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정치영⋅정조의 개혁 정치

규장각의 설립과 초계문신제의 시행

규장각(奎章閣)을 창덕궁 금원(禁苑)의 북쪽에 세우고 제학(提學)⋅직제학(直提學)⋅직각(直閣)⋅대교(待敎) 등의 관원을 두었다. 나라에서 관직을 설치하는 것을 모두 송(宋)나라의 제도를 따랐다. 홍문관은 집현원(集賢院)을 모방하였고, 예문관은 학사원(學士院)을 모방하였으며, 춘추관은 국사원(國史院)을 모방하였다. 그러나 유독 왕의 글을 존각(尊閣)에 간직하는 용도각(龍圖閣)이나 천장각(天章閣)과 같은 제도는 있지 않았다.

세조(世祖) 조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양성지(梁誠之)가 아뢰기를, “왕의 글은 은하수와 같이 하늘에서 영원토록 밝게 빛나니 신하들은 마땅히 존각(尊閣)에 소중히 간직하여야 합니다. 그러기에 송조(宋朝)에서는 황제의 글을 으레 모두 전각을 세워서 간직하고 관직을 설치하여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신 등으로 하여금 왕께서 지으신 시문을 살피고 올려서 인지각(麟趾閣) 동쪽 별실(別室)에 모셔 두고 규장각이라 이름 하게 하소서. 또 여러 책을 보관한 내각(內閣)은 비서각(祕書閣)이라 이름 하며, 다 각기 대제학⋅직제학⋅직각⋅응교 등 관원을 두십시오. 당상관은 다른 관직이 겸임하고 낭료(郞僚)는 예문관 녹관(祿官)으로 겸임하게 하여 출납(出納)을 관장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세조가 서둘러 행할 만하다고 하였으나 설치할 겨를이 없었다. 숙종(肅宗) 조에서는 왕들의 글과 글씨를 모셔 두기 위하여 별도로 종정시(宗正寺)에 작은 누각을 세우고 왕이 쓴 ‘규장각’ 세 글자를 게시하였는데, 규제는 갖추어지지 않았다.

정조(正祖)가 즉위하여서는 먼저 선조(先朝)의 편차인(編次人) 구윤명(具允明)⋅채제공(蔡濟恭) 등에게 명하여 관청을 열고 영조(英祖)의 어제를 편집하여 목판에 새기고 영조의 글씨를 본떠 돌에 새겼다. 또 왕이 만드신 글들 가운데 각지에 흩어져 있어 인쇄되지 않은 것은 부서를 설치하여 베꼈다. 그리하여 1본은 원릉(元陵)의 편방(偏房)에 모셔 두고, 1본은 궁궐의 별전(別殿)에 임시로 모시고는 대신을 불러 하교하기를, “우리 선대 왕의 운장(雲章)보묵(寶墨)은 모두 다 소자를 가르쳐 주신 책이니, 존경하며 공경할(尊信敬謹) 바가 어찌 보통 편지에 비할 것이겠는가? 마땅히 하나의 전각을 세워서 송조(宋朝)에서 모셔 두었던 제도를 따라야 하겠으나 역대 왕들의 글과 글씨 가운데 미처 전각에 받들지 못하였던 것을 송조에서 각 왕조마다 전각을 달리하여 모셨던 것과 같게 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한 전각에 함께 모셔 두면 실로 경비를 덜고 번거로움을 없애는 방도가 될 것이다. 아! 담당 관리는 창덕궁의 북원(北苑)에 터를 잡아 설계를 하라.”고 하셨다. 이어 집을 세우고 단청을 입힐 때 힘써 절약하라고 명하셨는데, 3월에 시작한 것이 이때인 9월에 와서 준공되었다.

처음에는 어제각(御製閣)으로 일컫다가 뒤에 숙종숙종이 쓴 현판을 따라 규장각이라 이름 하였는데, 위는 다락이고 아래는 처마집(軒)이었다. 그 뒤에 정조의 초상화⋅글⋅글씨⋅보책(寶冊)⋅인장을 봉안하였는데, 현판은 숙종의 글씨였다. 또 주합루(宙合樓)의 현판을 남쪽 문에 걸었는데, 바로 정조의 글씨였다. 서남쪽에는 봉모당(奉謨堂)이라 하였는데【곧 옛날의 열무정(閱武亭)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 궁궐지(宮闕志)에서는 옛 제도에 따라 고치지 않고, 다만 감탑(龕榻)을 설치하여 모셨다고 되어 있다】, 여러 왕의 글⋅글씨⋅초상화⋅고명(顧命)유고(遺誥)밀교(密敎)선보(璿譜)세보(世譜)보감(寶鑑)⋅장지(狀誌)를 봉안하였다. 정남쪽은 열고관(閱古觀)인데 상하 2층이다. 또 북쪽으로 꺾여 개유와(皆有窩)를 만들었는데, 중국본(本) 도서와 문적을 간직하였다. 정서쪽은 이안각(移安閣)인데 왕의 초상화⋅글⋅글씨를 옮겨 포쇄(曝曬)하는 곳으로 삼았다. 서북쪽은 서고인데 우리나라에서 만든 도서와 문적을 간직하였다.

대신과 이조 당상, 홍문관 관원을 불러서 만난 후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모든 일은 모두 송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였는데 여러 왕의 글은 아직 봉안할 곳이 없었다. 이에 후원(後苑)에 규장각을 세우고 이미 왕의 글들을 모셨으니 관리하는 관원이 없을 수 없다. 당(唐)나라 이상은 학사(學士)의 명칭이 세워지지 않았으므로 승여(乘輿)가 있는 곳에 다만 문사(文詞)나 경학(經學)의 선비로 별원(別院)에 숙직하게 하고 가끔 불러서 여러 문서를 초안하게 하였다. 대개 관제(官制)를 세우고 직무를 분담하여 점차 형세를 갖추어지는 것이 그러하였다. 선조(先朝)에서 편차(編次)하는 사람을 두어 오로지 왕의 글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그 일만 있고 관직은 없었으니 또한 이를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데 이제 여러 왕의 글을 존경하여 모셔 두기 위하여 송나라의 옛 제도를 모방하여 한 전각을 세웠으니, 관원에게 명하여 관리하게 하되 편차한 사람의 이름으로 그 직위를 채우는 것은 진실로 점차 갖추어 가는 의의에도 부합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제학은 곧 송나라의 학사(學士)이고, 직제학은 곧 송나라의 직학사(直學士)이다. 또 당하(堂下)에 직각⋅대교를 둔 것은 송나라의 직각과 대제(待制)를 모방한 것이다. 실시한 것에 근거가 있고 일을 모두 적절하게 처리하였으니 경 등은 그 일이 적당한지 여부를 말하라.”고 하였다. 모두 말하기를, “이 조치는 전모(前謨)를 넓혀 문교(文敎)를 진작시킬 것이니, 전각이 있으면 관원을 두어 관리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홍문관에 명하여 『송사(宋史)』의 관제(官制)를 살펴보고 아뢰게 하고, 하교하기를, “여러 왕이 지은 글 수만 권을 전각을 세워 간직하는 것은 곧 송나라의 용도(龍圖) 등 여러 전각의 의의를 취한 것이다. 내가 지은 글도 또한 (이를) 편차하는 관원이 없을 수 없으니 , 이는 새로 창설한 관제가 아니라 곧 선조에서 편차하던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송나라 제도를 모방하고 우리 조정 관직의 이름을 참고하여 이조(吏曹)로 하여금 개정(開政)한 후 후보자를 추천하여 차출하게 하였다. 그 결과 황경원(黃景源)⋅이복원(李福源)을 규장각 제학으로, 홍국영(洪國榮)⋅유언호(兪彦鎬)를 규장각 직제학으로 삼았다. 제학 2명은 대제학 및 홍문관과 예문관 제학의 통망인(通望人), 직제학 2명은 부제학의 통망인 가운데 이조에서 장망(長望)하여 수점(受點)하게 하고, 송나라 학사⋅직학사의 규례에 의하여 다른 관직으로 겸임하게 하였다.

직각 1명은 일찍이 홍문관에서 근무했던 사람으로 하고, 대교 1명은 한권(翰圈)주천(注薦)⋅설서(說書)의 통망인(通望人)으로서 홍문록(弘文錄)1)과 한권의 예에 의하여 회권(會圈)을 거쳐 계하(啓下)하고 이조에 공문을 보내 차출하게 하였다【이때에는 미처 회권하지 않고 곧바로 후임자를 천거하였다】. 무릇 6명인데 모두 당나라 한림원(翰林院) 육학사(六學士)의 규례를 모방한 것이었다.

하교하기를, “규장각의 제학 이하 관원이 숙배(肅拜)할 때에 홍려(鴻臚)가 찬배(贊拜)하는 것은 송나라의 용도각(龍圖閣) 학사가 편전(便殿)에 전문(箋文)을 올리는 규례를 따른 것이다. 제학 이하가 합문 밖에서 숙배하는 것은 송나라의 처음 제수된 용도각 학사에게 내전(內殿)으로 나가 문안하도록 명하였던 내한(內翰)의 규례와 같이 한 것이다. 이는 곧 우리 조정에서 승정원⋅홍문관이 차비문(差備門) 안에서 문안하는 뜻이다. 정월 초하루와 동지, 그리고 탄일(誕日)의 문안은 송나라의 규례를 따라 모방하여 문안의 예를 합문에서 행하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교외(郊外)에 동가(動駕)할 때에 승지에게 말을 주는 것은 이미 정식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옛날 규례에 별군직(別軍職)에게도 또한 동가 때에 내구(內廐)에서 말을 주었는데 더구나 예로 높여야 할 곳이라면 당연히 그러지 않겠는가? 이 뒤로는 성안이나 성 밖으로 동가할 때에 규장각 제학⋅직제학⋅직각⋅대교 등의 관원은 비록 본직(本職)의 반열에 있더라도 내구마(內廐馬)를 타도록 허락한다.”고 하였다.

정조실록』권2, 즉위년 9월 25일(계사)

내각(內閣)에서 초계문신(秒啓文臣)의 강제 절목(講製節目)을 올렸다.

절목의 내용은 이러하다. 이제 이 문사(文士)들을 선발하여 강제(講製)를 시험하는 것은 대개 인재를 양성하려는 임금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대저 명(明)나라 초기에 있던 문화(文華)의 강제와 우리나라 초기에 있던 독서당의 강제는 전후 같은 법규이다. 더구나 강제의 인원을 비변사에서 뽑아 왕에게 보고하면 독서당에서 연줄 등을 이용하여 벼슬자리를 얻는 폐단이 없게 될 것이고, 내각에서 주관하게 되면, 독서당을 권장하는 실효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대성인(大聖人)이 줄이거나 더한 오묘한 뜻을 짐작하여 그 뜻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니 바야흐로 법을 만드는 처음에는 충분히 면밀하게 해서 만들고 없어짐이 일정치 않았던 독서당처럼 되지 않게 함으로써, 백세(百世)에 전하며 폐단이 없이 지켜지는 방도로 삼아야 한다.

1. 강제 인원은 반드시 문신(文臣)으로 과거에 합격한 후 승문원에 배속되어 실무를 익히는 사람들로 한다. 이 가운데 6품 이상 종3품 이하의 참상(參上)이나 7품 이하의 참하(參下)를 막론하고 모두 의정부에서 상의하여 37세 이하에 한하여 뽑는다. 강제의 시험관은 매달 초하룻날 내각에서 전⋅현직 제학⋅직제학 및 일찍이 직각⋅대교를 지내고 이미 자급(資級)이 승급된 사람들 가운데서 한다. 임금께서 2원(員)을 갖추어 낙점한 다음 그달 안으로 경서를 외우는 고강(考講)과 시험지를 작성하는 고권(考卷)을 맡아서 책임지게 한다. 그리하여 (강제 인원들이) 한편으로는 자신의 일에 전념할 수 있는 효력이 있게 하고, 한편으로는 오래도록 버티면서 해이해지는 폐단을 방지한다.

1. 익힐 강서(講書)는 『대학(大學)』⋅『논어(論語)』⋅『맹자(孟子)』⋅『중용(中庸)』⋅『시전(詩傳)』⋅『서전(書傳)』⋅『주역(周易)』으로 순서를 정하여 돌려 가면서 익히게 한다. 경서(經書)의 강의를 끝낸 뒤에 비로소 『사기(史記)』를 강의한다. 글을 읽는 것은 장차 이를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단지 글만 익힐 뿐 글 뜻에 주안점을 두지 않는다면, 이는 성인이 이른바 “아무리 많이 배운들 또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한 말과 너무도 가깝다. 실로 우리 임금께서 지극 정성으로 권장하는 본뜻이 아닌 것이다. 배우는 강원(講員)들은 평상시에 글을 익히고 글의 뜻을 헤아림에 있어 자세히 하고 익숙해지도록 힘써서 글을 외우는 시험인 시강(試講)에 대비해야 한다.

1. 시강은 매달 순전(旬前)망후(望後)의 두 차례에 걸쳐 행하며, 시험관은 특별한 일이 없는 날로 미리 공지한다. 기일이 되면 시강을 치를 인원을 거느리고 빈청(賓廳)으로 나아가 경서를 외우게 한다. 전적으로 글의 뜻을 위주로 하여 국초에 성균관에서 강의하며 설명하던 예(例)와 같게 한다. 요점을 반복하여 질문함으로써 뜻을 분명히 이해하였는지 파악한다. 시강의 점수는 글을 자세히 알고 익숙하며 글의 뜻을 명백(明白)히 아는 사람을 ‘통(通)’으로 삼는다. 글은 비록 자세히 알고 익숙하더라도 글의 뜻에서 취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은 ‘약(略)’으로 삼는다. 글도 자세히 알거나 익숙하지도 않고 글의 뜻에 있어서도 취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은 ‘조(粗)’로 삼는다. 글도 잘못되고 글의 뜻도 어긋난 사람은 ‘불(不)’로 삼는다. 글이 비록 혹 조금 틀렸더라도 글의 뜻이 같은 무리 중에서 뛰어난 사람에 대해서는 또한 당연히 ‘통’으로 삼는다. 합격자를 발표한 뒤에 시험관 가운데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합격자 명단을 작성하는 것은 무신(武臣)이 빈청에서 강하는 예에 따른다. 승지(承旨) 1원이 나아가서 시험을 감독하고 합격자 명단을 임금에게 올리는 등의 일도 또한 그 예를 적용한다.

1. 강원(講員)은 반드시 매달 강경에 응시[應講]한 뒤 시험관이 질문한 내용과 본인이 대답한 내용을 시강을 마친 다음 날 정리하여 책으로 만든다. 이를 세자가 한 달에 두 번씩 사부 및 여러 관원과 경서를 강론하는 세자시강원 회강(會講) 때와 옥산(玉山)에서 강의할 때 체재와 같이 전체 내용을 상세히 기록한다. 그리하여 1통을 기록해서 내각으로 보내면 내각에서는 즉시 임금에게 올린다. 그런데 만일 기한이 지나도 바치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승정원에서 조사하여 벌을 준다.

1. 읽을 차례가 된 책[當次篇]을 20 첨(籤)으로 나누고 여러 강원이 시강할 범위로 삼는다. 강원이 20명이 안 되는 경우에는 다시 차례가 된 책 가운데에서 임시로 몇 첨을 결정하여 시강하는 날에 써서 (임금에게) 드린다. 정해진 첨들의 범위는 임금의 낙점을 받은 뒤에 강원에게 나누어 준다. 『중용』⋅『대학』은 읽어야 할 범위가 이미 적으니 첨을 나눌 필요 없이 모두 다 읽게 한다. 1. 강원이 읽어야 하는 부분은 차례가 된 책을 인원수에 따라 첨을 나눈다. 강하는 날에 임금께 올려 낙점을 받은 뒤에 강원이 차례에 따라 나누어 읽는다.

1. 문답(問答)과 강론(講論)을 할 즈음에는 이미 배우는 것이 많아서 잊어버리기가 쉽다. 따라서 급책관(給冊官)과 고생관(告栍官)이 즉석에서 질문하는 대로 핵심이 되는 것을 추려서 기록하여 초본(草本)을 만들어서 준다. 시험관과 강원이 시강을 끝내고 나서 이를 가져다 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각기 스스로 윤색하여 정리한다.

1. 강경에 응시하는 인원이 시강한 책은 매달 그믐날 문서로 정리하여 내각으로 보내면 내각에서 임금에게 올린다.

1. 제술 시험은 논(論)⋅책(策)⋅표(表)⋅배율(排律)⋅서(序)⋅기(記) 가운데서 치르는데, 내각에서 기일 하루 전에 논⋅책 등의 제목을 나열하여 낙점을 받는다. 그런 다음 시험관이 들어와서 시험 주제를 삼망(三望)을 갖추어 글로 써서 또 낙점을 받는다. 이를 시험을 보는 이들에게 일제히 알려 매달 시험을 치르는 월과(月課)의 예에 따라 집에서 지어 올리게 한다. 책은 3일을 기한으로 삼고 나머지는 다음 날로 기한을 삼는다. 시권(詩卷)을 풀로 붙여 봉하여 내각에 제출한다. 내각에서는 전⋅현직 관리들 가운데 그달에 낙점받은 시험관을 불러 본각으로 나오게 해서 제출받은 시권을 평가하여 합격자를 발표하게 한다. 그런 뒤에 시험관 가운데 지위가 낮은 사람이 합격자 명단을 정서(正書)하여 사권(司卷)에게 임금께 올리도록 청한다.

1. 강제에 임금이 친림(親臨)하는 것에 대하여 묻는 것은, 제술은 매월 초하루에, 강경은 매월 20일에 본각에서 어느 날 거행한다는 내용으로 임금에게 보고하여 결재를 받아 날짜를 정한다. 그런 다음 시험관은 내각에서 전⋅현직 내각 관원을 나열하여 제출한 후 임금에게 올려 낙점을 받는다. 비록 대신일지라도 일찍이 내각 관원을 역임한 사람이면 또한 제출한다. 강원은 모두가 응시할 필요는 없다. 시험을 볼 사람들을 내각에서 제출하여 낙점을 받으면, 단지 낙점받은 인원만 참여한다.

1. 친림하여 시강을 할 때에는 따로 시험관이 경서 중의 한 장을 정할 필요 없이 전날 시험관이 이미 고강한 것으로 다시 치르게 하되, 그 글의 뜻에 대해서는 전날에 이미 말한 것을 한갓 답습하지만 말고 달리 새로운 뜻을 내어 깨치도록 힘쓴다. 그리고 다음 날 임금과 시험 응시자가 주고받은 말을 상세히 기록하여 내각으로 보내면 내각에서 이를 임금에게 올린다.

1. 만약 시험관이 강을 한 다음 날에 친림하겠다고 특명을 내려도 시험 규정은 한결같이 시관강(試官講)의 예에 따라 거행한다.

1. 시험에 응시한 인원들 가운데 혹 지방관으로 있는 자나 먼 지역에 살고 있는 자가 있으면, 그 강서를 달마다 혹은 서도(書徒)로써 매달 마지막에 내각으로 올려 보내기도 한다. 제술도 또한 내각에서 공문으로 발송하여 지난달 시제(試題) 및 어제(御題)를 강에 대한 문목(問目)과 함께 각각 그 소재처로 빨리 보낸다. 두 번째로 지은 것을 문목(問目) 및 글의 뜻과 함께 그달 말일에 수정한 다음 모두 모아 봉하여 내각으로 올려 보낸다. 이를 추후에 고권(考卷)하고 정생(定栍)하여 함께 임금께 올린다 . 그리고 친림하여 강제할 때에 외지에 있는 인원이 혹 낙점받은 데에 들어 있게 되면, 내각에서 공문을 발송하여 독촉하여 기일에 맞게 올라오게 한다.

1. 강제하는 인원은 비록 관직에서 물러나 있더라도 응시에 구애받지 않으며, 수도 근처의 근기(近畿) 지역에 있는 사람 또한 제때에 올라오게 한다. 여러 사람이 다같이 아는 분명한 이유 이 외에 혹 나오지 않은 자가 있을 경우, 승정원에서는 곧바로 의금부에 넘겨 조사하라는 임금의 명령을 받는다.

1. 시강 때의 서적은 내각에서 명령을 내려 알려 주어 교서관으로 하여금 준비하여 기다리게 한다. 시강할 때의 시험지는 내각에서 감풍저창(甘豊儲倉)에서 받아다가 갖추어 지급한다.

1. 상벌(賞罰)은 곧 감화시키고 격려하는 방법이다. 대제학의 월과(月課)도 또한 상벌이 있는데, 더구나 내각의 강제야 더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시강⋅시제를 막론하고 잇따라 3차례 으뜸을 차지한 자는 참하(參下)이면 6품에 오르게 하고 참상(參上)이면 6품 이상으로 벼슬을 올려 준다. 이미 벼슬이 오른 사람은 준직(準職)하고 이미 준직에 있는 사람은 정3품 이상으로 품계를 올리는 것을 허락한다. 강경에서 잇따라 네 차례 이상 ‘불(不)’을 받고 제술에서 잇따라 네 차례 이상 ‘말(末)’을 받은 경우는 임금께 보고하여 별도로 벌을 논한다. 세 차례 ‘불’을 받고 세 차례 ‘말’을 받은 자는 의금부에서 조사한다. 두 차례 ‘불’을 받고 두 차례 ‘말’을 받은 사람은 심문하도록 하는데, 임금의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려 내각에서 종부시(宗簿寺)와 병조(兵曹)에서 심문하는 예에 따라 즉시 심문하는 내용이 담긴 함문(緘問)을 발송한다. 비록 일찍이 대간과 시종을 지낸 사람일지라도 어길 수 없으며, 일체 모두 법전에 따라 형벌 대신 돈을 내도록 한다. 승정원에서 합격자 명단을 가져다 임금에게 보고하는 예에 따라 임금의 뜻을 받들어 시행한다. 처음에 ‘불’을 받고 ‘말’을 받은 사람은 논하지 않는다.

1. 통생(通栍)이 만약 많을 경우에는, 마땅히 비교가 있어야 한다. 강(講)이든 제(製)든 간에 임시로 임금께 아뢴 후 거행하는데, 강의 불생(不栍)과 제의 외(外)는 모두 ‘말(末)’로 바꾸어 시행한다.

1. 강과 제를 막론하고 나이가 40세가 된 자는 면제할 것을 허락한다.

1. 초계(抄啓) 강원은 모든 문신의 전강(殿講)과 제술(製述) 및 제관에 임명되거나[差祭] 활을 쏘던 시험인 시사(試射) 등의 일에 대해서는 아울러 우선 잠시 보류한다.

1. 강원 가운데 현재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직을 겸임하고 있는 자는 친림하여 강제할 때에 명단에 기록하여 임금에게 올린다. 시험관이 강제할 때에는 다른 강의 예에 따라 참석할 수 없다는 뜻으로 격식을 갖추지 않고 넌지시 알린다.

1. 만약 본각의 전⋅현직 관리의 수효가 적어서 인원을 갖추어 의망(擬望)할 수 없는 경우에는 일찍이 현직 대제학과 제학을 지낸 사람을 함께 의망하여 임금께 올린다. 대신 본각의 전⋅현직 관리의 아래에 나열한다.

1. 친림하여 강제할 때에 ‘불’을 받고 ‘말’을 받은 것은 시험관의 강제 때 ‘불’을 받고 ‘말’을 받은 것과 함께 계산하지 않는다.

1. 시강 때 ‘불’을 받은 자는 다른 전강과 숙강(熟講)의 예에 따르지 않고, 계속해서 신편(新篇)을 강한다. 월과(月課) 책의 순서는 『대학』은 대주(大註)까지 강하며 『논어』는 집주(集註)까지, 『맹자』는 단지 장하주(章下註)만 강한다. 『중용』은 대주(大註)까지 강하며, 『시전』은 단지 육의(六義)의 대지(大旨)만 강한다. 『서전』은 단지 편제(篇題)만 강하며, 『주역』은 단지 서괘(序卦)만 강하게 한다.

하교하기를, “강제의 절목은 이미 재가를 하였으니, 거행할 모든 것에 대해 미리 법식을 정하지 않을 수 없다. 친림할 때 시강에 필요한 고생관⋅급책관⋅강지관은 검서관 가운데서 임금의 재가를 받고, 호명관 또한 검서관을 나누어서 정한다. 각 차비관은 기일 하루 전에 본각에서 1명의 후보자로 명단을 수정하여 올리도록 한다. 어람책(御覽冊)은 내각의 소장본으로 하되, 주석과 토를 달아 참고하며, 틀린 글자는 곁에다 써놓고 다른 음도 준비하여 임금이 보는 것에 대비한다. 시험관과 응시자의 책자를 둘 때에는 맡아서 출납하는 것은 사권(司卷)과 영첨(領籤) 가운데서 2인이 맡도록 한다. 시제 때의 입문관(入門官)⋅수권관(收券官)은 검서관 가운데서 임시로 하게 한다. 빈청에서 강할 때에도 또한 이 예를 모방하여 거행한다. 복색은 비록 친림할 때라도 모두 공무를 행할 때 입는 시복(時服)으로 하고, 시험관은 강관을 거느리고 단지 사배례(四拜禮)만을 행한다. 문제를 발표할 때에 임금이 하교하는 절차는 빠뜨릴 수 없다. 이때에는 입시한 승지가 전교관(傳敎官)이 되며, 단지 찬의(贊儀) 1인과 동서(東西)에서 호창(呼唱)하는 인의(引儀) 각각 1인이 대령한다. 이는 임금이 정사를 보거나 백관의 인사를 받는 자리가 아니나, 모든 각사(各司)에서 진상하는 물품과 관계된 것은 절대로 대령하지 말라는 일을 각 기관에 분부하게 하라.”고 하였다.

정조실록』권11, 5년 2월 18일(신유)

초계문신(抄啓文臣)의 강제(講製)에 관한 추가 절목(節目)을 반포하였다.

규장각(奎章閣)에서 문신의 강제에 관한 추가 절목을 써서 올렸다.

1. 강제의 조건은 모두 원래 절목에 따라 시행한다. 강경(講經)과 제술(製述) 가운데 각각 잘하는 것이 있게 마련이라서 강경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제술도 잘하는 것은 아니며, 제술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강경도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강제 인원을 뽑은 뒤 강경에 응시하거나 제술에 응시하는 것을 모두 자신의 뜻에 따라 나누게 한다.

1. 시강(試講)과 시제(試製)를 막론하고 너무 드물게 하면 해이해지는 조짐이 있게 되고, 너무 자주하면 익힐 틈이 없게 된다. 매달 제술은 임금이 직접 시험장에 나오는 친시(親試) 1차, 정기적으로 보는 과시(課試) 1차로 하여 차수(次數)를 이미 3분의 1로 줄였다. 강경은 단지 과강(課講) 1차로 마련하였기 때문에 우둔하고 거칠어질 우려가 없지 않다. 강책(講冊)의 범위는 매 차마다 앞의 절목 가운데서 첫 번째 것과 두 번째 것을 합쳐 모두 1차로 한다.

1. 강경과 제술로 나눈 것은 비록 각기 그 잘하는 것을 취하게 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공부에 실효가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한갓 강경만 잘하고 제술은 못하며, 제술만 잘하고 강경은 못하는 것은 옳지 않다. 따라서 강경에 응시하는 사람은 매달 친시할 때에 일제히 제술에 응시하게 한다. 제술에 응시하는 사람은 사맹삭(四孟朔)의 과강 때 일체로 강경에 응시하게 한다. 강책(講冊)의 범위는 모두 새로 정한 법식에 따라 거행하게 한다.

1. 글의 뜻에 정통한 사람이 반드시 구두(句讀)에 익숙한 것은 아니니, (제술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강경에 응시하는 사람들은 모두 책을 펴 놓고 강경을 하는 임강(臨講)을 허락한다. 다만 그 식견이 기발하고 논증이 깊고도 넓은 것만을 취한다. 강경에 응시하는 사람들에 이르러서는 이미 경(經)의 연구에 전심을 다하였으니, 깊이 생각하고 탐구하는 여가에 남은 힘으로 충분히 암송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모두 책을 보지 않고 강경을 하는 배송(背誦)을 규칙으로 정한다.

1. 강경에 응시하는 사람들이 공령(功令)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 겉치레를 거두고 내실(內實)을 이루게 하기 위해 자원하여 강경에 응시하게 한다.칠서(七書)를 깊이 이해하게 된 뒤에는 그 실력이 이미 풍부해져 글을 짓는 재주가 날로 새로워져서, 밖으로 발현되는 시나 문장이 반드시 성대하여 볼만한 것이 많을 것이다. 이 뒤로는 강원(講員) 가운데 나이가 가장 어린 자는 칠서를 다 강경한 뒤에 제술로 옮기게 한다.

정조실록』권11, 5년 3월 10일(계미)

1)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교리⋅수찬을 임명하기 위한 1차 선거(選擧) 기록이다. 먼저 7품 이하의 홍문관원(弘文館員)이 적당한 사람의 명단을 만들고 이어 부제학 이하 여러 사람이 모여 적합한 사람의 이름 위에 권점(圈點)을 찍는데, 이것을 기록하는 것을 홍문록이라고 한다.

建奎章閣于昌德宮禁苑之北, 置提學⋅直提學⋅直閣⋅待敎等官. 國朝設官, 悉遵宋制. 弘文館倣集賢院, 藝文館倣學士院, 春秋館倣國史院. 而獨未有御製尊閣之所, 如龍圖⋅天章之制. 世祖朝同知中樞府事梁誠之奏曰: “君上御製, 與雲漢同, 其昭回萬世, 臣子所當尊閣而寶藏. 故宋朝聖製, 例皆建閣而藏之, 設官以掌之. 乞令臣等勘進御製詩文, 奉安于麟趾閣東別室, 名曰奎章閣. 又諸書所藏內閣, 名曰祕書閣, 皆置大提學⋅直提學⋅直閣⋅應敎等官. 堂上以他官帶之, 郞僚以藝文祿官兼差, 俾掌出納.” 世祖亟稱其可行, 而設施則未遑也. 肅宗朝爲奉列聖御製御書, 別建小閣于宗正寺, 御書奎章閣三字揭之, 而規制則未備也. 上卽阼, 首命先朝編次人具允明⋅蔡濟恭等開局. 編英考御製, 鋟于梓, 摸英考御墨, 刻于石. 又以御製之散在中外, 未及鋟梓者, 設局謄寫. 一本奉藏于元陵之便房, 一本權安于大內別殿, 召大臣敎曰: “我先大王雲章寶墨, 皆敎詔予小子之篇, 所以尊信敬謹, 豈尋常懷簡之比? 宜建一閣, 以追宋朝虔奉之制, 而列祖御製御筆之未及尊閣者, 不必如宋朝之每朝異閣也. 同奉一閣, 實爲省費祛繁之道. 咨爾有司, 其卽昌德之北苑而營度之.” 仍命棟宇丹艧, 務從儉約. 三月經始, 至是工告完. 初稱御製閣, 後因肅廟御扁, 名奎章閣. 上樓下軒. 後奉當宁御眞⋅御製⋅御筆⋅寶冊⋅印章, 其扁肅廟御墨也. 又以宙合之扁, 揭于南楣, 卽當宁御墨也. 西南曰奉謨堂,【卽古閱武亭. 載《輿地勝覽》《宮闕志》, 因古制不改, 但設龕榻分奉.】奉列朝御製⋅御筆⋅御畫⋅顧⋅命遺⋅誥密敎及璿譜⋅世譜⋅寶鑑⋅狀誌. 正南曰閱古觀, 上下二層. 又北折爲皆有窩, 藏華本圖籍. 正西曰移安閣, 爲御眞⋅御製⋅御筆移奉曝曬之所也. 西北曰西庫, 藏東本圖籍. 召見大臣⋅吏曹堂上⋅玉堂, 上曰: “我朝凡事, 皆倣宋制, 而列朝御製, 尙無奉安之所. 斯建奎章閣于後苑, 旣奉御製, 則不可無所掌之官. 由唐以上, 學士之名未立, 乘輿所在, 但以文詞經學之士, 直於別院, 時召以草制. 蓋建官分職, 以漸而備勢則然也. 先朝編次人之設, 專掌御製, 有其事無其官, 亦由是也. 而今爲列聖御製之尊奉, 倣宋舊制創建一閣, 則命官典守, 以實編次人之名, 允合漸備之義. 我朝提學, 卽宋之學士, 直提學卽宋之直學士. 又於堂下置直閣待敎, 以倣宋之直閣待制. 則設施有據, 通變咸宜, 卿等其陳便否.” 僉曰: “是擧也可以宏前謨, 可以振文敎, 有閣則有官, 以典守之, 不可己也.” 命玉堂, 考奏《宋史》官制. 敎曰: “ 列朝御製累萬卷, 建閣藏之, 卽宋朝龍圖等諸閣之義也. 予之所製, 亦不可無編次之官, 此非新創官制, 卽先朝編次人也.” 倣之宋製, 參以我朝官名, 令吏曹開政差擬. 以黃景源⋅李福源爲奎章閣提學, 洪國榮⋅兪彦鎬爲奎章閣直提學. 提學二員, 以文衡及兩館提學通望人, 直提學二員, 以副提學通望人. 自吏曹長望受點, 依宋學士直學士例, 以他職兼之. 直閣一員, 以曾經玉署人, 待敎一員, 以翰圈注薦說書通望人, 依弘文錄翰圈例會圈啓下, 移文吏曹差出,【是時未及會圈直爲差擬.】凡六員, 皆倣唐翰林院六學士之例也. 敎曰: “奎章閣提學以下官肅拜時, 鴻臚贊拜, 依宋之龍圖閣學士, 進箋於便殿之例. 提學以下肅拜於閤門外, 宋之初拜龍圖閣學士, 命赴內殿起居, 如內翰之例. 卽我朝政院玉堂, 問安於差備內之意也. 正至誕日問安, 遵倣宋朝之列, 行起居之禮於閤門.” 又敎曰: “郊外動駕, 承旨給馬, 旣有定式. 而古例別軍職, 亦於動駕, 內廐給馬, 況尊禮之地乎? 此後城內城外動駕, 奎章閣提學⋅直提學⋅直閣⋅待敎等官, 雖在本職之班, 許乘內廐馬”

『正祖實錄』卷2, 卽位年 9月 25日(癸巳)

內閣進《抄啓文臣講製節目》.【節目曰: “今此選文士課講製, 蓋出於作成人才之聖意與! 夫明初文華之講製, 國初湖堂之講製, 前後一揆. 而況講製人員, 自廟堂抄啓, 則無湖堂奔競之末弊, 自內閣主管, 則有湖堂勸奬之實效. 有以仰大聖人斟酌損益之微旨, 則方當設法之初, 不可不十分縝密, 使不如湖堂之作輟無常, 以爲傳百世遵守無弊之道. 一, 講製人員, 則必以文臣槐院分館中. 勿論參上⋅參外, 自政府相議, 限三十七歲以下抄啓. 而講製試官, 則每月初一日, 自內閣列書提學⋅直提學之時原任及曾經直閣⋅待敎之已陞資者. 大啓備二員受點, 專管當月內考講考券之事. 一以寓專一責成之效, 一以防持久懈弛之弊. 一, 講書則以《大學》⋅《論語》⋅《孟子》⋅《中庸》⋅《詩傳》⋅《書傳》⋅《周易》爲之次序, 輪回肄習, 經書畢講後, 始《史記》. 而讀書, 將以致用. 若只習句讀, 不主文義, 則殆近於聖人所謂: ‘雖多, 亦奚以爲也?’ 實非我聖上至誠勸奬之本意. 講員等平居肄習句讀, 發難文義, 務要精熟, 以待試講. 一, 試講每月旬前⋅望後二次行之, 而試官以無故日, 預爲出令. 及期率應講人員, 詣賓廳考講. 而專以文義爲主, 如國初成均講說之例. 而要使反覆質問, 期於通透貫徹. 其栍之高下, 則句讀精熟, 文義明白者, 爲通. 句讀雖精, 文義無取者, 爲略. 句讀不精, 文義無取者, 爲粗. 句讀訛謬, 文義舛誤者, 爲不. 而至於句讀, 雖或少錯, 文義超出等夷者, 亦當爲通. 出榜後試官之下位, 正書榜目, 依武臣賓廳講例. 承旨一員進去監試, 榜目入啓等事, 亦用其例. 一, 講員必於每月應講之後, 以試官發問之說及自家辨析之言, 講退翌日, 箚錄成篇. 如春坊會講說話及玉山講義之體說, 記首尾. 正書一通, 送于內閣, 卽爲入啓. 而如有過限不納者, 自政院察推. 一, 當次篇中, 分二十籤, 以爲諸講員所講自止. 而講員若不滿二十, 則更就當次篇中, 臨時酌定幾籤, 而講日書入. 所定諸籤自止, 受點後, 分給講員. 《庸》⋅《學》則自止旣少, 不必分籤, 皆令盡讀. 一, 講員所讀自止, 就當次篇中, 隨員數分籤. 講日入啓, 受點後, 講員依次分讀. 一, 問答講論之際, 旣多說話, 易致遺忘, 而給冊官⋅告栍官, 卽席隨問撮記, 大綱成給草本, 則試官⋅講員講退, 取見正其訛謬, 各自修潤. 一, 應講人員所講之書, 每月晦日, 修書徒送于內閣入啓. 一, 試製, 以論⋅策⋅表⋅排律⋅序⋅記中, 自內閣, 前期一日, 列書論策等題名, 受點. 後試官入來, 具三望書啓, 又受點. 念一知委於祿選人員, 依月課例, 在家製進. 而策則三日爲限, 其餘則翌日爲限. 糊封試券, 呈于內閣. 則自內閣牌招時原任中, 當月受點之試官詣本閣, 考券出榜後. 試官之下位, 正書榜目, 請司卷入啓. 一, 親臨講製取稟, 製則每月初一日, 講則每月二十日, 自本閣以何日擧行之意, 稟旨定日後, 試官則自內閣, 列書時原任閣臣, 入啓受點. 而雖大臣曾經閣臣者, 亦爲書入. 講員不必全數應試. 被選人自內閣書啓受點, 只受點人員入參. 一, 親臨試講時, 不必別出講章, 以前日試官之所已考講者, 更爲應講. 而其文義毋徒循襲前日之已言者, 別出新意, 務令警發. 而翌日該記上下酬酢, 送于內閣入啓. 一, 若於試官講次之日, 特命親臨, 則講規一依試官講擧行. 一, 被選人員中, 或有外任者, 或有遠地原在外者, 則其講書, 逐朔或書徒每月終上送內閣. 製述亦自內閣, 發關賫送前月試題及御題與講問目于各其所在處. 二次所製與問目⋅文義, 待當月終修正, 都封上送于內閣. 以爲追後考卷定栍, 同爲入啓. 而親臨講製時, 在外人員或入於受點, 則自內閣發關, 催促及期上來. 一, 講製人員, 雖在罷散中, 勿拘應試. 在近畿人, 亦令趁期上來. 衆所共知, 實故外, 或有不進者, 則政院直捧禁推傳旨. 一, 試講時書籍, 自內閣知委外閣, 使之備待. 試製時試紙, 自內閣捧甘豊儲倉備給. 一, 賞罰, 乃所以風動激勵也. 文衡月課亦賞罰, 則況於內閣講制乎? 勿論試講⋅試製, 連三次居首者, 參下陞六, 參上六品以上陞敍. 已陞敍者準職, 已準職者許加資. 而講之連四次居不, 製之連四次居末以上, 稟旨別樣論罰. 三次居不者, 三次居末者, 禁推. 二次居不者, 二次居末者, 推考, 待傳旨啓下, 自內閣依宗簿寺⋅兵曹推考例, 卽爲發緘. 雖曾經臺侍者, 毋得違越, 一幷依法典收贖. 自政院取考榜目, 依例捧傳旨施行. 初次居不⋅居末者, 勿論. 一, 通栍若多, 則當有比較. 講製間臨時稟旨擧行, 而講之不栍製之外, 更竝以居末施行. 一, 勿飭講製, 年滿四十者許免. 一, 抄啓講員, 凡文臣殿講⋅製述及差祭⋅試射等事, 幷安徐. 一, 講員中時帶臺職者, 親臨講製時, 單子中懸錄入啓. 試官講製時, 依他講例不得入參之意微稟. 一, 本閣時原任若値數少, 將不得備員擬望, 則曾經時任文衡⋅文任, 同爲擬望入啓. 而列書於本閣時原任之下. 一, 親臨講製時, 居不⋅居末, 勿與試官講製居不⋅居末通計. 一, 試講時居不者, 勿依他殿講⋅熟講例, 講新篇. 月課冊名次第, 《大學》幷講大註, 《論語》幷講集註, 《孟子》只講章下註. 《中庸》竝講大註, 《詩》只講六義大旨. 《書》只講篇題, 《易》只講序卦.”】敎曰: “講製節目, 旣已啓下, 凡百擧行, 不可不預爲定式. 親臨時, 講則告栍官⋅給冊官⋅講紙官⋅檢書官中, 啓下, 呼名官, 亦以檢書官分定. 各差備官, 前期一日, 自本閣單望⋅單子, 修正入啓. 御覽冊, 以內閣所藏本, 朱吐考校, 誤字旁書, 異音備置, 以待御覽. 及試官⋅講官冊子入置時, 句管出納, 則司卷⋅領籤中二人差定. 製則入門官⋅收券官, 以檢書官, 臨時啓下. 賓廳講時, 亦倣此例擧行. 服色, 則雖於親臨時, 皆時服. 試官率講官, 只行四拜禮. 懸題時, 宣敎節次, 不可闕. 此則入侍承旨爲傳敎官, 只贊儀一人, 東西唱引儀各一人待令. 此非殿座, 凡係各司進排, 切勿待令事, 分付各該司.”

『正祖實錄』卷11, 5年 2月 18日(辛酉)

頒抄啓文臣講製追節目.【奎章閣書進文臣講製追節目. 一, 講製條件, 竝依原節目施行. 講與製各有所最長. 長於講者, 未必長於製, 長於製者, 未必長於講. 自今講製抄啓後, 應講及應製, 幷從自願分屬. 一, 無論試講與試製, 太簡則有懈弛之漸, 太數則無肄習之暇. 每朔製, 則親試一次, 課試一次, 而次數旣減三分之一. 講則只課講一次磨鍊, 則不無作輟魯莾之慮. 講冊自止, 每次以前節目中, 初再次合竝爲一次. 一, 講製分屬, 雖出於各取所長, 實下工夫. 而亦不宜徒講而不製, 徒製而不講. 應講諸員, 則每朔親試時, 一體應製. 應製諸員, 則四孟朔課講時, 一體應講. 而講冊自止, 竝依新定式擧行. 一, 精於文義者, 未必習於句讀, 應講諸員, 幷許臨講. 但取其識解之警拔, 考據之淹博. 至於應講諸員, 旣使專意於硏經, 則覃思探賾之暇, 餘力足以成誦. 竝以背誦定式. 一, 應講諸員, 非謂不嫺功令, 姑欲斂華就實, 自願應講. 而及其瀜通七書之後, 精力旣富, 藻思日新, 英華之叢於外者, 必多蔚然可觀. 此後講員中, 年紀最少者, 七書畢講後, 移付製述.】

『正祖實錄』卷11, 5年 3月 10日(癸未)

이 사료는 1776년(정조 즉위년) 규장각(奎章閣)의 설치와, 이후 규장각이 확대 개편되면서 시행된 초계문신제와 관련한 기사이다. 규장각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 치세 동안 정권의 핵심 기구로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창덕궁 후원에 위치한 규장각은 본래부터 규장각이란 명칭을 가지고 설치된 것은 아니었다. 처음 이 전각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정조가 즉위한 1776년 3월 10일 바로 다음 날로, 정조의 명에 따라 창덕궁 후원의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에 두 채의 건물을 신축하였다. 하나는 2층 건물로 위층은 주합루(宙合樓), 아래층은 어제존각(御製尊閣)이라고 하였으며, 다른 건물은 서향각(書香閣)이라는 서재 용도의 건물이었다.

이들 두 채의 건물이 거의 완공될 즈음 정조는 역대 선왕들의 초상화인 어진이나 글인 어제 등을 보관하기로 하였던 어제존각에 자신의 어진과 어제를 보관하게 하였다. 그 대신 역대 선왕의 어진이나 어제를 보관하기 위해 별도의 건물인 봉모당(奉謨堂)을 만들도록 하였다. 어제존각의 명칭도 규장각으로 바꿨는데, 규장각의 ‘규장(奎章)’은 군주의 별자리, 또는 군주가 지은 글을 뜻하였다. 이렇게 규장각으로 명칭을 바꾼 이유는 자신 내지는 왕실의 위상을 제고하고, 나아가 이곳을 자신이 구상한 왕정의 근원지로 삼으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설치 이후 정조의 어진과 어제를 보관하던 규장각은, 정조가 친정을 시작하는 1781년(정조 5) 2월부터 정치적 비중이 확대되었다. 정조는 즉위 후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도왔던 홍국영(洪國榮, 1748~1781)을 정치 전면에 내세워 여러 정적을 제거해 나갔다. 그 대신 자신은 규장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정국 구상을 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홍국영이 자신의 권력을 믿고 다른 뜻을 품은 사실이 드러나자, 정조는 당시 39세이던 홍국영을 봉조하(奉朝賀)에 제수하는 것으로 그를 정치권에서 축출하였다. 봉조하란 관직은 원로대신들을 대우하기 위해 특별히 제수하던 관직으로, 실제 정치에는 참여하지 않는 관직이었다. 홍국영을 축출한 후 정조는 비로소 정치 전면에 나섰고, 이때부터 규장각의 정치적 비중도 확대되었다. 정조는 우선 종1품 제학 이하의 규장각 신료들에게 본 업무 이 외에 홍문관이나 예문관, 승정원 등 왕의 측근들이 담당하던 일이나 글을 짓는 일 등을 겸임하게 하였다. 동시에 이들의 집무 장소로 이문원이란 건물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이문원을 열던 날, 정조는 이곳과 홍문관 두 곳에서 중국 송(宋)나라의 고사에 따라 엄격한 격식을 갖추어 『근사록』과 『심경』을 교재로 하여 경연의 일종인 친강(親講)을 열었다. 그런데 이때의 경연을 마지막으로 정조경연을 더 이상 열지 않았다. 그 대신 조정의 젊은 문신 가운데 37세 이하로서 능력 있고 자질이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일정 기간 동안 규장각에서 공부하도록 하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다. 경연 제도는 경서와 역사의 토론이 이루어졌지만 어디까지나 신료와 학자들이 교육자의 입장에서 왕을 가르치고, 왕이 배운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지 질문을 통해 확인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반면 초계문신제는 왕이 적극적으로 신하들에게 학문의 도야를 명령하고 그 기회를 제공하는 제도였다. 정조가 이러한 제도를 만든 것은 매우 의미 있는 변화였다. 정조는 방대한 독서량을 소화하여 경연 자리에서 오히려 신하들을 압도하고 토론을 주도적으로 끌어나갔으며, 이 과정에서 자신이 신하들로부터 강론을 듣는 것보다 신하들의 학문 역량을 끌어올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였다. 평소 젊은 문신들이 과거 급제 후 책을 보지 않는 풍조를 우려하였던 그는 이러한 초계문신제의 실시를 기회로 분위기를 일신해 보려고 하였다.

정조는 왕위에 있는 동안 10회의 초계문신제를 시행해 약 100여 명에 달하는 인재를 선발해 교육하였다. 초계문신 교육은 시강(試講)과 시제(試製)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시강은 4서 3경을 대상으로 하며 한 달에 2차례 이루어졌다. 시제는 논(論), 책(策) 등을 대상으로 매달 한 차례 이루어졌다. 규장각에서 일정 기간 교육을 받은 후 선발된 문신들은 지방의 수령→중앙의 중견 실무급인 낭관직→지방 장관인 관찰사→중앙의 당상관 등을 거쳤다. 이러한 초계문신제를 통해 정조는 개혁 정치를 위한 자신의 지지 세력을 양성하였으며 , 선발된 문신들이 지방과 중앙의 다양한 관직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현실 정치 감각을 키울 수 있도록 하였다.

정조의 지지 세력을 양성하는 기관이었던 규장각정조 사후 커다란 타격을 받아 그 기능이 크게 위축되어, 왕실 문서를 보관하는 도서관의 기능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후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 대에 일시적으로 그 기능이 강화된 적이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왕실의 도서관 기능만을 수행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규장각 연구; 정조대의 정국과 관련하여」(상⋅하),『대구사학』29,설석규,대구사학회,1986.
「정조-유학적 계몽군주」,『한국사시민강좌』13,이태진,일조각,1993.
「규장각 초계문신 연구」,『규장각』4,정옥자,서울대학교 규장각,1981.
저서
『정조의 제왕학』, 김문식, 태학사, 2007.
『규장각 -그 역사와 문화의 재발견』, 김문식 외,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09.
『조선후기 탕평정치 연구』, 김성윤, 지식산업사, 1997.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정옥자, 효형출판, 2001.
『문화정치의 산실 규장각』, 한영우, 지식산업사, 2008.
편저
「정조대 탕평정국과 왕정체제의 강화」, 박광용, 국사편찬위원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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