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정치붕당 정치와 탕평 정치

이괄의 난

인조가 밤에 국청(鞫廳)의 신하들을 불러 만났다. 좌찬성 이귀(李貴, 1557~1633)가 “이괄이 몰래 다른 뜻을 품고 강한 군사를 장악하고 있으니, 일찍 꾀하지 않으면 훗날 반드시 제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물며 모든 역적들의 공초로 흉악한 모의가 드러났으니, 의금부에 잡아다 정상을 국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인조가 “이괄은 충성스럽고 의로운 사람인데 어찌 반역의 마음을 가졌겠는가. 이는 필시 흉악한 무리가 그의 위세를 빌리고자 한 말이다. 경은 어찌하여 그가 반드시 반역할 것이라는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귀가 아뢰기를, “이괄의 반역 모의는 신이 잘 모르지만 그 아들 이전(李栴)이 반역을 꾀한 정상은 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어찌 아들이 아는데 아버지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인조가 이르기를, “사람들이 경이 반역한다고 고한다면 내가 믿겠는가. 이괄의 일이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하니, 이귀가 아뢰기를, “고변한 사람이 있다면 어찌 신이라 해서 온전히 놓아 두고 묻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잡아 가두고 국문하여 그 진위를 살핀 뒤에 처치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인조는 답하지 않았다.

인조실록』권4, 2년 1월 21일(병자)

夜, 引見鞫廳諸臣. 左贊成李貴曰: “李适潛蓄異志, 手握强兵, 若不早圖, 後必難制. 況諸賊供招, 凶謀敗露, 不可不拿致王獄, 鞫問情狀也” 上曰: “李适忠義之人, 豈有反心哉? 此必凶徒借重之言, 卿何以詳知其必反之狀乎?” 貴曰: “适之反謀, 臣雖未詳, 而其子(栴)〔旃〕謀逆之狀, 臣所詳知也. 豈有子知而父不知之理乎?” 上曰: “人告卿反, 則予何信乎? 李适之事, 何以異於是?” 貴曰: “苟有告變之人, 則豈可以臣之故而全釋不問乎? 所當拿囚鞫問, 審其眞僞, 然後處置也” 上不答.

『仁祖實錄』卷4, 2年 1月 21日(丙子)

이 사료는 1624년(인조 2년) 평안 병사로 있던 이괄(李适, 1587~1624)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내용이다. 이괄인조반정 때 공이 컸으나 반정 계획에 늦게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2등공신에 올라 한성 부윤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얼마 뒤 조정에서 관서 지방에 만주족이 침입할 염려가 있다며 이괄도원수 장만(張晩, 1566~1629) 휘하의 부원수 겸 평안 병사로 좌천시켰는데, 이에 불만이 더욱 커져 반란을 꾀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전 교수 문회(文晦, ?~?)의 밀고로 알게 되었고, 그 뒤 서울에 있던 이괄의 아들을 체포하자 불안을 느낀 이괄이 난을 일으켰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당시의 북방 정세와 부원수 임명 경위 등으로 보아 미흡한 점이 많다. 당시는 강성한 후금(後金)이 언제 침략할지 모를 정도로 매우 긴박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북방 경비는 가장 중대한 국가적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도원수 못지않게 부원수도 최전방의 군대를 직접 지휘해야 하기 때문에 전략에 밝고 통솔력 있는 인물이 합당하였다. 이괄을 부원수로 보낸 것은 그만큼 신중한 결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괄 역시 새 임무의 중요성을 알고 평안도 영변에 출진하여 군사 조련, 성책(城柵) 보수, 진(鎭)의 경비 강화 등 부원수의 직책에 충실하였다. 그러므로 인사 조치에 대한 불만은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이괄의 난’에 대해 엄중히 조사를 하였지만 끝에 무고임이 밝혀져 조사 담당관들이 고변자들을 사형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집권층은 인조(仁祖, 재위 1623~1649)에게 이괄을 붙잡아 와 진상을 국문하고 부원수에서 해임시키자고 건의하였다. 인조는 이귀(李貴, 1557~1633) 등이 주장하는 이괄의 처벌에 대한 논의는 묵살하였으나, 군중(軍中)에 머무르던 이괄의 외아들 이전(李栴, ?~1624)을 모반의 사실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압송하기 위해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영변으로 보냈다. 이에 이괄은 아들이 모반죄로 죽으면 본인도 온전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마침내 조정에서 파견된 금부도사 등의 목을 베고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괄은 그의 부하 이수백(李守白, ?~1634)⋅기익헌(奇益獻, ?~?), 구성 부사 한명련(韓明璉, ?~1624)과 함께 가까운 병영의 군사 1만여 명과 투항한 왜병 100여 명으로 먼저 개천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을 도체찰사로 삼아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는 한편, 반란군과 내응할 것을 염려하여 전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1562~1624) 등 35명을 처형하였다. 반란군은 평안도 순천⋅자산⋅중화, 황해도 수안⋅황주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평산으로 진격하였다. 중앙에서 파견한 토벌군과 장만이 이끄는 토벌군이 합세하여 저탄에서 반란군과 싸웠으나 도리어 반란군에게 패하였고, 반란군은 승승장구하여 경기도 개성⋅벽제에 이르렀다. 이에 인조 이하 대신들은 공주로 피난을 갔고 이괄 군은 마침내 서울에 입성, 경복궁의 옛터에 주둔하였다.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한 것은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괄선조의 열 번째 아들 흥안군 제(瑅)를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바로 그날 밤 도원수 장만의 군사와 각지 관군의 연합군이 서울 근교에 이르렀다. 장만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반란군을 한성 근교의 길마재에서 대파하였다.

이괄은 수백 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수구문(水口門)으로 빠져나가 삼전도를 거쳐 경기도 광주로 달아났으나 부대장 정충신(鄭忠信, 1576~1636) 등이 이끄는 관군의 추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괄이 경기도 이천의 묵방리(墨坊里)에 이르렀을 때, 그의 부하 기익헌⋅이수백 등이 자기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이괄⋅한명련 등 9명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하여 반란은 평정되었다. 이괄 등의 수급(首級)이 공주의 행재(行在)에 이른 뒤 인조는 환도하였다. 인조이괄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운 장만⋅정충신⋅남이흥(南以興, 1576~1627) 등 32명을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포상하고 난의 수습책을 마련하였다.

이괄의 난이 당시 국내외 정세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안으로는 국왕이 서울을 떠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으며, 집권층의 사찰 강화 등으로 오랫동안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밖으로는 후금의 남침 야욕을 자극시켰다. 반란이 실패하자 한명련의 아들인 한윤(韓潤, ?~?) 등이 후금으로 도망쳐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고 남침을 종용하였다. 결국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는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이괄의 난과 『호남모의록』」,『숭실사학』28,김경숙,숭실사학회,2012.
「이괄 전설 연구」,『강원민속학』11,김의숙,강원민속학회,1995.
저서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신병주, 새문사, 2003.
『조선시대 당쟁사 1-사림정치와 당쟁 : 선조조~현종조』, 이성무, 아름다운날, 2007.
『길마재에 꿈을 묻고-이괄-(한국의 인간상 2)』, 하현강, 신구문화사,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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