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정치조선 후기 청과의 관계

후금에 대한 주화론

강화(講和)를 하여 (국가를) 보존하는 것보다 차라리 의를 지켜 망하는 것이 옳다고 했으나 이것은 신하가 절개를 지키는 데 쓰이는 말입니다. ……(중략)……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경망하게 큰소리를 쳐서 오랑캐의 노여움을 도발, 마침내는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묘사직에 제사 지내지 못하게 된다면 그 허물이 이보다 클 수 있겠습니까 ……(중략)…… 늘 생각해 보아도 우리의 국력은 현재 바닥나 있고 오랑캐의 병력은 강성합니다. 정묘년(1627)의 맹약을 아직 지켜서 몇 년이라도 화를 늦추고, 그동안을 이용하고 인정을 베풀어 민심을 수습하고 성을 쌓으며, 군량을 저축하여 변방의 방어를 더욱 튼튼하게 하되 군사를 집합시켜 움직이지 않으며 적의 허점을 노리는 것이 우리로서는 최상의 계책일 것입니다.

『지천집』권11, 차, 병자봉사 제3

又曰, 來喩云與其講和而存, 無寧守義而亡, 此乃人臣守節之言耳. ……(中略)…… 夫不自量力, 輕爲大言, 橫挑犬羊之怒, 終至於生靈塗炭, 宗社不血食, 則其爲過也孰大於是. ……(中略)…… 常竊以爲國力方竭, 虜兵尙強, 姑守丁卯之約, 以緩數年之禍, 得以其間, 發政施仁, 收拾民心, 築城儲糧, 益固邊備, 斂兵不動, 以觀彼釁, 爲我國計.

『遲川集』卷11, 箚, 丙子奉事 第3

이 사료는 1636년(인조 14년)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이 당시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는 논리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주장인 주화론(主和論)을 임금에게 올린 글이다. 최명길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1605년(선조 38년) 문과에 급제, 승문원을 거쳐 성균관 전적⋅이조판서와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1623년(인조 1년)에는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지기도 하였다. 정묘호란(1627) 당시부터 주화론을 주장했고, 병자호란 때도 주화론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켜 청나라와 화의를 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친명 정책으로 외교정책을 선회했는데, 이는 후금과의 외교 관계를 경색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 후금이 정묘호란을 일으켜 침략해 오자 인조(仁祖, 재위 1623~1649)는 강화도로 천도했으나, 최명길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형제의 관계 화약을 맺었다. 그러나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군신 관계를 요구해 오자 조선 조정에서는 극렬한 논쟁 끝에 주전론이 우세해졌다. 이에 1636년 청이 재차 침입하여 병자호란이 발발하였으며,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인조와 조정 대신들 사이에 주전주화 논쟁이 계속되었으나 결국 인조삼전도에서 항복함으로써 이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최명길로 대표되는 주화파는 인조반정 공신이 주축이었다.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서인 정권의 주화파로서는 정권 유지가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청과의 화의 교섭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던 최명길이 이후 명과 비밀 외교를 계속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이런 사실을 잘 파악할 수 있다.

병자호란 이후 인조는 청나라 중심의 국제 질서를 인정했지만, 내부적으로 주전론자들의 명예회복 조치로 소중화 의식의 유교적 정당성을 옹호하였다. 이런 조치는 취약한 군주권에 대한 충성심을 강화하고 유교적 지배 질서를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그러나 이후 조선의 정치에서는 주전론이 계속 우세하여 현실 정치의 실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유교적 정당성에 얽매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시대의 대외전쟁과 유교적 화⋅전론」,『동양정치사상』5-2,부남철,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2005.
「병자호란 패전의 정치적 파장: 청의 조선압박과 인조의 대응을 중심으로」,『동방학지』119,한명기,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2005.
편저
「병자호란」, 이장희, 국사편찬위원회,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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