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정치영⋅정조의 개혁 정치

신문고의 부활

(영조가) 국초(國初)에 있었던 전례에 따라 창덕궁의 진선문과 시어소時御所)의 건명문 남쪽에 신문고를 다시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이와 같이 옛 법을 회복한 후에는 차비문(差備門)은 물론이고 길에서 징을 치는 자는 비록 사건사(四件事)1)에 관계된다 하더라도 장(杖)을 때리고, 사건사에 관계되지 않은 자는 호남 해안가의 군역에 충원하라. 비록 신문고를 쳤다 할지라도 만약 사건사가 아니면 형추(刑推)하여 유배 보내고 이 일을 기록하여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하라. 그리고 신문고의 전면과 후면에 ‘신문고’라고 세 글자를 써서 모든 백성이 알게 하라.”고 하였다.

영조실록』권117, 47년 11월 23일(기미)

1)상언(上言)이나 격고(擊鼓)할 수 있다고 허용된 네 가지 일. 곧 적첩 분별(嫡妾分別, 처와 첩을 가리는 일), 형륙 급신(刑戮及身, 형벌이 자기 자신에게 미치는 일), 양천변별(良賤辨別, 양인천인 여부를 가리는 일), 부자분별(父子分別, 부자지간을 밝히는 일)을 가리킨다.

命依國初古例, 復設申聞鼓於昌德宮進善門及時御所建明門南. 敎曰: “如是復舊法之後, 勿論差備, 街道鳴金者, 雖關四件事決杖, 非關四件事者, 湖沿充軍. 雖申聞鼓, 若非四件事, 則刑推定配事, 著爲定式. 鼓前後面皆書申聞鼓三字, 使愚夫愚婦咸知.”

『英祖實錄』卷117, 47年 11月 23日(己未)

이 사료는 1771년(영조 47) 창덕궁 진선문 등에 신문고를 다시 설치한 것과 관련한 기록이다. 신문고는 왕이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직접 들어주고 무질서한 소송의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 대궐 밖 문루 위에 달았던 북을 말한다. 영조는 병조에서 신문고를 주관하게 하고, 이른바 사건사(四件事)와 자손이 조상을 위하는 일, 아내가 남편을 위하는 일, 아우가 형을 위하는 일, 노비가 주인을 위하는 일 및 기타 지극히 원통한 내용에 대해서만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영조신문고를 처음 설치한 것은 아니었다. 신문고는 조선 전기인 1401년(태종 1) 7월 ‘등문고(登聞鼓)’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어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고, 동시에 관리들의 부정한 관행을 사전에 예방하고자 한 것이 기원이다. 이후 한 달 뒤에 신문고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신문고는 여러 차례 폐지되기도 하였으며, 1560년(명종 15)부터 1658년(효종 9)까지는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격쟁제(擊錚制)를 실시하여 신문고를 대신하도록 하였다.

신문고는 국왕의 직속 기관인 의금부의 당직청(當直廳)에서 관장하였다. 신문고를 치기 위해서는 일정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자는 먼저 중앙에서는 주장관(主掌官), 지방에서는 관찰사에게 신고하도록 하였다. 만약 해결이 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2차로 사헌부에 신고하도록 하였는데, 여기서도 해결이 안 되는 경우에 최종적으로 신문고를 치도록 하였다.

신문고의 설치는 민원 해결을 위함이라고 표방하고 있었으나, 보다 근본적인 목적은 왕권에 적대적인 세력을 색출하고 이들을 제거하려는 데 있었다. 이는 반역을 고발한 자를 매우 파격적으로 대우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반역을 꾀한 자를 고발한 자에게는 상으로 밭 200결과 노비 20구를 상으로 주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관직이 있는 자는 3등을 올려 서용하고 무직자에게는 곧바로 6품을 주며, 공사 노비양인화하여 곧바로 7품을 주고, 여기에 범인의 가옥과 재산, 노비, 말과 소를 모두 주겠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상은 1등 공신에게 지급되는 특전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영조 대의 신문고 설치는 당시에 빈번하게 발생하던 격쟁을 통제하려는 측면이 강하였다. 개인적인 사정을 적어 왕에게 올리는 상언은 승정원에서 담당하였고, 궁궐 등에 난입하여 왕에게 하소연하던 격쟁은 형조에서 담당하였다. 영조는 상언과 격쟁을 근본적인 대책 없이 임시 변통적으로 처리하는 관원들의 자세를 질타하면서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 수 있게 하였다. 1744년(영조 20)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에서는 가족이나 조상의 억울한 원한을 해결하는 신원 문제, 수령의 형벌 남용 문제를 상언이나 격쟁으로 호소할 수 있게 하였다.

1777년(정조 1)에는 국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길에서 백성들이 직접 쟁을 두드려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방식인 위외(衛外) 격쟁이 허용되었다. 이후 국왕의 행차가 쉬는 곳에서 기다리다가 상언을 올리거나 쟁을 두드려 호소하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또한 이후에는 백성들이 폐단으로 느끼는 일반적인 사항도 상언과 격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지기도 하였다. 당시 일반 백성들이 느끼는 폐단으로는 부세 문제를 비롯하여 토지 소유권과 땅값 같은 토지 문제 및 상인들이 독점하던 금난전권 같은 문제 등이 있었다. 격쟁은 이후 정치적으로도 활용되었다. 1844년(헌종 10) 과거 시험의 부정과 연관되어 처벌된 민달용(閔達鏞, 1802~?)의 아들 민영직(閔泳稷, 1824~?)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격쟁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민소의 활성화와 민본정치」,『역사비평』37,한상권,역사문제연구소,1997.
「신문고의 설치와 그 실제적 효능에 대하여-태종조 청원⋅상소제도의 성립과 그 실효-」,『이병도박사화갑기념논총』,한우근,일조각,1956.
저서
『조선후기 사회와 소원제도 -상언⋅격쟁 연구-』, 한상권, 일조각, 1996.
편저
「영조대 탕평정국과 왕정체제의 정비」, 박광용, 국사편찬위원회, 1997.
「정조대 탕평정국과 왕정체제의 강화」, 박광용, 국사편찬위원회, 1997.
「세도정치의 전개」, 오수창, 국사편찬위원회, 1997.
「개국초 왕권의 강화와 국정운영체제」, 최승희, 국사편찬위원회, 1995.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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