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정치붕당 정치와 탕평 정치

정조의 탕평론

차대(次對)1)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領相)이 바야흐로 지문(誌文)을 짓고 있거니와, 선대왕의 사업과 실적은 곧 균역(均役)탕평(蕩平)⋅준천(濬川)이다. 탕평은 50년 동안의 대정(大政)인데, 말을 만들어 갈 적에 단지 탕평 두 글자만 쓴다면 혼돈하게 될 염려가 없지 않다. 충신과 역적을 구분하는 데 이쪽이 옳고 저쪽이 그른 것과, 저쪽이 객(客)이고 이쪽은 주(主)인 구별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이광좌(李光佐)⋅최석항(崔錫恒)⋅조태억(趙泰億)을 추탈한 것도 또한 선조(先朝)의 뜻을 받든 것이다. 탕평은 의리에 방해받지 않고 의리는 탕평에 방해받지 않은 다음에야 바야흐로 탕탕평평(蕩蕩平平)의 큰 의리라 할 수 있다. 지금 내가 한 말은 곧 의리의 탕평이지, 혼돈의 탕평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정조실록』권1, 즉위년 5월 16일(병술)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은 말한다. 태극(太極)이 있고 나서 음양(陰陽)이 있으므로 복희씨(伏羲氏)는 음양을 점괘로 풀이하여 이치를 밝혔고, 음양이 있고 나서 오행(五行)이 있으므로 우(禹)는 오행을 기준으로 세상 다스리는 이치를 밝혀 놓았으니, 물과 달의 형상을 보고서 태극, 음양, 오행에 대해 그 이치를 깨우친 바 있었던 것이다. 즉 달은 하나뿐이고 물의 종류는 1만 개나 되지만, 물이 달빛을 받을 경우 앞 시내에도 달이요, 뒤 시내에도 달이어서 달과 시내의 수가 같게 되므로 시냇물이 1만 개면 달 역시 1만 개가 된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달은 물론 하나뿐인 것이다.

하늘과 땅이 오직 올바른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해와 달이 오직 밝음을 보여 주며, 모든 물건들이 서로 보는 것은 남방의 괘(卦)이다. 밝은 남쪽을 향하고 앉아 정사를 들었을 때 세상을 이끌어 갈 가장 좋은 방법을 나는 터득할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무(武)를 숭상하던 분위기를 문화적인 것으로 바꾸고 관부(官府)를 뜰이나 거리처럼 환하게 하였으며, 현자(賢者)는 높이고 척신(戚臣)은 멀리하며,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은 멀리하고 어진 사대부를 가까이하고 있다. 세상에서 말하는 사대부라는 이들이 반드시 다 어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금세 희었다 하면서 남인북인지 모르는 편폐(便嬖)와는 비교가 안 될 것 아닌가 ……(중략)……

내가 바라는 것은 성인을 배우는 일이다. 비유하자면 달이 물속에 있어도 하늘에 있는 달은 그대로 밝다. 그 달이 아래로 비치면서 물 위에 그 빛을 발산할 때 용문(龍門)2)의 물은 넓고도 빠르고, 안탕(雁宕)의 물은 맑고 여울지며, 염계(濂溪의 물은 검푸르고, 무이(武夷)의 물은 소리 내어 흐르고, 양자(揚子)의 물은 차갑고, 탕천(湯泉)의 물은 따뜻하고, 강물은 담담하고 바닷물은 짜고, 경수(涇水)는 흐리고 위수(渭水)는 맑지만3), 달은 각기 그 형태에 따라 비춰 줄 뿐이다. 물이 흐르면 달도 함께 흐르고, 물이 멎으면 달도 함께 멎고, 물이 거슬러 올라가면 달도 함께 거슬러 올라가고, 물이 소용돌이치면 달도 함께 소용돌이친다. 그러나 그 물의 원뿌리는 달의 정기(精氣)다. 거기에서 나는, 물이 세상 사람들이라면 달이 비춰 그 상태를 나타내는 것은 사람들 각자의 얼굴이고, 달은 태극인데 그 태극은 바로 나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이 만천(萬川)의 밝은 달에 태극의 신비한 작용을 비유하여 말한 그 뜻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또 나는, 저 달이 틈만 있으면 반드시 비춰 준다고 해서 그것으로 태극의 테두리를 어림잡아 보려는 자가 혹시 있다면, 그는 물속에 들어가서 달을 잡아 보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아무 소용없는 짓임도 알고 있다. 그리하여 나의 연거(燕居) 처소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써서 자호(自號)로 삼기로 한 것이다. 때는 무오년(1798, 정조 22) 12월 3일이다.

『홍재전서』권10, 서인3, 만천명월주인옹자서

1)초계문신 제도(抄啓文臣制度) : 37세 이하 젊고 재능 있는 문신들을 의정부에서 뽑아 규장각에 위탁 교육을 시키고, 40세가 되면 졸업시키는 인재 양성 장치를 강구한 제도이다.
1)차대(次對) : 조선 시대 의정부 당상관, 대간, 홍문관 관리 등이 매달 여섯 차례씩 임금 앞에 나아가 정무를 보고하던 일을 말한다.
2)용문(龍門) : 황하(黃河) 상류에 있는 계곡이다. 『후한서(後漢書)』 「이응전(李膺傳)」의 주해(注解)에서는 황하 상류에 용문이라는 계곡이 있는데 근처에 흐름이 빠른 폭포가 있어 그 밑으로 물고기들이 모여들었으나 오릊 못하였으며, 만약 오르기만 하면 용이 된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용문을 오른다는 의미의 ‘등용문(登龍門)’은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여 출세를 하거나 과거에 급제함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3)중국 황화의 지류인 경수(涇水)와 위수(渭水)를 말한다. 이 둘은 시안(西安) 부근에서 합쳐지는데 함께 섞여 흐를 때도 맑고 흐림이 구분된다고 하며, 이로부터 시비를 분간한다는 뜻의 ‘경위(涇渭)’를 가린다는 말이 나왔다.

 次對. 上曰, 領相方製誌文, 先大王事實, 卽均役蕩平濬川也. 蕩平爲五十年大政, 而說去之際, 若只書蕩平二字, 不無混淪之嫌. 至於忠逆之分, 不可不明言, 此直彼枉, 彼客此主之別矣. 予之追奪光, 恒, 億, 亦奉承先朝之意也. 蕩平不害於義理, 義理不害於蕩平, 然後方可謂蕩蕩平平之大義理. 今予所言, 卽義理之蕩平, 非混淪之蕩平也.

『正祖實錄』, 卷1, 卽位年 5月 16日(丙戌)

萬川明月主人翁曰, 有太極而後有陰陽, 故羲繇以陰陽而明理, 有陰陽而後有五行, 故禹範以五行而㫼治, 觀乎水與月之象, 而悟契於太極陰陽五行之理焉. 月一也, 水之類萬也, 以水而受月, 前川月也, 後川亦月也, 月之數與川同, 川之有萬, 月亦如之. 若其在天之月, 則固一而已矣. 夫天地之道, 貞觀也, 日月之道, 貞明也, 萬物相見, 南方之卦也. 南面而聽, 嚮明而治, 予因以有得於馭世之長策. 革車變爲冠裳, 城府洞如庭衢, 而右賢而左戚, 遠宦官宮妾, 而近賢士大夫. 世所稱士大夫者, 雖未必人人皆賢, 其與便嬖僕御之伍, 幻黧晳而倒南北者, 不可以比而同之. ……(中略)…… 予所願者, 學聖人也. 譬諸在水之月, 月固天然而明也. 及夫赫然而臨下, 得之水而放之光也, 龍門之水洪而駛, 鴈宕之水淸而漪, 濂溪之水紺而碧, 武夷之水汩而㶁, 揚子之水寒, 湯泉之水溫, 河淡海鹹, 涇以渭濁, 而月之來照, 各隨其形. 水之流者, 月與之流, 水之渟者, 月與之渟, 水之溯者, 月與之溯, 水之洄者, 月與之洄. 摠其水之大本, 則月之精也. 吾知其水者, 世之人也, 照而著之者, 人之象也, 月者太極也, 太極者吾也. 是豈非昔人所以喩之以萬川之明月, 而寓之以太極之神用者耶. 以其容光之必照, 而儻有窺測乎太極之圈者, 吾又知其徒勞而無益, 不以異於水中之撈月也. 遂書諸燕居之所曰萬川明月主人翁以自號. 時戊午十有二月之哉生明.

『弘齋全書』卷10, 序引3, 萬川明月主人翁自序

이 사료는 『정조실록』의 차대(次代) 관련 기사와 정조(正祖, 1776~1800)가 직접 지은 「만천명월주인옹 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로, 두 사료 모두 정조탕평 원리를 엿볼 수 있다.

첫 번째 사료에서는 정조가 즉위한 해인 1776년, 정조가 선왕인 영조의 업적을 균역(均役)탕평(蕩平)⋅준천(濬川) 세 가지로 꼽고, 그 중 탕평을 으뜸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탕평은 의리에 방해받지 않고 의리는 탕평에 방해받지 않은 다음에야 바야흐로 탕탕평평(蕩蕩平平)이다”라고 하여 혼돈의 탕평이 아닌 의리의 탕평을 추구함을 밝히고 있다. 두 번째 사료인 「만천명월주인옹 자서」는 정조가 재위 21년째인 1797년에 쓴 자서(自序)로,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이 글에서 정조는 백성을 만천(萬川)에 비유하고, 그 위에 하나씩 담겨 비치는 명월(明月)을 “태극이요, 군주인 나”라고 하여 모든 백성에게 직접 닿는 지고지순한 왕정이 자신이 추구하고 실현시킬 목표라는 것을 정리해 보였다.

정조영조 말년 척신 세력의 전횡으로 야기된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켜보았고, 그 후 즉위 직전까지도 척신 세력의 방해로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므로, 즉위 후 외척 세력의 배제를 정치의 첫째 원칙(의리)으로 제시하였다. 이는 특히 사림 정치의 기본 원칙과도 일치하였으므로, 사림계의 청의(淸議)를 존중하는 준론계(峻論係) 정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이끌어 갔던 것이다. 그래서 즉위 초 영조 연간 정국을 주도했던 김귀주(金龜柱, 1740~1786) 계열의 남당(南黨)과 홍봉한(洪鳳漢) 계열의 북당(北黨)으로 불렸던 외척당 세력을 모두 와해시켰다.

정조탕평책은 준론(峻論)의 인물을 중심으로 하였다. 준론탕평완론탕평과는 달리 충역(忠逆)⋅시비(是非)⋅의리(義理)를 중시하였다. 이는 영조 대의 탕평이 세가대족(世家大族)의 화합을 우선시하고 사대부의 화합에는 소극적이었던 데 대한 반성을 토대로 하였다. 정조탕평책은 단순히 정파 간의 인재 보합(保合)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정조는 『대학(大學)』을 새로이 탐구⋅해석하여, 군주권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제왕학을 세웠다. 그 결과 정국 운영은 군주가 주도해야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군주는 사대부를 포함하는 모든 신민을 ‘민은 나의 동포’라는 입장에서 일원적으로 단일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후 소론 준론계를 바탕으로 노론 청류계 정파를 보합하였고, 1788년(정조 12년)에는 남인 출신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을 정승으로 등용하여 노론남인의 균형을 도모하였다. 또한 산림(山林)⋅궁중 세력과의 연결을 차단하고 의리의 탕평을 주장하면서 청명(淸名)을 지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를 위해 규장각을 활성화하고 초계문신 제도(抄啓文臣制度)1)를 실시하여 비노론계의 진출을 꾀하였던 것이다.

정조탕평관은 즉위한 지 20여 년이 지난 1798년(정조 22년) 자신을 “모든 하천에 비치는 밝은 달”이라는 ‘만천명월옹주인’으로 표현한 데서도 잘 나타난다. 즉 “달은 하나이며 물은 수만(數萬)이다. 물이 달을 받으므로 앞 시내(川)에도 달이요, 뒤 시내에도 달이다. 달의 수는 시내의 수와 같은데 시내가 1만 개에 이르더라도 그렇다. 그 이유는 하늘에 있는 달이 본래 하나이기 때문이다. 달은 본래 천연으로 밝은 빛을 발하며, 아래로 내려와서는 물을 만나 빛을 낸다. 물은 세상 사람이며, 비추어 드러나는 것은 사람들의 상(象)이다. 달은 태극(太極)이며, 태극은 바로 나다”라는 의미로 공중에 뜬 밝은 달이 지상의 모든 시내를 비추듯, 태극이라는 정점에 선 자신의 정치가 모든 백성에게 고루 퍼져 나간다는 뜻이다. 또한 붕당의 시시비비를 명확히 가려서 인재를 고루 등용하겠다는 의지도 드러내고 있다. 결론적으로 정조붕당을 신료들이 정국을 주도하는 제도적 장치로 파악하여 이를 배격하고자 하였다. 다시 말하면 군주권을 강화하여 정국 운영은 군주가 직접 주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녔던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정조의 정치와 수원성: 화성건설의 정치적 의미」,『한국과 국제정치』11,박현모,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2001.
「정조대 정국 동향과 화성성역의 추이」,『규장각』19,유봉학,서울대학교 도서관,1996.
저서
『조선후기 탕평정치 연구』, 김성윤, 지식산업사, 1997.
『영조와 정조의 나라』, 박광용, 푸른역사, 1998.
편저
「정조대 탕평정국과 왕정체제의 강화」, 박광용, 국사편찬위원회, 1997.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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