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정치통치 체제의 변화

비변사의 기능 강화

신이 들으니 다스리는 방도는 한 가지만은 아니지만, 그 강령(綱領)을 세우지 않고서는 말단의 법이 제대로 시행되는 경우는 없다고 했습니다. 옛날 주(周)나라 왕은 만방을 위무하면서 “다스리는 관리들을 감독하여 바로잡는다.”는 말을 먼저 하였습니다.소공(召公)은 강왕(康王)에게 고하기를 “육군(六軍)을 널리 유지하여, 우리 고조(高祖)께서 얻으신 천명을 무너뜨리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맹자는 왕도 정치를 논하면서 경계를 바르게 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이 세 가지가 어찌 치도의 근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주나라 제도를 본받아 관직을 설치하고 직임을 나누었습니다. 삼공(三公)은 육경(六卿)을 통솔하고, 육경은 여러 관아를 거느렸습니다. 체제가 통솔되고 분직(分職)이 분명하니, 조리가 있어 문란하지 않습니다. 인재 선발이나 예악(禮樂)에 관한 문제, 재정(財政)이나 군사 문제, 그리고 형옥(刑獄)이나 공사를 일으키는 등의 일이 있으면 정부(政府)와 해당 관청의 당상들이 서로 의논해 거행했습니다. 이것은 정부가 육조의 모든 일을 통솔한 것이고, 육조 또한 그 직임을 제대로 수행한 것입니다. 100년 동안 시행해 왔지만 조금도 차질이 없었습니다.

성종(成宗, 1457~1494, 재위 1470~1494) 대에 건주여진(建州女眞)을 정벌할 때 임시로 비변사(備邊司)를 설치했습니다. 재상으로서 이 일을 맡은 사람을 지변재상(知邊宰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전쟁 때문에 설치한 것으로서 국가의 중요한 모든 일들을 참으로 다 맡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중요한 것으로 취급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 결과 정부는 한갓 헛이름만 지니고 육조는 모두 그 직임을 상실하였습니다. 명칭은 ‘변방의 방비를 담당하는 것[備邊]’이라고 하면서 과거 시험에 대한 판하(判下)나 비빈(妃嬪)을 간택하는 등의 일까지도 모두 여기를 경유하여 나옵니다. 명분이 바르지 못하고 말이 이치에 맞지 않음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비변사를 혁파하여 정당(政堂)으로 개칭하는 것이 가장 좋은 대책이라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육조의 판서와 참판으로 하여금 각기 해당 사항을 대신과 상의하여 결정하게 해서 조종조의 옛 법을 회복한 뒤에야 체통이 바르게 되고 각자의 직무에 충실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치도(治道)를 논할 때 먼저 그 명분을 바로잡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비변사를 혁파한 후에 군국(軍國)의 중요한 기밀을 어디에 맡길 것인가.”라고 한다면 이것은 바로 병조 판서의 직무입니다. 육군(六軍) 을 장악하고 국가를 태평하게 하는 자의 권위와 명망이 비변사의 일개 담당자보다 못하겠습니까?

효종실록』권13, 5년 11월 16일(임인)

臣聞, 爲治之道, 固非一端, 然未有不擧其綱, 而能張其具者也. 昔周王撫萬邦, 首言董正治官. 召公告康王曰: “張皇六師, 無壞我高祖寡命.” 孟子論王政, 以經界爲先. 玆三者, 豈非治道之大綱乎? 我國家倣擬周典. 設官分職, 三公統六卿, 六卿統百司. 體統分要, 有條不紊. 遇有選用⋅制作, 錢穀⋅甲兵⋅刑獄⋅興造之事, 政府與該曹堂上相議擧行. 是則政府於六曹之事, 無所不統, 而六曹亦不失其職也. 行之百年, 少無虧闕. 成廟建州之役, 權設備邊司, 宰臣之任是事者, 稱知邊宰相. 然只爲一時兵革而設, 未必眞任樞機之重 及至今日, 事無巨細, 無不歸重. 政府徒擁虛號, 六曹皆失其職. 名曰備邊, 而科擧判下, 妃嬪揀擇等事, 亦由此出. 名不正⋅言不順, 莫此爲甚. 臣之愚意, 莫如革罷備邊司, 改稱政堂. 使六曹長貳, 各以其事, 稟定於大臣, 以復祖宗之舊, 然後體統井井, 各職其職. 此所謂論治, 先正其名者也. 若曰備局旣罷, 軍國機密於何委重, 則此乃本兵之職也. 掌六師, 平邦國者, 其權位地望, 獨不如備局一有司乎?

『孝宗實錄』卷13, 5年 11月 16日(壬寅)

이 사료는 1654년(효종 5) 11월 성균관 대사성 김익희(金益熙, 1610~1656)가 제출한 상소문의 일부로, 기능이 강화되고 있는 비변사를 혁파하자는 주장을 담고 있다. 김익희의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는 중문(仲文)이며, 호는 창주(滄洲)로,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손자이다.

비변사는 조선 시대에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고 처리하던 합의 기관이었다. 1482년(성종 13) ‘야인(野人)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설치된 지변사재상(知邊事宰相)에서 기원하였다. 이후 국경 문제와 왜적의 침입 등이 발생할 때마다 임시적으로 설치되다가, 1554년(명종 9) 비변사의 관사가 건립되고 당상관들이 이 비변사 건물에 모여 변방의 군사 문제를 논의하게 되면서 관제상 독립된 기관이 되었다. 그 뒤 1555년(명종 10) 왜구가 전라도 일대에 침입하는 을묘왜변(乙卯倭變)이 발생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권한이 확대되기 시작하였고, 청사도 따로 마련되었다. 이렇듯 관제상의 정식 관청이 되면서, 비변사는 변방에 관한 사무를 총괄하기 시작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쟁 수행을 위한 최고 기관으로 그 기능이 확대되어, 군사는 물론 정치⋅경제⋅외교⋅문화 등 군국 사무 전반을 처리하게 되었다. 광해군(光海君, 1575~1641, 재위 1608~1623) 연간에 후금(後金)과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군사 및 외교 방향을 결정하는 기관이 되었다. 그리고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 연간 반정 공신들은 후금과 항쟁하는 과정에서 국방력을 강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새로운 군영(軍營)을 설치하는 한편, 군영의 책임자인 제조 당상(提調堂上)을 겸임함으로써 비변사를 중심으로 군령⋅인사⋅재정을 장악하였다. 그 뒤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과 현종(顯宗, 1641~1674, 재위 1659~1674) 대에도 비변사의 정치적 지위는 동요되지 않았다. 다만 명칭을 바꾸자는 소극적 건의가 있었을 뿐이었다. 특정 정치 세력의 정국 주도와 관련해서 비변사는 겉으로는 여러 정치 세력을 대변하는 인물을 골고루 포함시켜 다양한 정치적 의견을 조정하고 있다는 것을 내세우는 데 이용되었다.

비변사는 형식적으로 제조(提調)⋅부제조(副提調)⋅낭청(郎廳)으로 구성되었는데, 실제 운영상으로는 도제조(都提調)는 전⋅현직 삼정승이, 당상은 2품 이상의 제조와 정3품 이상 부제조가 맡았으며, 낭청은 실무를 보는 당하관이 임명되었다. 이중 당상은 임명 방법에 따라 계차 당상(啓差堂上)예겸 당상(例兼堂上)으로 구분되었다. 역할에 따라서는 유사 당상, 구관 당상, 일반 당상 등으로 구분되기도 하였다. 계차 당상비변사의 사안을 처리하기 위해 필요한 인물을 차출한 경우로, 의정부의 찬성이나 참찬, 육조의 참판, 중추부와 돈녕부의 지사 및 동지사 등이 있었다. 대외 위기에 직면해서는 군사 업무에 밝은 인물을 차출하기도 하였으나, 대개는 정치적 안배를 목적으로 차출되었다. 예겸 당상은 맡고 있는 현직에 따라 비변사 당상을 겸하게 되어 있는 관청의 책임자들이었다. 이러한 예겸 당상은 예겸직에서 벗어나면 자동적으로 당상에서 탈락되었다. 예를 들어 군사 업무와 관련해서는 병조 판서가, 외교와 관련해서는 예조 판서가 예겸 당상으로 참여하였다. 17세기 전반에 이조, 호조, 병조, 예조의 판서를 시작으로 예겸 당상은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어 강화 유수, 훈련대장, 형조판서, 개성 유수, 어영대장, 금위대장 등이 포함되었다.

유사 당상비변사의 실무를 주관하는 당상으로, 비변사에서 주로 처리하는 국방이나 외교⋅재정 등에 뛰어난 인물이 차출되었다. 구관 당상비변사 사안 가운데 특정한 분야를 주관하여 처리하는 당상이었다. 예를 들어 공인(貢人)과 시전 상인의 문제를 전담하는 공시 구관 당상(貢市句管堂上)과 같은 경우를 말한다. 구관 당상은 조선 후기의 사회 변화에 따라 여러 임시 관청들을 설치하고 이를 비변사에서 통제하게 되면서, 이러한 임무를 책임지고 처리하기 위하여 설치된 관직이다. 이 같은 당상에는 시기적인 차이는 있으나 공조(工曹)를 제외한 5조(曹)의 판서들과 훈련대장어영대장 등 5군영의 대장, 강화⋅개성⋅광주(廣州)⋅수원의 유수 등 많은 수의 재상급 관직자가 참여하였다.

영조(英祖, 1694~1776, 1724~1776) 대에 탕평 정치가 본격화하면서 비변사의 제조와 당상의 수는 더욱 증가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형식적으로라도 여러 당파의 의견을 합좌의 장소인 비변사에서 모으려고 하는 정치적 의도와 관계가 깊었다. 세도 정치 하에서 비변사는 벌열 세력(閥閱勢力), 즉 정권을 장악한 소수의 가문이 독점하면서 그 권한이 더욱 막강해졌다. 이전부터 정착되어 시행되던 비변사의 관원들을 자체적으로 선임하는 자천제 등으로 인해 정치 권력이 집중되었다. 그 결과 벌열 세력들은 요직을 독점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사나 정무에 따른 논의나 의결권도 장악하였다. 아울러 각 관청의 상당 업무도 비변사를 거치도록 하여 행정 통제력까지 장악하였다. 이 시기 국왕은 비변사의 결정을 형식적으로 따르는 정도였다.

이와 같이 확대된 비변사의 기능은 전제 왕권의 재확립을 지향하였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집권으로 축소되었다. 고종 1년(1864) 국가 기구를 재정비하면서 의정부비변사의 사무 한계를 규정하였다. 비변사는 예전처럼 외교 및 국방과 치안만을 관장하고 나머지는 모두 의정부에 넘기도록 하여 비변사의 기능을 축소 격하시켰다. 또 이듬해에는 비변사를 폐지해 그 담당 업무를 의정부에 이관하였고, 그 대신 조선 전기에 설치하였던 삼군부를 부활시켜 군사 업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비변사등록의 서술체계와 내용」,『사학연구』91,이근호,한국사학회,2008.
「비변사의 정치적 위상과 기능」,『사학연구』91,이재철,한국사학회,2008.
「16⋅17세기 권력구조의 개편과 대신」,『한국사연구』84,정홍준,한국사연구회,1994.
저서
『조선시대 비변사 연구』, 반윤홍, 경인문화사, 2003.
『조선후기비변사연구』, 이재철, 집문당, 2001.
편저
「비변사의 강화」, 반윤홍, 국사편찬위원회, 1998.
「조선후기 비변사 연구 동향」, 이상식, 창작과 비평사, 2000.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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