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정치통치 체제의 변화

광해군의 전후 복구 사업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앞서 승지가 아뢴 대로 변란이 닥쳤을 때 강화도로 옮겨 지킬 계책을 세웠는데, 신은 항상 이것을 고민해 왔습니다. 종묘사직이 있고 신하와 백성이 있는데 이를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도성을 이미 지키지 못한다면 지방의 성지(城池)는 어찌 지킬 수 있단 말입니까? 도성을 수축하여 굳게 지킬 계책을 세운다면 민심이 진정되어 강변의 모든 보루가 모두 굳건히 지킬 의지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혹자는 적이 군사를 일으킬 까닭이 없으니 먼저 스스로 동요하여 미리 수축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또 난리 후 군사는 도안(都案)에만 의지하고 있어 팔도 군병의 숫자가 평상시 한 도의 숫자만도 못합니다. 즉위 초에 특별히 (군역을 져야 하는 사람 가운데) 도망가고 죽은 자의 죄명을 씻어 주도록 하명한 것은 민폐를 없애려는 성대한 뜻에서였는데, 근래 두어 개 도에서 감축된 숫자를 보니 거의 절반에 이르고 있습니다. 만일 즉위 초에 죄를 씻어 주신 수까지 더한다면 (감축된 군사의 수가 너무 많아) 장차 군사가 없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오랑캐를 방어할 계책이 없을 뿐 아니라 포(布)를 징수하는 수포(收布)나 숙위(宿衛) 등의 일은 어찌하겠습니까? 대개 근래에 쓰는 법은 대대로 이룬 법이 아니라 모두 일시적으로 구차하게 만든 것입니다. 반드시 형편에 따라 융통성 있게 처리해야 할 것인데 아직까지 답습만 하여 변통하지 못하였으니,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대간의 계사에 따라 군적(軍籍)을 정리하는데, 반드시 호패법(戶牌法)을 먼저 행한 연후에야 군적을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의정부로 하여금 토론하도록 하여 위로는 삼공으로부터 밑으로는 모든 벼슬아치에 이르기까지 모두 아패(牙牌)를 차게 하십시오. 그러면 백성도 모두 호패를 차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이르기를, “경성(京城)을 수축하는 것은 의논하여 조처하라.”고 하였다.

정협(鄭協)이 아뢰기를, “이런 때 경성을 수축하는 것은 몹시 불편합니다. 전에도 포루(砲樓)를 축조하였지만 끝내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때를 살펴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중략)……

(광해군이) 또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본래 군병이 적어 각 도의 군병으로는 적을 방어하기 어렵기 때문에 훈련도감의 군사가 해마다 북방에 파견되는데 그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근래 각별히 타일러서 (군사의) 사기를 높이고 신경을 써서 (군사를) 뽑아 앞선 조정에서 설립한 그 본의를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경은 비변사 신료들과 상의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박홍구(朴弘耉)가 아뢰기를, “만약 군병을 등록하려면 반드시 호패를 만들어야 하고 군사를 기르려면 필히 먼저 군량을 비축하여야 합니다. 지금 한 사람이 밭을 갈아 100사람이 먹으니 어찌 양식이 여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는 화폐를 만들어 그것을 민간에서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양식이 자연 여유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용하는 것도 곡식이며 먹는 것도 곡식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 곡식이 귀하지 않겠습니까? 돈[錢]을 사용하는 일은 이전 조정에서 시행하고자 하였으나, 그 당시 대신이 재료를 얻기 어렵다는 이유로 방계(防啓)하고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를 시행하고자 한다면 비록 목전(木錢)이라도 또한 온 나라에 통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재료의 귀천은 거론할 일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심희수(沈喜壽)가 아뢰기를, “사람마다 모두 호패는 시행할 수 있다고 하나 돈을 사용하는 것은 거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박홍구가 아뢰기를, “위에서 확실히 시행하고자 하여 녹봉을 줄 때 사용한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권15, 1년 4월 4일(을묘)

廷龜曰: “頃因承旨啓辭, 有臨變移守江都之計, 臣常以是爲悶. 有廟社焉, 有臣民焉, 舍此何之? 都城旣不可守, 則外方城池, 獨能保守乎? 修築都城, 以爲固守之計, 則人心鎭定, 江邊列堡, 亦皆有堅守之心矣. 言者以爲賊無動兵之釁, 不須先自搖動, 預爲修築, 豈理也哉? 且亂後軍士, 只憑都案, 八道軍兵之數, 不如平時一道之數. 嗣服之初, 特下逃故蕩滌之命, 此出於務祛民弊之盛意. 而近見數三道減除之數, 幾至於半. 若八道都蕩滌之之數入來, 則將爲無兵之國. 不但禦戎無策, 如收布⋅宿衛等事, 何以爲之? 大抵近來所用之法, 非祖宗成憲, 皆是一時苟且之法. 必須變通, 而尙爾因循, 不爲變通, 則事無可爲者矣. 今因臺諫啓辭, 將修軍籍, 必先行號牌法, 然後可以修軍籍矣. 宜令廟堂講定, 上自三公, 下至百僚, 皆佩牙牌. 則民皆佩之, 而不以爲難矣. 此非甚難之事也.” 王曰: “京城修築, 可議而處之” 鄭協曰: “當此時, 修築京城, 甚不便. 前者亦築砲樓, 而終歸無用. 相時爲之可也.” …(中略)…王曰: “我國無軍兵, 各道軍兵, 難以禦敵. 故訓鍊都監之卒, 連年赴北, 日漸消縮. 近來各別申飭, 聳動精抄, 毋負先朝設立之本意事. 卿其與備邊司諸臣, 相議爲之.” 弘耉曰: “如欲籍兵, 必作號牌, 如欲養兵, 必先措備軍糧. 今者一人耕之, 百人食之, 豈有裕食之理? 古者有貨泉, 使之行用於民間. 以此民食自裕, 今則所用者穀, 所食者穀. 幾何其穀不貴也? 用錢一事, 先朝將欲行矣, 而其時大臣, 以本質難得之故, 防啓不行. 如欲行之, 則雖木錢, 亦可通行於一國矣. 本質貴賤, 不須論也.” 喜壽曰: “號牌則人皆以爲可行, 而用錢則似難擧行矣.” 弘耉曰: “自上如欲斷然行之, 至用於頒祿時, 則何難之有?”

『光海君日記』(中草本)卷15, 1年 4月 4日(乙卯).

이 사료는 1609년(광해군 1) 4월 광해군(光海君, 1575~1641, 재위 1608~1623)과 신하들이 모여 임진왜란 후 복구 사업과 관련한 논의를 하는 내용이다.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성곽을 수축하거나 군사를 징발하기 위해 호패법(號牌法)을 시행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혼란한 상황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다방면에 걸쳐 국가 재건을 위한 사업들을 전개하였다. 먼저 왕실의 존엄성을 높이기 위하여 전란으로 불에 탄 궁궐을 재건하였다. 즉위 직후인 1608년 불에 타 버린 종묘를 재건하였으며, 선왕이던 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가 추진하던 창덕궁의 중건을 마무리하고는 1611년(광해군 3)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밖에 창경궁을 중수하였으며, 경덕궁(慶德宮)을 건축하였다. 궁궐이 국가 및 왕실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광해군은 이 같은 궁궐의 중건 및 신축 작업을 통해 왕실의 위상을 높이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광해군은 조선 왕조의 개국과 관련한 가사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다시 간행하였다.

그리고 군사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각종 시책을 강구하였다. 당시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더구나 만주에서는 서서히 후금(後金)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사력 강화는 절실한 문제였다. 광해군은 이를 위해 군사들을 모아 진법(陣法) 훈련을 실시하도록 하고 이를 직접 참관하였다. 군사들의 무예를 점검하기 위한 관무재(觀武才)도 여러 차례 시행하였다. 이 외에도 서울 주변의 방어 태세를 강화하기 위하여 강화도와 수원, 죽산, 용인 등의 방어 태세를 점검하였다. 남한산성을 보수하고 강화도에 있는 군사 시설을 강화하여 유사시를 대비하기도 하였다.

또한 군사를 확보하기 위해 1610년(광해군 2)에는 호패법을 시행하였다. 이를 통해 인구수를 파악할 뿐 아니라 백성들의 역(役) 유무 등을 확인하고 부족한 군사를 충당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과 달리 호패법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1612년(광해군 4) 7월에 혁파되었으나, 인조반정 이후인 1626년(인조 4)에 다시 시행되었다. 이 밖에도 군사력 강화를 위해 무기를 제작하고 확보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다. 군기시와 훈련도감을 통해 재래식 무기인 활이나 화살, 창검 등을 제작하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으로 화포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으므로, 1613년(광해군 5)에는 기존에 있던 조총청(鳥銃廳)을 화기도감으로 확대 개편한 뒤 파진포(破陣砲) 등의 화포를 제작하였다. 또한 전차(戰車)를 제작하거나 화기 제작에 필수적인 염초(焰硝)를 확보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는 사신을 통해 대량으로 구입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경제적 복구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광해군은 당시 많은 문제점과 폐단을 드러내던 현물 납부 중심의 공물 제도를 쌀로 대신 바치는 수미법(收米法)으로 개편하였다. 수미법은 한백겸(韓百謙, 1552~1615)의 건의와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서 시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정 관료와 지주, 그리고 기존에 방납(防納)을 통해 이익을 챙겼던 무리의 반대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608년(광해군 즉위년) 5월 이런 반대에도 일단 경기도에 한정해서 수미법을 시험적으로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해 9월부터는 선혜법(宣惠法)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었다. 시행 과정에서 많은 반발로 좌절되기도 하였으나, 후일 시행되는 대동법(大同法)의 전신 역할을 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 외에도 『동의보감』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비롯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동의보감』의 간행은 굶주림과 전염병 등으로 인구가 줄어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동의보감』은 광해군의 지원과 허준(許浚, 1539~1615)의 노력으로 1610년(광해군 2) 저술이 완료되었고, 1613년(광해군 5) 내의원에서 초판본을 간행하였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전란으로 흩어진 민심의 안정 및 교화를 목적으로 간행하였다. 전쟁 중에 나라 또는 부모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들을 수록함으로써 충효(忠孝) 의식을 고양하였던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선조 후반~광해군 초반 궁궐 경영과 경운궁의 수립」,『서울학연구』42,윤정,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2011.
「광해군대 화기도감에 대한 연구」,『민족문화』21,이왕무,민족문화추진회,1998.
「광해군대의 대북정권과 정국의 동향」,『한국사론』30,한명기,서울대학교 국사학과,1988.
저서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오항녕, 너머북스, 2012.
『광해군-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한명기, 역사비평사, 2000.
편저
「대동법의 시행」, 한영구, 국사편찬위원회, 1998.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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