여인이 대답하였다. “저승길은 피할 수가 없답니다. 하느님께서 저와 당신의 연분이 끊어지지 않았고 또 전생에 아무런 죄도 지지 않았다면서, 이 몸을 환생시켜 당신과 잠시라도 시름을 풀게 해 주었지요. 그러나 제가 오랫동안 인간 세상에 머물면서 산 사람을 미혹시킬 수는 없답니다” 그러고는 몸종 향아를 시켜서 술을 올리게 하고는, 「옥루춘곡(玉樓春曲)」에 맞추어 노래 한 가락을 지어 부르며 이생에게 술을 권하였다.
칼과 창이 어우러져 싸움이 가득한 판에
옥 부서지고 꽃 떨어지니 원앙도 짝을 잃었네.
흩어진 해골을 그 누가 묻어 주랴.
피에 젖어 떠도는 혼이 하소연할 곳도 없었네.
무산의 선녀가 고당에 한 번 내려온 뒤에
깨어진 종(鐘) 거듭 갈라지니 마음 더욱 쓰라려라.
이제 한 번 작별하면 둘이 서로 아득해질 테니
하늘과 인간 세상 사이에 소식마저 막히리라.
노래를 한마디 부를 때마다 눈물이 자꾸 내려 거의 곡조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생도 또한 슬픔을 걷잡지 못하며 말하였다. “내 차라리 당신과 함께 황천으로 갈지언정 어찌 무료하게 홀로 여생을 보전하겠소? 지난번 난리를 겪고 난 뒤에 친척과 종들이 저마다 서로 흩어지고 돌아가신 부모님의 해골이 들판에 내 버려져 있었는데, 당신이 아니었다면 그 누가 장사를 지내 드렸겠소? 옛사람 말씀에, ‘어버이가 살아계실 때에는 예로써 섬기고, 돌아가신 뒤에는 예로써 장사 지내라’ 하셨는데, 이런 일을 모두 당신이 감당해 주었소. 당신은 정말 천성이 효성스럽고 인정이 두터운 사람이오. 나는 당신에게 고맙기 그지없고,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소. 당신도 인간 세상에 더 오래 머물다가 백 년 뒤에 나와 함께 티끌이 되었으면 좋겠구려”
여인이 말하였다. “당신의 목숨은 아직 남아 있지만, 저는 이미 귀신의 명부(冥府)에 실려 있답니다. 그래서 더 오래 볼 수가 없지요. 제가 굳이 인간 세상을 그리워하며 미련을 가진다면 명부의 법도를 어기게 되니, 저에게만 죄가 미치는 게 아니라 당신에게도 또한 누가 미치게 된답니다. 저의 유골이 어느 곳에 흩어져 있으니, 만약 은혜를 베풀어 주시려면 (그 유골이나 거두어) 비바람을 맞지 않게 해 주세요”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눈물만 줄줄 흘렸다. “낭군님,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말이 끝나자 차츰 사라지더니 마침내 자취가 없어졌다. 이생은 (여인의 말대로) 유골을 거두어 부모님의 무덤 곁에다 장사를 지내 주었다. 장사를 지낸 뒤에 이생도 또한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다가 병을 얻어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마다 가슴 아파 탄식하며 그들의 아름다운 절개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금오신화』, 이생규장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