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정치조선 후기 청과의 관계

송시열의 북벌론

이른바 ‘정사를 닦아 이적(夷狄)을 물리치라’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자가 『춘추(春秋)』를 지어 대일통(大一統)의 의리를 천하 및 후세에 밝힌 뒤로 혈기가 있는 부류라면 모두 중국은 존중해야 하고 오랑캐(夷狄)는 추하게 여겨야 할 것임을 알았습니다. 주자가 또 인륜을 미루어서 생각하고 천리(天理)를 깊이 따져 부끄러움을 씻는 의리를 밝히기를, “하늘은 높고 땅은 낮은데 사람은 그 가운데 위치하였다. 하늘의 도는 음양에서 벗어나지 않고, 땅의 도는 유강(柔剛)에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仁)과 의(義)를 놓아 버리고서는 또한 사람의 도를 세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은 부자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의는 군신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이를 삼강(三綱)의 요체요, 오상(五常)의 근본이라 이른다. 인륜은 천리의 지극함이며 천지의 사이에서 벗어나는 바가 없으니,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는 한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늘이 덮어 주고 땅이 실어 줌에 무릇 임금과 신하⋅아버지와 아들의 성품이 있는 것은 지극히 통탄해 마지않는 동정(同情)에서 비롯된 것이지, 한 몸의 사사로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생각하기를 ‘이 한 글자, 한 글귀가 혹시라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으면 예악(禮樂)이 썩어서 더러운 흙에 빠지고, 사람의 도가 짐승과 같이 되어 구제할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는 우리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과 동시에 창업하여 곧 군신(君臣)의 의리를 정하였으니, 소국을 사랑하는 은혜와 충정(忠貞)의 절의가 거의 300년 동안 침체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저번에 추악한 오랑캐가 마구 흉악을 부려 온 나라가 함락되어 당당한 예의지국이 온통 비린내로 더럽혀졌으니, 당시의 일을 차마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연달아 갑신년(1644, 인조 22)의 변란을 만나서 황경(皇京)이 전복되는 바람에 천하에 임금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비록 이 오랑캐의 소행이 아니라 하나 시기에 편승하여 악을 마구 부려 우리의 침묘(寢廟)를 쓸어 버리고 우리의 황족(皇族)을 섬멸하였으니, 가슴 아픈 일입니다.홍광제(弘光帝)에 이르러 남쪽에서 즉위하여 대통(大統)이 존재하고 있으니, 우리나라가 비록 빙향(聘享)의 예를 행한 일은 없으나 이는 우리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혈족인데, 군신(君臣)의 큰 의리를 어찌 멀리 있다고 하여 거리를 두겠습니까.

그런데 어찌 하늘이 재앙을 계속 내려 역적 오랑캐가 다시 시역(弑逆)을 자행할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해와 달이 비치고 서리와 이슬이 떨어지는 곳에 사는 천명의 인륜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그들과 한 하늘 밑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의리를 가지지 않은 자가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신종 황제의 은혜를 힘입어 임진년의 변란에 종사가 이미 폐허가 되었다가 다시 존재하게 되었고, 백성이 거의 다 없어질 뻔하다가 다시 소생되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백성의 머리털 하나까지도 황제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크게 원통해 하는 것이 온 천하에 그 누가 우리와 같겠습니까? 더구나 광해군(光海君)이 인륜의 도리가 없어서 강홍립(姜弘立)⋅김경서(金景瑞)로 하여금 전 군사를 오랑캐에 투항케 하여 천하 사람들이 우리더러 다 같이 오랑캐가 된다고 말하게 하였는데, 우리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정의를 내걸고 반정(反正)을 하여 더러운 오점을 통쾌하게 씻어서 해와 별처럼 밝은 세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니 한 나라의 백성은 길이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대행 대왕께서 지성으로 명나라를 섬겨 늘 은혜를 입어 언제나 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묘년(1627, 인조 5) 이후로 갑자기 북로(北虜)에게 위협을 당하여 울분을 참고 충절을 나타내지 못하였습니다. 정축년(1637, 인조 15) 이후의 일은 절대 신하로서는 차마 말할 바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오랑캐에게 원병을 보내는 일을 앞에서 보아야만 했고 정역(鄭逆)이 항례(抗禮)할 때도 끝내 처단하지 못하였으니, 신하가 한 번 죽는 것이 이처럼 어렵단 말입니까?

아, 선왕(先王)의 성대한 덕의(德義)로써 이런 큰 변란을 만나, 병력은 약하고 장상(將相)은 용렬하여 끝내 황상의 원수를 섬기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항복하여 신하가 된 큰 수치를 씻지 못한 채 오랫동안 울분을 억누르다가 신무(神武)를 끝내 펴 보지 못하셨으니, 수명을 오래 누리지 못하신 것은 필시 이 이유 때문인 듯합니다. 그렇다면 신하의 심정은 또 어떠하겠습니까? 저 푸른 하늘은 어찌 그리도 한없는 곤욕을 주는지요. 어쩌면 저들이 우리에게 깊은 원한을 쌓게 해서 삼호(三戶)의 형세1)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하늘이 주신 용맹과 지혜, 위엄과 덕이 이미 드러났으니, 황천(皇天)의 보살핌과 선왕(先王)의 부탁이 필시 있을 것이고 백성의 기원이 바야흐로 그 일에 간절합니다. 그런데 만일 이에 조금이라도 미진하다면 비록 제왕의 위엄을 누린다 하더라도 어찌 낙이 되겠습니까?

성상께서 계책을 반드시 마음속으로 벌써 정하고 계실 줄 아오나 걱정되는 것은 완고하고 우둔하여 이것을 즐기고 수치심이 없는 일종의 무리들입니다. 만일 ‘우리는 이미 저들에게 몸을 굽히어 명분이 이미 정해졌다’고 한다면, 홍광 황제의 시해와 선조(先朝)의 수치에 대한 복수를 미처 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설이 행하게 되면, 공자 이래의 공명정대한 원리와 법칙이 일체 땅을 쓸 듯 없어지고 장차 삼강(三綱)이 아주 사라질 것이며, 구법(九法)이 폐하여 아들은 아비를 알지 못하고 신하는 임금을 알지 못하며 인심이 어긋나고 천지가 막혀 짐승의 종류가 될 것이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에 시세를 헤아리지 않고 경솔히 오랑캐와의 관계를 끊다가 원수는 갚지 못하고 패배에 먼저 이르게 된다면, 또한 선왕께서 수치를 참고 몸을 굽혀 종사를 연장시킨 본의가 아닙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에 굳게 정하시기를 ‘이 오랑캐는 임금과 아버지의 큰 원수이니, 맹세코 차마 한 하늘 밑에 살 수 없다’고 하시어 원한을 축적하십시오. 그리고 원통을 참고 견디며 말을 공손하게 하는 가운데 분노를 더욱 새기고, 금화를 바치며 와신상담을 더욱 절실히 하여 계책의 비밀은 귀신도 엿보지 못하게 하소서. 또한 의지와 기개의 견고함은 분육(賁育)도 빼앗지 못하도록 하시고, 5~7년 또는 10~20년까지도 마음을 늦추지 말고 우리 힘의 강약을 보며 저들 형세의 성쇠를 관찰하소서. 그러면 비록 창을 들고 죄를 문책하며 중원을 쓸어 말끔히 우리 신종 황제의 망극한 은혜는 갚지 못하더라도, 혹 관문(關門)을 닫고 약속을 끊으며 이름을 바르게 하고 이치를 밝혀 우리 의리의 원만함은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성패와 이둔(利鈍)은 예견할 수 없더라도 우리가 군신⋅부자의 사이에 이미 유감이 없다면, 굴욕을 당하고 구차하게 보존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일은 더욱 전하께서 한마음으로 근본을 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반드시 자신을 극복하여 마음을 바르게 가져 집안을 다스려 충직(忠直)에 접근하게 하고, 공도(公道)를 넓혀 체통을 밝히고, 기강을 떨쳐 재물을 절약하며, 사치를 혁파하여 민력을 펴게 하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지략이 용맹하고 총명하여 기세가 충만하게 한 다음에야 이 일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일을 아무리 쉴 새 없이 말하더라도 한갓 헛된 말로 한때 듣는 사람의 마음만 즐겁게 할 뿐입니다. 옛날에 주자가 효종(孝宗)에게 고하기를, “세상에 흔치 않은 큰 공은 세우기 쉬우나 지극히 작은 본심은 보존하기 어렵고, 중원의 오랑캐는 쫓아내기 쉬우나 한 몸의 사사로운 마음은 제거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히 구차하게 대단한 말을 하여 폐하를 속일 수 없습니다. 오직 폐하께서 마음을 바르게 하고 사욕을 극복하여 정사를 수행하시면, 진실한 보람을 점차로 이룰 수 있습니다. 대개 이른바, 진짜 『역경(易經)』에 정통한 자는 『역경』을 말하지 않고, 참으로 회복에 뜻을 둔 자는 칼을 어루만지고 손바닥을 치는 그러한 일에 신경 쓰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 근본은 위강(威强)에 있지 않고 덕업(德業)에 있으며, 그 방비는 변경에 있지 않고 조정에 있으며, 그 도구는 군대와 식량이 아니라 기강에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참으로 만세의 지론인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주자의 이 말을 좌우명으로 걸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살피소서.

아, 전하께서 이미 수치를 씻고 정의를 바로잡는 것으로 마음을 가지면 자기 한 몸은 돌아볼 것이 못 됩니다. 온 천하의 만물이 족히 나의 마음을 당할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안락의 즐거움과 재물을 구경하는 즐거움, 그리고 아첨꾼과 애첩의 사사로운 감정이 어찌 족히 조금이라도 그 뜻을 움직여서 떨쳐 일어나려는 공적을 방해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신다면 비록 벙어리⋅귀머거리⋅절름발이와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또한 백배의 기운을 내어 큰일을 하시는 뜻을 도울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깊이 유의하고 소홀히 여기지 않으신다면 종사와 백성의 다행이겠습니다.

송자대전』권5 봉사 기축봉사

1)『사기(史記)』 항우 본기(項羽本紀)에 나오는 말로, 원수 갚음을 말한다. 초나라 장수 향연(項燕)은 진(秦)나라와의 전쟁에서 수 차례 승리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면서, “초나라가 비록 삼호(三戶)만 있더라도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초나라이다(楚雖三戶亡秦必楚). ”라는 말을 남겼다. 항우 본기의 주(注)는 ‘삼호’에 대하여 “초나라 사람이 진나라를 원망하여 비록 세 집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진나라를 멸망시키기에 족하다는 것이다. ”라고 풀이하였다.

所謂修政事以攘夷狄者. 孔子作春秋, 以明大一統之義於天下後世, 凡有血氣之類, 莫不知中國之當尊, 夷狄之可醜矣. 朱子又推人倫極天理, 以明雪恥之義曰, 天高地下, 人位乎中. 天之道不出乎陰陽, 地之道不出乎柔剛. 是則捨仁與義, 亦無以立人之道矣. 然仁莫大於父子, 義莫大於君臣, 是謂三綱之要, 五常之本. 人倫天理之至, 無所逃於天地之間者, 其曰君父之讎, 不與共戴天者. 乃天之所覆, 地之所載, 凡有君臣父子之性者, 發於至痛不能自已之同情, 而非出於一己之私也. 臣每讀此書, 以爲此一字一句, 或有所晦, 則禮樂淪於糞壤, 人道入於禽獸而莫之救也. 欽惟我太祖高皇帝與我太祖康獻大王, 同時創業, 卽定君臣之義, 字小之恩, 忠貞之節, 殆三百年不替矣. 不幸頃者, 醜虜肆兇, 擧國淪陷, 堂堂禮義之邦, 盡汚腥膻, 彼時之事, 尙忍言哉. 繼値甲申之變, 皇京蕩覆, 天下無主. 是則雖曰非此虜之所爲, 然乘時聘醜。凌夷我寢廟, 殲汚我皇族, 已爲痛疾. 至於弘光皇帝建號南方, 大統有在, 我朝雖未有聘享之禮, 然旣是我神宗皇帝之骨肉, 則君臣大義, 豈以天外而有間哉. 何意天不悔禍., 逆虜復肆弑逆. 日月所照, 霜露所墜, 凡有性命之倫, 莫不有不共戴之義矣. 況我國實賴神宗皇帝之恩, 壬辰之變, 宗社已墟而復存, 生民幾盡而復蘇, 我邦之一草一木, 生民之一毛一髮, 莫非皇恩之所及也. 然則其在今日, 所以怨毒憤痛者, 擧天下孰如我哉, 況光海無道, 使弘立,景瑞全軍投虜, 使天下謂我淪胥爲夷, 我大行大王揭義反正, 痛洗垢衊, 昭如日星. 則一國臣民, 永有辭於天下後世矣. 重以大行大王至誠享上, 每蒙恩奬, 終始無間. 自丁卯以後, 遽爲北虜所脅持, 幽鬱隱忍, 忠節莫白. 自丁丑以後之事, 絶非臣子所忍言者. 最是助兵一事忍見於前, 而鄭逆抗禮, 寸鐵終無, 甚矣, 臣子一死之難, 至於如此哉. 嗚呼, 以先王德義之盛, 遭此大變, 兵力寡弱, 將相頑蠢, 卒未免事皇上之深讎. 又未能雪臣妾之大恥, 長年掩抑, 神武終屈, 抑恐壽考之不遐, 未必不由於此也. 然則臣子之情, 又當如何也. 彼蒼者天, 曷其有極. 抑無乃使彼厚怨於我, 而基三戶之勢耶. 殿下天錫勇智, 威德已著, 皇天之眷顧, 先王之付託, 意必有在, 而臣民祈向, 方切於此. 若於此一毫未盡, 則雖享天位, 豈以爲樂哉. 固知聖算之必已默定, 而所可憂者, 一種頑鈍嗜利無恥之輩. 若曰我已屈身於彼, 名分已定, 則弘光之弑, 先朝之恥, 有不可顧. 竊恐此說得行, 則自孔子以來, 大經大法, 一切掃地, 而將使三綱淪九法斁, 子焉而不知有父, 臣焉而不知有君, 人心僻違, 天地閉塞, 而混爲禽獸之類矣, 可不懼哉. 然於今日, 不量時勢, 輕絶強虜, 讎怨未報而禍敗先至, 則亦非先王忍恥屈己, 以延宗祀之本意也. 伏願殿下, 堅定於心曰, 此虜者君父之大讎, 矢不忍共戴一天, 蓄憾積怨. 忍痛含冤, 卑辭之中, 忿怒愈蘊, 金幣之中, 薪膽愈切, 樞機之密, 鬼神莫窺. 志氣之堅, 賁,育莫奪, 期以五年七年, 以至於十年二十年而不解, 視吾力之強弱, 觀彼勢之盛衰. 則縱未能提戈問罪, 掃淸中原, 以報我神宗皇帝罔極之恩, 猶或有閉關絶約, 正名明理, 以守吾義之便矣. 假使成敗利鈍, 不可逆睹, 然吾於君臣父子之間, 旣已無憾, 則其賢於屈辱而苟存, 不亦遠乎. 然此事尤不可不以殿下之一心爲本. 必須克己正心, 齊其家而近忠直, 恢公道而明體統, 振紀綱而節財用, 革奢靡而紓民力. 使志勇謀明, 勢滿氣飽, 然後可以語此. 不然則雖朝夕談之不絶於口, 亦徒爲虛言以快一時之聽聞. 故朱子告孝宗曰, 不世之大功易立, 而至微之本心難保, 中原之戎虜易逐, 而一己之私意難除. 故不敢苟爲大言以欺陛下. 惟陛下正心克己以修政事, 則眞實功可以馴致. 蓋所謂善易者不言易, 而眞有志於恢復者, 不在於撫劍抵掌之間也. 又曰, 其本不在乎威強, 而在乎德業, 其備不在乎邊境, 而在乎朝廷, 其具不在乎兵食, 而在乎紀綱. 此眞萬世之至論也. 伏願殿下, 以朱子此說, 揭諸坐隅, 朝夕觀省焉. 嗚呼, 殿下旣以雪恥正義爲心, 則一身不足顧. 擧天下之物, 無足以當吾心者, 況宴安之樂, 貨利之玩, 便嬖之私, 何足以一毫役其志, 而妨振作之功乎. 如此則雖喑聾跛躄之人, 亦且增百倍之氣, 以贊大有爲之志也. 伏乞深留聖意毋忽, 則宗社幸甚, 生民幸甚.

『宋子大全』卷5 封事 己丑封事

이 사료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1649년(효종 즉위년)에 제출한 「기축봉사(己丑封事)」의 일부로, 그의 북벌론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임진왜란 이후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명분 하에 명(明)나라를 섬기는 존명 사대의 명분론이 강화되었다. ‘재조지은’이란 임진왜란 당시에 명나라가 군대를 보내 망해 가는 조선을 다시 세워 준 은혜를 말한다. 광해군은 새롭게 부상하던 여진족과의 실리 외교를 추진하였으므로, 명나라에 대한 존명 사대의 명분론은 그를 축출하기 위한 인조반정의 명분이 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새롭게 정권을 장악한 인조서인 세력은 안으로는 성리학적 명분론을 강화시켜 나가는 한편 대외적으로도 주자의 존화양이(尊華攘夷)적 명분론에 입각한 존명 사대의 외교 정책을 취함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명분론은 결국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와 두 차례 전쟁을 치르는 계기가 되었으며, 결국 병자호란 때의 굴욕적인 항복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하여 소중화(小中華)로 자처하던 조선은 자부심에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뒤이어 중화인 명나라가 오랑캐인 청나라에 멸망함으로써 기존의 국제 질서가 붕괴되어 버리자 명에 의존하던 조선의 정통성은 크게 손상을 받았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주자학적 이념에 입각한 척화론이 강화되면서 북벌론으로 이어졌다. 특히 병자호란 이후 선양(瀋陽)에 억류되었다가 귀국한 효종(孝宗, 1619~1659)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 논의는 더욱 강화되었다. 효종은 즉위 초부터 친청(親淸) 세력을 축출하는 한편 산림(山林) 세력을 등용하면서 북벌 정책을 강조하였다. 이에 편승해 송시열효종 즉위 초반 조정에 나아가 북벌론의 방향을 제시한 「기축봉사」를 제출하였던 것이다.

송시열은 먼저 윤리와 도덕적인 차원에서 북벌의 당위성을 마련하였다. 그는 복수의 일념은 인간 본래의 감정이자 천하 공공(公共)의 도리라고 하면서, 특히 군부(君父)의 원수에 대한 복수는 사람마다 같은 감정이며, 더욱 강렬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는 인간의 법칙과 자연의 도리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군부는 중국, 즉 명나라를 가리킨다. 명나라는 조선의 임금과 아버지이고 은인이며, 청나라는 그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이므로 조선의 원수이기도 한 셈이었다.

명나라는 비단 사대 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周)나라로부터 이어지던 불변하는 중화(中華)의 실체로서, 존주(尊周)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미 명나라는 멸망해 버렸으므로 조선이 그 명나라를 이어 중화 문명의 계승자가 되어야만 하였다. 명나라와 조선은 이미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므로 논리상 조금의 모순도 없었다. 청나라에 대한 복수는 부자와 군신 관계의 의리를 실천하는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조선은 청나라에게 당한 굴욕을 스스로 씻어야 할 과업이 있는 데다 잃어버린 명나라를 대신한 복수의 과제까지 함께 짊어지게 되는 셈이었다.

송시열은 이런 논리에 따라 북벌의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안으로는 위축된 사회 경제 기반과 군사력을 재건하면서, 밖으로는 이적(夷狄), 즉 청나라의 무력 간섭을 배제하고 중화 중심의 세계 질서를 회복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군비 확충을 경계하면서, 그 선결 과제로 군주의 수신(修身)을 비롯해 백성의 안정을 우선시하였다. 이 점이 같은 북벌론을 주장하던 효종과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었다.

효종송시열북벌론이라는 큰 뜻은 일치하였으나 두 사람이 의도하는 바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효종은 북벌을 강조하여 조정을 군사 정국화함으로써 왕권 강화를 도모하고자 했다. 반면 송시열은 군비의 증강보다 민생의 안정과 성리학적 명분의 실현이 시급하다고 주장하였다. 북벌론과 존주론은 청의 중원 지배를 받아들이자는 현실론을 폈던 윤선거(尹宣擧, 1610~1669)⋅박세당(朴世堂, 1629~1703) 등의 일부 소론계 지식인들에 의해 그 허구성이 간접적으로나마 지적되기도 했지만,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공론으로 형성되어 갔다. 이에 따라 임진왜란 때 군사를 보낸 명나라의 신종(神宗, 1563~1620, 재위 1572~1620)과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 1611~1644, 재위 1628~1644)에게 정례적으로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났다. 송시열은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문인 민정중(閔鼎重)을 통해 의종의 어필을 얻었는데, 이것을 1674년(현종 15년) 환장암(煥章庵)이라는 암자 옆에 운한각을 지어 보관하고 승려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그는 정쟁으로 인하여 사사되기 전 제자 권상하(權尙夏, 1641~1721)에게 서면으로 유지를 내려 신종과 의종의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으며, 이는 1703년(숙종 29년) 화양서원 내 만동묘(萬東廟) 건립으로 실현되었다. 또 다음 해인 1704년(숙종 30)에는 신종과 의종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는 의례가 국가적 차원에서 마련되어 대보단(大報壇)이 설치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효종 대 집권서인의 부세제도 변통론-정국의 추이와 관련하여」,『북악사론』3,이근호,국민대학교 국사학과,1993.
「우암 송시열의 존주사상」,『청계사학』2,이영춘,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5.
「재조지은과 조선후기 정치사-임진왜란~정조대 시기를 중심으로-」,『대동문화연구』59,한명기,성균관대학교대동문화연구원,2007.
저서
『조선후기정치사상사연구』, 김준석, 지식산업사, 2003.
편저
「17세기 중엽 산림세력(산당)의 국정운영론」, 정만조, 일조각, 1992.
「성리학의 발달」, 허남진, 국사편찬위원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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