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전기문화과학 기술의 발달

화약의 사용

검교참찬 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 최무선(崔茂宣)이 졸(卒)하였다. 최무선의 본관은 영주(永州)요, 광흥창사(廣興倉使) 최동순(崔東洵)의 아들이다. 천성이 기술에 밝고 방략(方略)이 많으며, 병법(兵法)을 논하기 좋아하였다. 고려조에 벼슬이 문하부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말하기를, “왜구를 제어함에는 화약(火藥)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다. 최무선은 항상 중국 강남(江南)에서 오는 상인을 보면 곧바로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다. 어떤 상인 한 사람이 대강 안다고 대답하자 자기 집에 데려다가 의복과 음식을 주고 수십 일 동안 물어서 대강 요령을 얻은 뒤, 도당(都堂)에 말하여 시험해 보자고 하였으나, 모두 믿지 않고 심지어 최무선을 사기꾼이라 하면서 험담까지 하였다. 여러 해를 두고 계속해서 의견을 올리자 마침내 국왕이 그 뜻에 감동되어 화약국(火藥局)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제조관(提調官)으로 삼아 마침내 화약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그 화포는 대장군포(大將軍砲)⋅이장군포(二將軍砲)⋅삼장군포(三將軍砲)⋅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㷁)⋅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질려포(蒺藜砲)⋅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주화(走火)⋅촉천화(觸天火) 등의 이름이 있었다. 화포가 만들어지자, 보는 사람이 놀라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또 전함(戰艦)의 제도를 연구하여 도당에 말해서 건조하는 것을 감독하였다.

경신년(庚申年, 1380) 가을에 왜선 300여 척이 전라도 진포(鎭浦)에 침입했을 때 조정에서 최무선의 화약을 시험해 보고자 하여, 그를 부원수에 임명하고 도원수 심덕부(沈德符), 상원수 나세(羅世)와 함께 배를 타고 화구(火具)를 싣고 바로 진포에 이르렀다. 왜구가 화약이 있는 줄을 뜻하지 못하고 배를 한 곳에 집결시켜 힘을 다하여 싸우려고 하였으므로, 최무선이 화포를 발사하여 그 배를 다 태워 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는 육지에 올라와서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노략질하고 도로 운봉(雲峯)에 모였는데, 이때 태조(이성계)가 병마도원수로서 여러 장수와 함께 왜구를 한 놈도 빠짐없이 섬멸하였다. 이로부터 왜구가 점점 덜해지고 항복하는 자가 서로 잇달아 나타나서, 바닷가의 백성이 예전처럼 생업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것은 태조의 덕이 하늘에 응한 까닭이나, 무선의 공 역시 작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개국 후에 늙어서 쓰이지는 못했으나, 임금이 그 공을 생각하여 검교참찬(檢校參贊)을 제수하였다. 최무선이 죽자 임금이 슬퍼하여 후하게 부의(賻儀)하였으며, 신사년(辛巳年, 1401)에 의정부 우정승⋅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으로 추증하였다. 아들이 있으니 최해산(崔海山)이다. 최무선이 임종할 때에 책 한 권을 그 부인에게 주고 부탁하기를, “아이가 장성하거든 이 책을 주라” 하였다. 부인이 잘 감추어 두었다가 최해산의 나이 15세에 약간 글자를 알게 되어 내어 주니, 곧 화약을 만드는 법이었다. 최해산이 그 법을 배워서 조정에 쓰이게 되어, 지금 군기소감(軍器少監)이 되었다.

태조실록』권7, 4년 4월 19일(임오)

병조에서 강원도 감사의 관문에 의거하여 계하기를, “도(道)에서 바치는 염초(焰硝)는 영동 연해(沿海)의 각 고을에서 구워 만드는 것이므로, 이로 인하여 사람마다 그 기술을 전해 배웠습니다. 그러나 간사한 백성이나 주인을 배반한 종들이 무릉도(茂陵島)나 대마도 등지로 도망하여 가서 화약을 만드는 비술(秘術)을 왜인에게 가르치지나 않을까 염려되오니, 이제부터는 연해의 각 수령들로 하여금 화약을 구워 만들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권34, 8년 12월 13일(임신)

檢校參贊門下府事崔茂宣卒. 茂宣, 永州人, 廣興倉使東洵之子. 性巧慧多方略, 喜談兵法. 仕前朝, 官至知門下府事. 嘗曰: “制倭寇莫若火藥, 國人未有知者” 茂宣每見商客自江南來者, 便問火藥之法. 有一商以粗知對, 請置其家, 給養衣食, 累旬諮問, 頗得要領, 言於都堂欲試之, 皆不信, 至有欺詆. 茂宣積以歲月, 獻計不已, 卒以誠意感之, 乃許立局, 以茂宣爲提調官, 乃得修鍊火藥. 其具有大將軍, 二將軍, 三將軍, 六花石砲, 火砲, 信砲, 火㷁, 火箭, 鐵翎箭, 皮翎箭, 蒺藜砲, 鐵彈子, 穿山五龍箭, 流火, 走火, 觸天火等名. 旣成, 觀者莫不驚嘆. 又訪求戰艦之制, 言於都堂, 監督備造. 及庚申秋, 倭寇三百餘艘至全羅道鎭浦, 朝議崔公火藥, 今可試矣. 乃命爲副元帥, 與都元帥沈德符, 上元帥羅世, 乘船齎火具, 直至鎭浦. 寇不意有火藥, 聚船相維, 欲盡力拒戰, 茂宣發火具盡燒其船. 寇旣失船, 遂登岸刼掠全羅以至慶尙, 還聚于雲峰. 上時爲兵馬都元帥, 與諸將殲盡無遺. 自爾倭寇漸息, 乞降者相繼, 濱海之民, 復業如舊. 雖由上德應天之所致, 茂宣之功, 亦不小矣. 至國初, 以年老未見用, 上念其功, 授檢校參贊. 及卒, 上嗟悼, 賻以厚, 歲辛巳, 追贈議政府右政丞, 永城府院君. 子海山. 茂宣臨卒, 以一卷書屬其夫人曰: “待兒長, 以此與之” 夫人藏之甚密, 及海山年十五稍識字, 出而與之, 乃火藥修鍊之法. 海山學其法見用, 今爲軍器少監.

『太祖實錄』卷7, 4年 4月 19日(壬午)

兵曹據江原道監司關啓: “道貢焰(焇)〔硝〕, 曾於嶺東沿海各官煮取, 因此每人傳習, 慮有奸民及背主奴僕, 逃往茂陵, 對馬等島, 將火藥秘術, 敎習倭人. 自今沿海各官, 勿令煮取” 從之.

『世宗實錄』卷34, 8年 12月 13日(壬申)

이 자료 중 상단은 고려 말 조선 초 화약 개발에 공이 있는 최무선(崔茂宣, 1325~1395)이 사망한 후 작성된 그의 일대기이고, 하단은 1426년(세종 8년) 화약 제조 기술이 유출되지 못하도록 대책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고려 말 화기의 전래와 제조는 왜구 격퇴와 관련이 깊다. 고려 후기 사회는 왜구의 침구로 인해 어려움이 컸다. 왜구가 『고려사』에 등장하는 것은 1223년(고종 10년)의 일이었다. 그 후 1350년(충정왕 2년) 이후에는 출현하는 빈도수가 높아지고 피해 규모도 극심해지기 시작한다. 특히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대의 왜구는 대규모 집단을 이루어 남해 연안까지 출몰했으며, 활동 범위도 확대되어 강화와 개경 근처까지 진출하였다. 조정에서는 왜구의 잦은 출몰로 골치를 앓았으나 마땅히 근절시킬 만한 방법이 없었다.

최무선은 고려 말 현재의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원기리 마단촌에서 광흥창사를 지낸 최동순(崔東洵)의 아들로 태어났다. 왜구의 침입이 극심한 시기에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최무선은 일찍부터 왜구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화약이 필수적임을 인식하고 화약 제조에 관심을 두었다. 위 사료에 따르면 최무선은 화약 제조법을 배우기 위해 중국 강남에서 오는 상인을 수소문하여 만났으며, 꾸준히 그에게 접근하여 화약 제조 비법을 배웠다고 되어 있다. 한편『고려사』우왕 3년(1377) 겨울 10월 기사에서는 이 중국인이 원나라 출신의 염초장(焰硝匠) 이원(李元)이며, 최무선과 그와 같은 마을에 살아 화약 제조법을 배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무선은 화약 제조 기술을 습득한 후 화통도감의 설치를 건의하였으나, 관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건의는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조정에 받아들여져 화약국을 설치하고 화약을 생산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화약 병기는, 1104년(숙종 9년) 여진 정벌을 위해 11개 특수 부대로 설치한 별무반 중에 발화(發火)라는 부대가 존재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당시에 이미 전래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화약과 화기를 독자적으로 제조하기 시작한 시기는 최무선의 건의에 따라 화통도감이 설치된 1377년(우왕 3년) 이후이다. 화약 제조에 성공함으로써 화통도감을 맡게 된 최무선은 곧 화약을 넣어서 발사할 수 있는 화포 제작에 착수하여 다양한 화포를 개발하였다. 이렇게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과 화포는 고려 후기 왜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최선책의 하나였다. 고려군은 최무선의 화약과 화포로 1380년(우왕 6년)의 진포 싸움과 1383년(우왕 9년)의 진도 싸움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칠 수 있었다.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왕조 교체의 틀을 마련한 운봉 대첩도 화포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왕조 교체를 이룬 뒤 화기를 이용해 반대 세력이 봉기할까 두려워 화기의 발달을 억제하였다. 그리하여 이성계 집권 직후 화통도감은 폐지되면서 화약 제조 기술은 잠시 침체되었다가,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의 장려책과 최무선의 아들인 최해산(崔海山)의 노력으로 재개되었다. 이후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대에는 사정(射程) 거리 증가, 일발다전(一發多箭) 기술 개발, 신기술에 의한 기존 화기 성능 개선, 사격술 개량 등이 이루어지는 등 화기의 성능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 같은 화기의 발달은 왜구의 억제뿐 아니라 여진 정벌과 서북 변경을 개척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화약 병기가 최대한의 위력을 발휘하려면, 먼저 화약의 우수한 품질과 충분한 보급이 보장되어야 한다. 조선은 국초부터 훈련과 실전에 소모되는 화약이 부족하여 많은 곤란을 겪었다. 조선 초기의 화약은 목탄, 유황, 염초 등 3가지 원료로 만들어졌다. 목탄은 손쉽게 확보했고, 유황도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충분히 조달되었다. 그러나 화약을 제조할 때 가장 많이 필요한 염초(KNO3)는 특수한 토양에서만 채취되었으므로 생산이 용이하지 않았다. 따라서 위의 3가지 원료를 적당한 비율로 배합하여 화약을 제조하는 방법과 흙속에 포함된 염초를 대량으로 추출할 수 있는 능력은 화기의 발달과 보급을 좌우하는 중요한 기술적 요인이었다.

세종 대 전반의 염초 생산 실태를 보면, 당시 중앙은 군기시에서 염초와 화약을 생산했고, 지방은 염초만 생산해서 군기시로 보냈다. 화약 원료의 배합 비율 및 배합 방법을 군기시에서 독점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는 화약 제조 기술이 상대적으로 보안이 허술한 해안 지역을 통해 일본으로 유출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생산되는 염초는 중앙에서 감독 관리를 파견해 공동 작업장인 도회소를 설치하여 제조하는 방식과 군현 단위로 제조량을 나누어 정한 뒤 상공으로 바치게 하는 방식을 통해 조달되었다. 전자의 방식을 따르면 국가가 염초 제조 기술을 확실히 독점할 수 있었으나 생산량이 한정되고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들이 염초가 포함된 흙을 모을 때 백성을 괴롭히는 사례가 자주 일어났다. 반면 후자의 방식은 염초 제조 기술의 보급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생산량이 증가하는 장점이 있었지만, 기술이 일본으로 새어 나갈 위험이 있었다. 이 때문에 대체적으로 조선 전기의 염초 생산은 국가의 엄격한 통제하에 자급자족의 생산 체제를 유지하였다.

조선 시대 화약 만드는 방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는 화약의 초석이 되는 원재료를 구하는 단계, 두 번째는 원재료에서 초석을 추출하는 단계, 마지막으로 뽑아 낸 초석에 유황과 목탄을 비율에 맞게 섞는 단계이다.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첫 번째 단계인 원재료를 구하는 것으로, 이것을 취토법(取土法)이라고 한다. 화약에 사용되는 흙은 아무 흙이나 되는 것이 아니고 주로 사람들이 사는 집의 화장실 근처나 부엌, 마루 아래 등 조금은 애매한 곳의 흙이 쓰였다. 왜냐하면 화약의 초석이 되는 것은 함토(짠 흙)와 엄토(매운 흙)라서 주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일종의 숙성 과정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흙을 구하러 다니는 취토군들은 좋은 화약 재료를 얻기 위해 삽과 곡갱이로 온 집 안을 뒤집어 놓았다. 당시 화약에 사용될 흙을 퍼가는 것을 거부하거나 방해할 경우, 군법으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삭탈관직 및 중벌에 처하도록 했다. 화약 제조와 관련해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 대에는 훈련도감에서 직접 나서 각부(各部), 각리(各里)에 귀천에 상관없이 호수(戶數)를 계산해 기본적인 채취량을 결정하고, 이를 집의 크기와 비교해 해당 집에서 얻어야 할 초석의 양을 책자로 만들어 매월 말마다 훈련도감에 보고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만약 해당 관리가 호수를 누락하거나 특별히 세도가의 집을 제외했을 때는 죄를 무겁게 다스렸고, 파내도록 허락하지 않은 집주인에게는 더욱 무거운 벌이 내려졌다. 이렇게 모든 집에서 초석에 들어갈 흙을 채취해도 부족할 때는 국왕이 거처하는 궁궐의 흙을 파내기도 했다.

화약 제조의 두 번째 단계는 구해 온 흙과 곱게 태운 재를 섞어서 물에 녹이는 과정으로 이것을 ‘사수’라고 부른다. 사수를 통해서 초석과 재가 잘 녹은 특별한 물을 만드는데, 이것을 가마솥에 부어 끓였다가 식히면 고운 침전물이 생긴다. 이 침전물을 따라 모아 끓이다가 끈적끈적한 아교와 섞기를 반복하면 화약의 기본 재료인 순수한 초석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과정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라 좋은 초석 재료를 힘들게 구해 놓고도 허사가 되는 일이 잦았다. 이는 수십 칸의 임시 건물을 지어도 모두 수용할 수 없을 만큼 원재료의 양이 너무 많아서 생기는 문제였다. 건물 안에 들이지 못하는 원재료는 뜰에 거적을 씌워 보관했는데, 눈비라도 맞게 되면 대부분 흙의 성질이 바뀌어 좋은 초석을 얻지 못했다. 한 줌의 화약 재료를 위해 몇 수레의 흙이 필요했으니, 그 쌓아 올린 흙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보통 화약을 만드는 염초청은 각 군영에 하나씩 있었다. 훈련도감의 경우 서울 동부 마전교 개울의 남변에 있었다. 그곳에 소속된 염초장인들은 행여나 눈이나 비가 오면 초석의 성질이 바뀔까 노심초사하며 흙더미 곁을 떠나지 못했다. 물론 특단의 조치로 역적으로 몰린 사람들의 가산을 모두 거둬 이곳에 쏟아 붓기도 했는데, 늘 일정 정도 이상의 화약을 전국에 보급해야 하는 상황이라 이런 조치도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화약 제조의 마지막 단계는 순수한 초석인 정초를 터지는 성질로 전환시키기 위해 유황과 재를 섞어 화약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이것을 ‘도침’이라고 부르는데, 이 과정에서 비율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화약의 성능이 좌우되었다. 이 과정 또한 지루한 작업의 연속이었다. 정초에다 유황, 숯, 쌀뜨물을 부어 밀가루 반죽처럼 만든 후 절구에 넣고 하루 종일 방아를 찧어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심한 충격을 받을 경우 자체 발화하거나 폭발할 위험이 있었기에 중간 중간 물을 조금씩 부어 사고를 예방하였다. 이렇게 곱게 찧어 밀가루 반죽처럼 부드럽게 되면 그것이 바로 화약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화약이 만들어지면 사각형으로 낱개 포장을 해서 그 위에 만든 장인의 이름을 쓰게 했다. 만약 만든 후 5년 안에 화약이 맹렬하게 터지지 않을 경우 이를 만든 장인은 곤장을 맞기도 했다.

이러한 화약 제조와 화기에 대한 관심으로 세종 전기에는 화기의 개량과 신발명에 큰 진척이 있었다. 대포인 완구의 개량, 신호탄인 발화와 신포 사용, 가지고 다니는 소화포와 상양포의 출현, 철탄자의 사용 등이 그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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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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