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앞서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이 진위 땅에 있으면서 종사관 등과 더불어 진병(進兵)할 것을 의논하여 각기 그 이해를 개진하였다. ……(중략)……
안성에 이르니 날이 이미 어두웠는데, 적의 간첩 최섭(崔涉)이란 자를 붙잡아 힐문해 적의 정세 및 적장(賊將)의 성명을 알아내고 주머니 안을 조사해 이봉상(李鳳祥)의 패영(貝纓)
산호⋅호박⋅밀화(密花)⋅대모⋅수정 따위로 만든 무늬와 광택이 나는 갓끈
을 찾아냈다. 잠시 후 앞산에 몇 개의 횃불이 먼 곳으로부터 가까이 오면서 포성과 함성이 계속해서 일어나더니 적병이 진을 침범했다고 후졸(候卒)이 급히 보고해 왔다. 이때 비바람이 크게 몰아치고 밤은 칠흑같이 어두운데 장작불을 미처 피우지 못해 진 밖은 지척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먹지 못한 군마(軍馬)가 반이 넘어 뭇사람들의 마음이 어찌 할 바를 몰라 했으나 오명항이 굳게 드러누워 꼼짝도 하지 않고 단지 진오(陣伍)를 정돈한 채 경솔하게 포를 쏘지 말고 적이 가까이 오면 비로소 쏘도록 신칙하였다. 그리고 죽을 준비해 사졸들을 먹이고 평소처럼 코를 고니, 진중이 거기에 힘입어 안정되었다. 이튿날 새벽 진 밖의 100여 보 되는 곳에 적병의 인마(人馬)가 탄환에 맞아 죽고 버린 무기들이 보였다. 대개 적은 각 처의 토적(土賊) 및 청주진(淸州鎭)⋅목천(木川) 등 고을의 마병(馬兵)과 금어군(禁禦軍)으로서 정예한 자를 뽑아 장사치와 거지 차림을 하여 피난민 가운데 섞여 은밀히 안성(安城) 청룡산(靑龍山) 속에 모여 있었는데도 산 아래 촌락이 거의 적의 소굴이 되어 있어 누구 하나 와서 고하는 자가 없어 안성군에서는 아직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적의 첩자가 번번이 관군에서 붙잡혔기 때문에 적도들도 단지 대군(大軍)이 직산(稷山)으로 향한 줄만 알았지 진을 안성으로 옮긴 줄은 모르고 어두운 가운데 안성군의 진(陣)인 줄 잘못 알았기 때문에 원근을 구별하지 못해 포(袍)와 화살을 어지러이 쏘았으나 다 미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대군이 쏜 신기전(神機箭)을 보고서야 비로소 경영(京營)의 군사가 온 것을 알고 놀라고 겁에 질려 물러나 도망하니, 위협에 못 이겨 따른 무리는 이때 대부분 도망해 흩어지고, 적의 괴수 이인좌(李麟佐)
⋅박종원(朴宗元) 등은 4~5초(哨)의 병력을 거느리고 청룡산 속으로 물러가 둔을 치고 죽산(竹山)의 군사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대군도 적이 주둔한 곳을 알지 못하였다.
'이인좌(李麟佐)' 관련자료
이날 아침에 교련관 권희학(權喜學)이 민제장(閔濟章)이 적의 첩자를 사로잡은 것을 보고는 곧 달래고 힐문해 비로소 적병이 산속 가지곡(加之谷) 대촌(大村) 속에 있는 것을 알았으니, 관군과 겨우 5리 남짓 떨어진 지점이었다. 오명항이 멀리서 그 지형을 바라보니, 청룡산 한 줄기가 수백 보(步) 정도로 길게 구부러져 마치 소가 누워 있는 형상으로 3면을 둘러 안았는데, 50~60호의 마을이 그 안에 자리해 있었으며 전면은 평야였다.
즉시 중군(中軍) 박찬신(朴纘新)으로 하여금 보군(步軍) 3초(哨)와 마군(馬軍) 1초를 나누어 거느리게 하고 경계하기를, “기(旗)를 눕히고 북소리를 내지 말며, 갑옷과 투구를 벗고 빨리 달려 나가되 보군 1초는 산 뒤쪽을 거쳐 먼저 높고 험한 곳을 점거하고, 2초는 두 날개로 나누어 포를 쏘고 화전(火箭)을 쏘아 그 촌락을 불태우라. 그렇게 하면 그 형세로 보아 반드시 앞들로 도망해 나올 것이니, 이에 마군(馬軍)으로 짓밟으라” 하고, 또 민제만(閔濟萬)에게 명하기를, “안성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 길로 향해 의병(疑兵)
군사가 있는 것처럼 거짓으로 꾸며서 적을 의혹시키는 것. 또는 그런 역할을 하는 군사
을 만들어서 적의 도주로를 막으라” 하였는데, 전군(前軍)이 절제(節制)를 어기고 기를 세우고 북을 울리며 행군했으므로 적이 눈치 채고 군기와 집물(什物)을 버리고 급히 산으로 올라가 진을 치고 붉은 일산(日傘)을 세워 백기(白旗)로 지휘하니, 관군이 지형의 이로움을 뺏겨 올려다만 볼뿐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권희학이 한 촌 할미를 붙잡아 위협해 적장 한 사람이 마을 가운데 있음을 알고는 이만빈(李萬彬)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장사(將士)가 아닌가? 하찮은 적을 보고 겁을 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이만빈이 분연히 말하기를, “내 마땅히 죽으리라” 하고는 말에 오르면서 용사를 구하기를, “누가 나를 따르겠는가?” 하니, 중초군(中哨軍) 조태선(趙泰善) 등 50여 명이 따르기를 원하였다.
마침내 앞장서 마을로 들어가는데, 적장 박종원의 말이 사나워서 재갈을 물지 않으므로 지체하고 도는 사이에 관군이 이미 들이닥쳤다. 박종원이 소리치기를, “시간을 끌다가 목숨이 이에 이르게 되었구나” 하고는 칼을 뽑아들고 벗어나려 하였다. 조태선이 먼저 한 발을 쏘아 그 목을 맞히니, 박종원이 몇 걸음을 달려가다가 쓰러졌다. 이만빈이 말에서 내려 목을 베고 또 그의 군관 몇 사람을 베었다. 그리고 그 목을 깃대에 매달고 산 위로 달려가니 적이 바라보고서 기운이 빠지고, 또 궁포(弓砲)가 모두 밤비에 젖어 쓸 수가 없으므로, 드디어 산꼭대기로 도망하여 올라갔는데, 그때 동북풍이 세게 불고 적은 서남쪽에 있어 관군이 바람을 타고 힘을 분발해 올라가니, 적은 산등성이를 따라 남쪽으로 도망하려다가 민제만의 의병(疑兵)을 보고는 다시 돌아 서쪽으로 가니 형세가 더욱 위축되어 기와 북을 버리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관군이 추격해 100여 명을 베었으며, 마병 임필위(林必偉)란 자는 적 1명을 사로잡아 겨드랑이에 끼고 달리니, 보는 자들이 장하게 여겼다. 그들의 짐바리와 홍산(紅傘)⋅기치(旗幟) 등을 노획했다. 처음에 관군이 올려다보며 적을 공격하여, 적은 산 위에서 진퇴(進退)하며 유인하는 형상을 짓기도 했는데, 적과 관군이 모두 군사를 거두어 산을 내려온 후에는 막연하여 그 승부를 알 수가 없었다. 종사관 등이 해상(垓上)에 올라가 바라보고는 관군이 적에게 함몰되는가 싶어 매우 초조해 하니, 오명항이 웃으며 말하기를, “적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정오가 채 못 되어 말을 달려 승첩을 알려 왔고, 포시(晡時)
오후 3시부터 4시 사이
에 박찬신(朴纘新)이 고각(鼓角)을 울리며 깃대에다 적의 머리 여러 개를 매달고 오니, 군중에서 승전곡을 울리고 군사와 말이 기뻐 날뛰었다. 첩서(捷書)를 써서 박종원 등의 머리를 함에 담아 군관 신만(申漫)에게 주어 서울로 치보(馳報)하였다. 이때 조정에서 상하가 밤낮으로 초조하게 걱정하며 첩보를 기다리고 있다가, 이날 동북풍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모두 말하기를, “왕의 군대에 이롭다” 했는데, 과연 크게 이겼던 것이다.『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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