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정치통치 체제의 변화

지방군의 개편-속오군

비변사가 아뢰기를,

“황해의 전 병사(兵使) 조인득(趙仁得, ?~1598)의 말을 들으니, 그가 본도에 있을 적에 우수하고 용맹한 병사들을 선발하였는데 그 수가 4000명이어서 급할 때에 충분히 사용할 만하며, 그 중에는 재주를 완전히 익힌 포수(砲手)도 수백 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조인득은 비록 체직되어 왔지만 새 병사 이경준(李慶濬, 1561~?)이 반드시 그 군사를 버리지 않고 조련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임진년 이래 군사를 일으킨 뒤로 사졸들이 패퇴하여 흩어지기를 잘 하는 것을 보고 하는 말이 ‘우리나라 군사는 본래 나약하고 겁이 많아 아무리 조련시켜도 전쟁터에서는 쓰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이러한 논의가 한 번 행해지자 한 사람이 선창하면 백 사람이 화답하듯 하여, 군사를 조련하는 것이 쓸데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수령 중에 스스로 높은 식견이 있다고 여기는 자는 더욱 군병(軍兵)을 조련하는 일은 생각지도 않으니, 깨우치기 어려운 습속과 태만한 인심이 이와 같으므로 참으로 한심합니다.

……(中略)…… 병사의 강함과 약함, 용맹함과 겁이 많음은 장수가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군졸이 궤멸하여 흩어지지 않게 하는 가장 긴요한 것은 오직 ‘속오(束伍)’에 있으니, 『기효신서(紀效新書)』 중에 장수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논한 말이 많지만 그 요점은 모두 ‘속오’ 한 편에 들어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군졸만 많이 모아 놓으면 적을 방어하는 줄로 아는데, 대오를 결속하고 부대를 나누는 법은 모르기 때문에 질서가 어긋나고 문란해져서 두서가 없습니다. 이러한 군대로써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에 임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사졸이 쉽게 무너지는 것은 그 죄가 사졸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장수에게 있는 것이니, 그때는 속오의 법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황해도의 4000 정병이 아무리 날래고 강하다 해도 만일 숫자만 믿고서 그 전처럼 어수선하고 대오를 결속하지 않는다면 위급할 때에 역시 사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경준이 이제 막 병사가 되어 그 책임을 맡았는데, 군대를 다스리는 일에 염려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조정에서는 다시 더 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별도로 하서(下書)하여, 전일 조인득이 이미 뽑아 놓은 정병 4000명을 각기 있는 곳과 인근의 군영으로 대오(隊伍)를 나누어 보내되 한결같이 『기효신서』와 같이 하여 대장(隊長)이 1대(隊)를 거느리고, 기총(旗總)이 3대를 거느리고, 초장(哨將)이 3기(旗)를 거느리게 하여, 평상시에 법대로 조련하고 그 재주의 완성됨을 살펴서 등급을 나누어 아뢰게 하고, 대장(隊長)과 기총(旗總) 이상은 모두 무리를 거느릴 만한 자로 임명하여 성책(成冊)하여 올려 보내며, 대장⋅기총 이하의 군인은 역시 『기효신서』의 요패(腰牌)의 규정대로 각자 패를 차게 하여 서로 식별하도록 해서 혼란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기효신서』의 속오(束伍) 편 부권(付卷)을 이제 2건(件)을 간행하였으니 우선 내려 보내고, 속오해(束伍解)는 신들이 번역하여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였으니 아울러 등서하여 내려 보내되, 그대로 시행하게 할 것으로 감사(監司)에게 아울러 하서(下書)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실록』권56, 27년 10월 21일(을축)

備邊司啓曰, 聞黃海前兵使趙仁得之言, 在本道時, 抄擇精勇之兵, 其數滿於四千, 此軍則緩急可以足用, 而其中砲手成才者, 亦數百云. 仁得雖遞來, 而新兵使李慶濬, 必以此額, 操鍊不廢矣. 今人習見壬辰以來兵興之後, 士卒喜於潰散, 以爲我國之軍, 性本懦怯, 雖操鍊, 難用於戰陣. 此論一行, 一唱百和, 主以鍊兵之事, 爲無用之(俱)〔具〕, 而守令中, 自以爲高見者, 尤不思操鍊軍兵. 習俗之難曉, 而人心之惰慢如此, 誠可寒心. ……(中略)…… 其强弱, 勇怯, 唯在於將帥之運用如何爾. 欲其軍卒之不爲潰散, 則其最所緊要處, 唯在於束伍. 紀効新書中, 所論將家之事, 其說多矣, 然其精神, 盡在於束伍一篇. 今人徒知多聚軍卒, 則可以禦賊, 而不知有束伍分部之法, 故參差紊亂, 不成頭緖. 以此而可望於赴湯蹈火乎. 故我國士卒之善潰, 其罪不在於士卒, 而在於將帥, 其時不知有束伍之法故也. 黃海道四千精兵, 雖果驍健, 而若但以名數, 依前紛雜, 不爲束伍, 則臨時亦不可用矣. 李慶濬方爲兵使, 繼任其責, 未知於治軍一事, 及於念慮與否矣, 然朝廷不可不更加申飭. 請別爲下書, 以前日趙仁得已抄精兵四千名, 各以所在一處及隣近之軍, 分爲隊伍, 一依紀効新書, 使隊長統一隊, 使旗總統三隊, 使哨將統三旗, 平時依法操鍊, 考其成才, 分等啓聞, 其隊長旗總已上, 皆以可堪統衆者差定, 成冊上送, 旗隊總以下軍人, 亦依紀効新書腰牌之規, 令各自佩持, 使相識別, 而不相混亂, 何如. 且紀効新書束伍篇付卷, 今已印出二件, 爲先下送, 而束伍解一款, 則臣等頗爲翻譯, 務令易曉, 竝爲謄書下送, 使之依(放)〔倣〕行之. 此意監司處, 請幷下書. 答曰依啓.

『宣祖實錄』卷56, 27年 10月 21日(乙丑)

이 사료는 지방군의 정비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선조실록』 27년(1594) 10월 21일조 기사이다. 즉 1594년 10월 황해 병사 교체 때 전 병사(兵使) 조인득(趙仁得)이 뽑은 정예병 4000명을 속오(束伍)로 나누어 배치하자는 비변사의 건의를 선조가 윤허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기효신서(紀效新書)』 ‘속오’편을 그 규범으로 하여 지방군을 개편하도록 조처하고 있다.

『기효신서』는 명나라 척계광(戚繼光)이 집필한 병서(兵書)이다. 임진왜란 당시 평양 탈환전을 전후해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명나라 군대 중 절강병(浙江兵)의 활약상을 목격한 조선 정부는 절강병법(浙江兵法)에 대한 인식을 넓히게 되었고, 『기효신서』를 군사력 강화 방안의 대안으로 삼게 되었다. 이 책의 ‘속오’편에는 1사(司)는 5초(哨)를, 1초는 3기(旗)를, 1기는 3대(隊)를, 1대는 2오(伍)를 통솔하여, 오(伍)는 4명을 거느린다는 ‘단속행오(團束行伍)’의 요령이 서술되어 있다.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속오’를 일컬어, 큰 무리를 적은 인원을 다스리듯 효과적으로 지휘할 수 있다고 설명하며 ‘병법의 요체’라고 평가하였다.

조선 전기의 지방군 체제는 진관 체제(鎭管體制)였다. 이는 행정 단위인 ‘읍’과 군사 단위인 ‘진’이 일치하는 것으로, 전국 군현의 각 요충지마다 진관을 설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군⋅현 단위의 방위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진관 체제하에서의 지휘권은 수령이 차지했으나, 16세기에 들어와 유사시에 필요한 방어처에 군사를 집결시켜 중앙에서 파견한 장수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는 제승방략(制勝方略)으로 전환하였다. 그런데 제승방략 체제가 임진왜란 중에 큰 효과를 보지 못하자 다시 진관을 복구하고 속오법에 따라 군대를 편제하는 속오군 체제로 개편하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이 소강 상태였던 1594년부터 지방군의 재건에 착수, 황해도부터 속오군을 구성하여 1596년(선조 29년) 말에는 거의 전국적으로 조직을 완성하였다. 전란 와중의 편성 과정에서 중앙과 지방관 사이에 군사 지휘권 장악 문제로 혼선이 일어났으나 전국적으로 조직이 완성되자 지휘권⋅조련권 등은 진관에 따라 영장(營將)이 장악하게 되었고, 그 명칭도 속오군으로 통일되었다. 속오군은 기본적으로 진관 체제와 동일하게 군⋅현 단위의 방어 체제이지만 중앙에서 받던 군사 훈련을 각 지방에서 받게 하였다. 이로 인해 재정이 절감되고, 교련장 또한 면⋅리⋅촌에 있어 조직적인 동원 훈련이 가능하였다. 또한 속오군은 위로는 양반에서부터 아래로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편제되어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향촌 사회를 지키다가 적이 침입해 오면 전투에 동원되었다.

속오군 조직은 형편에 따라 대(隊)⋅기(旗)⋅초(哨)⋅사(司)⋅영(營) 등으로 조직되었다. 대개 1대가 11명으로 해서 3대가 1기, 3기가 1초, 5초가 1사, 5사가 1영(약 2500여 명)으로 편제되었다. 지방에 따라 편제의 가감이 있었지만 포수⋅살수⋅사수인 삼수병으로 안배하였다. 각 영은 요충지인 진이나 산성 등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초관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속오군의 수는 1636년(인조 14년) 평안도를 제외한 8만 6000여 명에서 1681년(숙종 7년)에는 20여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속오군 체제는 17세기 후반 5군영제(五軍營制)가 확립되면서 변화되어, 양인 20두, 천인 15두의 수미법(收米法)으로 적용되어 갔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영조 중엽부터 속오군의 구성에서 양인은 제외되고 점차 천인으로 채워져, 마침내 『속대전』에는 천예군(賤隷軍)으로 기록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 「병전육조(兵典六條)」 ‘연졸(練卒)’에서 “지금 속오군이라는 것은 사노(私奴)천인들로 구차하게 숫자만을 채웠으며, 어린아이와 늙은이들을 섞어 대오를 편성하였다”라고 하여 그 변화상을 소개하였다. 결국 속오군은 실제 군사의 기능을 상실한 채 포만 바치는 수포군화(收布軍化)가 일어남으로써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 서태원, 혜안, 1999.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이태진, 한국연구원, 1985.
『조선시대 군제연구』, 차문섭, 단국대학교 출판부,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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