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전기문화성리학의 발달

양명학 비판

『전습록』은 왕양명(王陽明)의 문인이 그 스승의 말을 기록한 것인데, 이제 몇 단락을 들어 변론하여 그 나머지를 포괄한다. ……(중략)……

서애(徐愛)가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에 대하여 묻기를, “사람이 아비에게는 마땅히 효도하고 형에게는 마땅히 공경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효도하지 못하고 공경하지 못하니, 이것은 지와 행이 분명히 2가지인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것은 벌써 사의(私意)에 막히고 단절된 것이고, 지행(知行)의 본체가 아니다. 성현이 사람에게 지행을 가르치는 것은 바로 그 본체를 회복시키려는 것이다. 『대학』에 아름다운 여색(女色)을 좋아하듯이 하라고 하였다” 하였다.

변론은 다음과 같다. 양명이 말하기를, “요즘 사람은 우선 강습하고 토론하여 참을 알기를 기다려서 바야흐로 행(行) 공부를 하려 하니, 결국 종신토록 행하지도 못하고 종신토록 알지도 못한다” 하였는데, 이 말은 말학(末學)들의 한갓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것만 일삼는 폐단에 딱 들어맞는다. 그러나 이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억지로 천착(穿鑿)하여 지행합일이라는 이론을 만들어 내었는데, 이 조항에 대해 비록 지극히 자세하게 변론하였으나 말이 공교할수록 뜻이 더욱 멀어짐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호색(好色)을 보고 악취(惡臭)를 맡는 것을 지(知)에 소속시키고, 호색을 좋아하고 악취를 싫어하는 것을 행(行)에 소속시켰다. 그러고는 “보고 맡을 때에 이미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지, 본 뒤에 다시 마음을 세워 좋아하는 것이 아니며 맡은 뒤에 다시 마음을 세워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이것으로 지행합일의 증거를 삼았으니, 그럴 듯하다.

그러나 양명은 진실로, 사람이 선(善)을 보고 좋아하는 것이 과연 호색을 보고 저절로 좋아하는 진실과 같다고 생각하는가. 사람이 불선을 보고 싫어하는 것이 과연 악취를 맡고 저절로 싫어하는 진실과 같다고 생각하는가.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나는 덕을 좋아하기를 색을 좋아하듯 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하고, 또 “나는 불인(不仁)을 미워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대개 사람의 마음이 형기(形氣)에 발하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알고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능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있는 곳에 표리(表裏)가 한결같다. 따라서 호색을 보기만 하면 곧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서 마음에 진실로 좋아하고, 악취를 맡기만 하면 곧 나쁘다는 것을 알아서 마음에 진실로 싫어하니, 행이 지에 붙어 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의리에서는 그렇지 않다. 배우지 않으면 알지 못하고 힘쓰지 않으면 능하지 못하여, 겉으로 행하는 것이 반드시 내면에 진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선을 보고도 선인 줄 알지 못하는 자가 있으며, 선임을 알고도 마음으로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으니, 선을 본 때에 이미 스스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불선을 보고도 싫어할 줄 알지 못하는 자도 있으며, 악임을 알고도 마음으로 싫어하지 않는 자가 있으니, 악을 안 때에 이미 스스로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대학(大學)』에서 저 표리여일(表裏如一)한 호오(好惡)를 빌려서 배우는 자들에게 자기를 속이지 말도록 권면한 것은 옳지만, 양명이 저 형기의 하는 바를 끌어 대어 의리의 지행에 대한 설을 밝히려 한 것은 대단히 옳지 않다. 그러므로 의리의 지행을 합하여 말하면 참으로 서로 필요하고 병행하여 한쪽이 없어서는 안 되지만, 나누어 말하면 지를 행이라 할 수 없는 것은 행을 지라 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어찌 합하여 하나라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성현의 학문은 마음에 근본 하여 사물에 관철되므로, 선을 좋아하면 마음으로 좋아할 뿐 아니라 반드시 행하는 일에서 그 선을 이루려 하기를 마치 호색을 좋아하여 반드시 구하여 얻는 것처럼 하며, 악을 싫어하면 마음으로 싫어할 뿐 아니라 반드시 행하는 일에서 그 악을 제거하려 하기를 마치 악취를 싫어하여 결단코 없애려고 힘쓰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양명의 소견은 오로지 본심에 있어 조금이라도 밖으로 사물에 관련될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다만 본심에 나아가 지행을 하나로 인식하여 혼합하여 말한 것이다. 만일 그의 주장대로 오로지 본심만 일삼고 사물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마음이 실로 호색을 좋아하면 비록 장가들지 않고 인륜을 폐하더라도 호색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마음이 실로 악취를 싫어하면 비록 불결한 것을 몸에 뒤집어쓰더라도 악취를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양명도 자신의 주장이 편벽됨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지행을 나누지 않는 것을 지행의 본체라 하고, 지행을 나누는 것을 사의(私意)에 막히고 단절되었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옛 성현이 지행에 대하여 말한 것이 모두 사의란 말인가. “아픈 줄 알면 이미 아파하고 추운 줄 알면 이미 추워하고 주린 줄 알면 이미 배고파한다”라고 한 것은 그 말이 또한 공교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픔과 굶주림과 추위는 몸과 마음이 접합되는 일로써 상황에 따라 명명될 수 있는 것일 뿐 의리의 지행(知行)을 이르는 것은 아니다. 아픈 줄 알면 합당하게 처리해야 아픔의 지행이라 할 수 있고, 굶주리고 추운 줄 알면 합당하게 처리해야 굶주림과 추위의 지행이라 할 수 있다. 만일 단지 아파하기만 하는데 행이라고 한다면 행하는 것은 혈기일 뿐 의리는 아니며, 단지 배고파하고 추워하기만 하는데 행이라고 한다면 행하는 것은 인심일 뿐 도심이 아니다. 게다가 아프면 아픈 줄 알고 굶주리고 추우면 배고파하고 추워할 줄 아는 것은 길 가는 사람이나 걸인이나 금수도 다 할 수 있으니, 이러한 것을 지행이라 한다면 학문하는 것이 무엇이 귀하겠는가. 무릇 아픔과 가려움을 알고 굶주림과 배부름을 아는 것을 성(性)이라 한 것은 본래 고자(告子)의 “생의 본능을 성이라 한다[生之謂性]”는 설에서 나왔는데, 양명의 소견이 바로 여기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여 그 변설을 꾸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형기의 욕구에는 베풀 수 있지만 의리의 지행에는 비유할 수 없다. 그러므로 효(孝)와 제(弟)에 대해서는 “효도를 알면 이미 효도하고 공경을 알면 이미 공경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다만 “사람들 중에 효도를 칭찬하고 공경을 칭찬하는 자는 반드시 이미 효도를 행하고 공경을 행한다”라고 하였으니, 앞뒤의 말뜻이 서로 부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끝에 가서 “옛사람이 그러므로 이미 지를 말하고 또 행을 말한 것이다”라고 한 대목에서는 예전대로 둘로 나누어 말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는 도리가 본래 이와 같아서 끝내 혼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퇴계선생문집』권41, 잡저, 전습록논변

傳習錄論辯【傳習錄, 王陽明門人記其師說者, 今擧數段而辯之, 以該其餘】. ……(中略)……

徐愛問知行合一之說曰, 人有知父當孝兄當弟者, 卻不能孝不能弟, 是知與行, 分明是兩件. 曰, 此已被私意隔斷, 不是知行的本體了. 聖賢敎人知行, 正是要復那本體. 大學說如好好色云云.

辯曰. 陽明謂今人且講習討論, 待知得眞了, 方做行的工夫, 遂終身不行, 亦遂終身不知. 此言切中末學徒事口耳之弊. 然欲救此弊, 而强鑿爲知行合一之論, 此段雖極細辯說, 言愈巧而意愈遠, 何也. 其以見好色聞惡臭屬知, 好好色惡惡臭屬行. 謂見聞時已自好惡了, 不是見了後又立箇心去好, 不是聞了後別立箇心去惡. 以此爲知行合一之證者似矣. 然而陽明信以爲人之見善而好之, 果能如見好色自能好之之誠乎. 人之見不善而惡之, 果能如聞惡臭自能惡之之實乎. 孔子曰, 我未見好德如好色者, 又曰, 我未見惡不仁者. 蓋人之心發於形氣者, 則不學而自知, 不勉而自能, 好惡所在, 表裏如一. 故才見好色, 卽知其好而心誠好之, 才聞惡臭, 卽知其惡而心實惡之, 雖曰行寓於知, 猶之可也. 至於義理則不然也. 不學則不知, 不勉則不能, 其行於外者, 未必誠於內. 故見善而不知善者有之, 知善而心不好者有之, 謂之見善時已自好, 可乎. 見不善而不知惡者有之, 知惡而心不惡者有之, 謂之知惡時已自惡, 可乎. 故大學, 借彼表裏如一之好惡, 以勸學者之毋自欺則可, 陽明乃欲引彼形氣之所爲, 以明此義理知行之說則大不可. 故義理之知行, 合而言之, 固相須竝行而不可缺一, 分而言之, 知不可謂之行, 猶行不可謂之知也, 豈可合而爲一乎. 且聖賢之學, 本諸心而貫事物, 故好善則不但心好之, 必遂其善於行事, 如好好色而求必得之也, 惡惡則不但心惡之, 必去其惡於行事, 如惡惡臭而務決去之也. 陽明之見, 專在本心, 怕有一毫外涉於事物. 故只就本心上認知行爲一, 而衮合說去. 若如其說, 專事本心而不涉事物, 則心苟好好色, 雖不娶廢倫, 亦可謂好好色乎. 心苟惡惡臭, 雖不潔蒙身, 亦可謂惡惡臭乎. 陽明亦自知其說之偏. 故以不分知行爲知行本體, 以分知行爲私意隔斷, 然則古聖賢爲知行之說者, 皆私意耶. 至如知痛已自痛, 知寒已自寒, 知饑已自饑, 其爲說亦可謂巧矣. 然痛與饑寒, 乃身心所値之事, 緣境而得名者耳, 非義理知行之稱也. 知疾痛而處得其道, 方可謂疾痛之知行, 知饑寒而處得其道, 方可謂饑寒之知行. 若但痛而謂之行, 則所行者血氣耳, 非義理也, 若但饑寒而謂之行, 則所行者人心耳, 非道心也. 且痛而知痛, 饑寒而知饑寒, 塗人乞人與禽獸皆能之, 若是而可謂之知行, 何貴於學問爲哉. 夫以知痛痒識饑飽爲性, 此本出於告子生之謂性之說, 陽明所見, 正慣於此, 故信口說出, 以飾其辯. 然而其說但可施於形氣之欲, 而不可喩於義理之知行. 故於孝於弟, 不曰知孝已自孝, 知弟已自弟, 但曰人之稱孝稱弟者, 必已行孝行弟, 則與前後語意, 不相諧應. 終言古人所以旣說知又說行處, 未免只依舊分作兩箇說, 蓋道理本如此, 終衮合不得故也.

『退溪先生文集』卷41, 雜著, 傳習錄論辯

이 사료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만년에 저술한 것으로, 정통 주자학의 입장에서 양명학을 선학(禪學)으로 지칭하여 이를 변척(變斥)하였다. 퇴계의 변척으로 한국 양명학은 구한말까지 이단사설(異端邪說)로 배척 받았다. 퇴계는 『전습록(傳習錄)』을 각 조목으로 나누어 비판했다, 먼저 왕양명(王陽明)의 ‘친민설(親民設)’을 비판한 데 이어 ‘심즉리설(心卽理說)’을 비판하였다. 또한 왕양명이 정주의 객관적 규범과 형식을 비판하고, 마음만을 내세우는 불교의 선학에 빠졌다고 비판하였다. 마지막으로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비판하였다. 이 사료는 「전습록논변」 중 지행합일설에 대한 비판에 해당한다.

당시는 훈구 세력의 부패와 부조리에 맞서 신진 세력으로 등장한 사림파가 ‘도학’ 운동을 중심으로, 주자학 이외의 것은 모두 배척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중종(中宗, 1488~1544) 대에는 사화를 겪으면서 대내외적으로 조선조 정주학이 심화되어 가고 도학 운동이 지속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서적의 수입, 명나라가 조선에 보내는 조사(詔使) 중 왕양명 문하에 속한 사람과의 접촉, 대명사행에 의한 중국 현지에서의 왕학자(王學者)와의 접촉 등으로 명학, 양명학이 전래되고 있었다.

주자학을 정학으로 삼고 사화의 위기를 극복하기 시작하던 사림은 불교의 부활과 양명학의 전래라는 새로운 사상적 도전을 중대한 문제로 인식하고 대응하였다. 문정왕후 사후 보우(普雨, 1509~1565)의 사사로 불교와의 투쟁을 마무리 지었던 사림은 명이라는 큰 힘을 바탕으로 한 양명학의 도전에 대해서도 주자학을 정학으로 천명하며 강력히 대응하였다. 다양한 인식이 공존하던 16세기 조선의 사상계는 점차 양명학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붕당정치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이데올로기적 선명성은 매우 중요한 무기였다. 이단의 도전으로 인한 위기의식과 붕당정치의 주도권을 획득할 필요성에서 양명학에 대한 배척의 논리가 개발되었고, 이를 위한 적극적인 활동이 전개되었다. 양명학 배척의 논리를 가장 치밀하게 준비했던 이가 바로 퇴계다.

퇴계양명학을 변척한 이유는 크게 2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양명학주자학을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정통 주자학자 퇴계가 자신의 학문을 비판하는 양명학을 부정한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주자학의 학문적 성과가 두드러지는 시기에 주자학의 역사적 한계성을 비판하고 대두한 양명학이 조선에 전래되어 수용되면서 주자학의 정통성 확보와 주자학을 바탕으로 하는 체제 옹호의 필요성이 요구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양명학에 대한 변척의 논리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당시는 조선 건국 후 주자학을 바탕으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의 정통성을 확보하였으나, 이는 대체로 인간의 도덕성 함양보다는 국가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문물제도 확립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후 세조(世祖, 재위 1455~1468)의 왕위 찬탈 사건과 사화(士禍) 등 통치자의 도덕성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퇴계는 통치자의 도덕성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 즉 도학 정치의 제도적 장착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이후 명을 배경으로 한 양명학의 등장은 이러한 도학 정치 및 주자학 중심의 학문 체계를 크게 위협하였다. 특히 임진왜란을 전후해 조선에 왔던 중국 사신이나 장수들 가운데 양명학자들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명학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는 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남언경(南彦經, ?~?), 이요(李橈, ?~?), 박세당(朴世堂, 1629~1703), 윤휴(尹鑴, 1617~1680), 장유(張維, 1587~1638), 최명길(崔鳴吉, 1586~1647) 등이었다. 이처럼 양명학이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양명학에 호감을 보이는 학자들도 일부 있었다.

그러나 퇴계양명학을 비판하는 글을 몇 편 쓰자 그 뒤를 이어 퇴계 문하에서도 적극적으로 양명학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퇴계의 이단 변척은 명종(明宗, 재위 1545~1567) 초부터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으며, 명종 말의 일련의 변척서는 그 종합이요 결실이었다. 명종 대를 통해 전개된 이단 변척의 주요 대상이 불교였음에도 불구하고 명종퇴계의 이단 변척은 대부분 양명학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는 명종 대에 상당한 정도로 양명학이 보급되었음을 의미한다. 현실적으로 남언경 중심의 근기(近畿, 기호 지방) 사림 계통에서 양명학이 수용되었고, 선조 5~6년간에 이미 남언경의 문하에 문생이 몰려들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양명학을 비판하는 내용은 대부분 양명학이 불교의 선종에 가깝기 때문에 유학의 전통을 이은 것이 아니며, 특히 인간의 도덕성을 부정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을 겪고 난 후 조선 후기에 이르면 당파 싸움이 격렬해지면서 자신의 학문이 순수한 주자학에 가깝다는 것을 앞 다투어 드러내게 되었다.

인간을 설명할 때 양명학은 마음이 곧 만물의 이치라는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했고, 주자학은 인간의 본성이 곧 하늘이 내려준 이치라는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하였다. 마음이 감정까지 포함한 넓은 개념이라면 본성은 마음의 본질을 가리킨다. 정제두는 인간의 본성은 그 자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에서 마음을 통해 드러난다고 보았다. 즉, 본성이 마음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실현은 마음의 움직임을 통해 나타난다고 하였다.

퇴계양명학을 비판한 논거는 성현에 대한 모독, 객관적 사물 세계와 그 원리에 대한 부정, 인간의 사회질서이자 도덕성의 근본인 인륜의 부정, 물리와 천리에 대한 공정하고 객관적인 탐구의 부정, 선학처럼 본심에 치중하는 것, 초월적이고 현묘한 경지를 직각적으로 추구하여 절차를 무시하는 공부 방법 등에 있었다. 양명학에 대한 배척은 퇴계 이후 그의 문하생에 의해 계속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조목(趙穆, 1524~1606)과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었다. 조목은 백사를 선학이라고 비판하고 양명학을 편벽하다고 비난하였다. 또한 유성룡은 왕양명이 양지로 학을 삼았으나 석(釋)씨의 설에 가깝다고 했으며 본심을 위주로 하는 양명학을 배척하였지만, 퇴계의 변척 논리에서 발전된 측면을 찾을 수 없는 주장을 반복하였다. 퇴계는 왕양명의 언급이 한정된 의미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언급은 왕양명의 입장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길로 풀어 가려는 것이 아니라 주자학의 체계를 표준으로 정립하려는 입장에서 양명학이 지니는 한계를 규정하고, 나아가 근원적 오류를 지니는 것으로 비판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따라서 왕양명의 어떠한 견해도 끝내는 비판과 배척의 대상이며, 수용의 여지는 없었다.

중국에서는 왕양명이 문묘에 종사될 정도로 양명학이 적극 수용되고 확산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퇴계의 변척을 기점으로 양명학이 한결같이 배척되었다. 이는 주자학의 학문적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의도 뿐만 아니라 중국과는 다른 16세기 조선의 역사적 상황에서 주자학의 정치적 위상, 즉 도학 정립를 바탕으로 한 체제 옹호적인 성격이 함께 작용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의 동향에서 그 중심은 퇴계가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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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의 이단관과 양명학 비판 연구」,『한국민족문화』21,민혜진,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2003.
「왕양명 심학의 이중성과 퇴계 심학」,『퇴계학보』120,이상익,퇴계학연구원,2006.
「퇴계의 ‘경의 심학’과 양명의 ‘양지 심학’-퇴계선생언행록과 전습록의 언행 비교를 겸해서-」,『한국의 철학』41,최재목,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2007.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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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과 16세기 유학』, 정도원, 문사철,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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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사단칠정론,성학십도,무진육조소』, 최영진, 살림, 2007.
편저
「양명학의 전래와 연구」, 송석준, 국사편찬위원회, 2003.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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