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정치조선 후기 청과의 관계

북벌론에 대한 비판

……(전략)……

청나라가 천하를 차지한 지 100년이 지났지만 그 자녀와 벼슬아치들이 나온 바와 궁실⋅배⋅수레⋅농경의 법과 최(崔)⋅노(盧)⋅왕(王)⋅사(謝)씨 등의 사대부 씨족들이 그대로 있으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오랑캐라 하고 중국의 법마저 폐기해 버린다면 크게 옳지 못하다.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기만 한다면, 그 법이 비록 오랑캐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성인은 장차 취할 것이다. 하물며 본래부터 중국 법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지금 청나라는 진실로 오랑캐족이다. 오랑캐족으로 중국 땅을 차지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끝내 중국 땅을 빼앗았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을 빼앗은 오랑캐족만을 알고 있을 뿐, 빼앗김을 당한 것이 중국이란 사실을 모른다. 이 때문에 스스로 지키기에도 힘이 부족했으니 이미 겪어 본 경험이 있다. 세상에서 전하길 정축년의 맹약청나라의 칸[汗]이 우리 조선을 오랑캐로 복속시키고자 하였으나 구왕(九王)이 간하여 말하길 ‘조선은 요동 지역에 있어 폐부와 같은 곳입니다. 지금 만약 그 의복을 섞어서 출입하게 한다면 천하가 평온하지 않고 일이 어찌될 지 알 수 없습니다. 예전과 같이 함만 못하니 이는 가두지 않고도 가두어 두는 것입니다. ’ 칸이 말하길 ‘좋다’하고는 마침내 그만두었다. 우리 입장으로 봐서는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저들의 계책으로 본다면 우리가 중국과 통하지 못함을 이롭게 여긴 데에 불과할 뿐이다. 옛날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1)은 끝내 오랑캐 복으로 갈아입고 동쪽 오랑캐를 크게 격파하였으니 옛날의 영웅은 반드시 복수하고자 하는 뜻을 품었으면 오랑캐의 복장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중국의 법으로 배울 만 하다라고 이야기하면 무리로 일어나 비웃는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도 원수를 갚으려면 원수가 차고 있는 예리한 칼을 빼앗으려고 한다. 그런데 이제 당당한 국가로 천하에 대의를 펴려고 하면서 중국 법을 한 가지도 배우지 않고 중국 선비를 한 사람도 사귀지 않는다. 이리하여 (북벌은) 우리 백성만 수고로울 뿐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며 곤궁과 기아에 빠져 스스로 폐지하게 하였다. 백배나 되는 이익을 버리고 실행하지 않으니, 나는 중국에 있는 오랑캐들을 몰아내기는커녕 우리나라의 문명하지 못한 풍속마저 완전히 탈피하지 못할까 염려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오랑캐를 물리치려고 한다면 먼저 누가 오랑캐인가를 알아야 하며, 중국을 높이려면 그들의 유법을 모두 실행하는 것이 더욱 중국을 높이는 것이 된다. 명나라를 위해 원수를 갚아 주고 우리의 부끄러움을 씻으려면 20년 동안 힘껏 중국을 배운 다음, 함께 의논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북학의』외편, 존주론

1)중국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왕이다. BC 307년 그는 연(燕), 동호(東胡), 진(秦), 한(韓) 등과 마주한 변경을 지키기 위해 군사력 강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호복(胡服)을 도입하였다. 당시 전통적인 전술은 세 명의 병사가 마부, 활쏘기, 창을 분담하던 전차전의 방식이었다. 반면 북방 유목 민족은 훈련된 전사 한 명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직접 쏘는 전법을 사용하였는데, 당시 대부들이 입던 소매와 밑단이 긴 옷은 말을 타기에 불편하였으므로 유목 민족 방식의 기병을 양성하려면 길이가 짧은 호복의 도입이 필요하였다. 조정 신료들은 오랑캐의 옷이라 하여 반대하였으나, 무령왕은 계속 설득하여 호복(胡服)을 도입하기는 데 성공하였다.

……(前略)…… 然而淸旣有天下百餘年, 其子女玉帛之所出, 宮室舟車耕種之法, 崔⋅盧⋅王(一)⋅謝士大夫之氏族, 自在也. 冒其人而夷之, 並其法而棄之, 則大不可也. 苟利於民, 雖其法之雖出於夷, 聖人將取之, 而况中國之故哉. 今淸固胡矣, 胡知中國之可利, 故至於奪而有之. 我國以其奪之胡也, 而不知所奪之爲中國, 故自守而不足, 此其已然之明驗也. 世傳丁丑之盟, 淸汗, 欲令東人胡服, 九王諫曰, 朝鮮之於遼瀋, 肺腑也. 今若混其衣服, 通其出入, 天下未平, 事未可知也. 不如仍舊, 是不拘而囚之也. 汗曰善, 遂止. 自我論之, 幸則幸矣, 而由彼之計, 不過利我之不通中國也. 昔趙武靈王, 卒變胡服, 大破東胡, 古之英雄, 有必報之志, 則胡服而不恥. 今也, 以中國之法, 而曰可學也, 則群起而笑之. 匹夫欲報其讐, 見其讐之佩利刃也, 則思所以奪之. 今也以堂堂千乘之國, 欲伸大義於天下, 而不學中國之一法, 不交中國之一士. 使吾民勞苦而無功, 窮餓而自廢. 棄百倍之利, 而莫之行, 吾恐中國之夷未暇攘, 而東國之夷, 未盡變也, 故今之人欲攘夷也, 莫如先知夷之爲誰, 欲尊中國也, 莫如盡行其法之爲逾尊也. 若夫爲前明復讐雪恥之事, 力學中國二十年後, 共議之未晩也.

『北學議』外篇, 尊周論

이 사료는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북학의』외편, 「존주론」의 일부이다. 『북학의』는 이름 그대로 ‘북학(北學)에 대한 논의’, 곧 북쪽 나라를 배우자는 논의이다. 당시로서는 조선에 비해 선진적인 것으로 평가된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자는 주장을 피력한 책이다. 박제가는 네 차례 중국을 여행했다. 29세 때인 1778년(정조 2년) 절친한 친구인 이덕무(李德懋, 1741~1793)와 함께 북경에 가서 청나라의 문화를 직접 견문한 것이 첫 여행이다. 이 여행에서 돌아와 『북학의』를 1차 완성하고 「자서(自序)」를 썼다. 이후 수년간 내용을 보완하여 내편과 외편의 체계를 갖춘 『북학의』를 완성하였으며, 그때 박지원(朴趾源, 1737~1805)과 서호수(徐浩修, 1736~1799)에게 부탁하여 ‘서문’을 받았다.

북학의』의 외편은 전(田)⋅분(糞)⋅상과(桑菓)⋅농잠총론(農蠶總論)⋅과거론(科擧論)⋅북학변(北學辨)⋅관론(官論)⋅녹제(祿制)⋅재부론(財賦論)⋅통강남절강상박의(通江南浙江商舶議)⋅병론(兵論)⋅장론(葬論)⋅존주론(尊周論)⋅오행골진지의(五行汨陳之義)⋅번지허행(樊遲許行)⋅기천영명본어역농(祈天永命本於力農)⋅재부론(財賦論) 등 17항목의 논설을 개진하였다. 그는 특히 존주론에서 청나라를 오랑캐라 하여 배척하는 화이론에 입각한 위정자들의 태도를 비현실적이라고 꼬집었다. 청은 이미 현실적으로 오랫동안 중국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오랑캐로만 볼 수 없으며, 오랑캐 문화라도 우리보다 나은 것이 있으면 마땅히 배워야 하고, 그래야 원수도 갚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박제가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북벌론병자호란 이후의 청에 대한 철저한 적개심과 존명주의가 바탕이 된 명분론적 사대주의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북벌론에 의해 실제로 강화된 군대는 왕의 친위군과 수도 경비 군사력이었고 국론 통일과 화합을 이루지 못했던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북벌 계획은 백성을 긴장시키고 백성의 관심을 나라 밖으로 돌려 패배한 전쟁의 책임과 전쟁 뒤의 정치적⋅경제적 위기를 모면하려고 한 지배 계층의 논리에 불과하였다. 또 지배층의 지속된 북벌 의식은 청나라 문화를 선진 문화로 인정하지 않아 중국 문화 수입을 봉쇄함으로써 정치적 쇄국주의, 문화적 폐쇄주의를 낳았다. 박제가북학파들은 이러한 북벌론의 폐해를 지적하고 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조선의 문물을 발전시키고자 한 것이다.

북벌 계획의 배경은 임진왜란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침략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은 명군(明軍)의 지원을 받아 평양성을 탈환한 이후 반격의 실마리를 만들었다. 이로 인해 조선에 대한 명의 정치적 입김은 강화되었지만 조선에서는 명을 이른바 ‘재조(再造)의 은인(恩人)’으로 숭배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갔다. 선조(宣祖, 재위 1567~1608)를 이은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 때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적 중립 외교를 펼쳤으나 화이관에 기울어 있던 서인들은 광해군의 정책을 ‘패륜(悖倫)’으로 비판하고, 당시의 폐모론과 함께 광해군을 몰아내는 명분으로 삼았다. 결국 인조반정 이후 집권한 서인 세력은 후금이 칭제건원(稱帝建元)하고 조선에 대해 명과의 국교 단절과 신속(臣屬)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여 병자호란을 맞게 되었다. 이때 국왕이 후금에게 항복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봉림대군(鳳林大君) 등이 볼모로 끌려갔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볼모로 있는 동안 발달된 문명을 접하고 귀국하여 청과 서양 문물의 도입을 주장하였으나 급작스런 죽음을 맞고, 서인 세력과 결합한 효종(孝宗, 재위 1649~1659)은 즉위 후 청나라에 볼모로 있는 동안의 치욕에 대한 복수심으로 군비를 강화하는 등 강한 북벌 의지를 내보였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송준길(宋浚吉, 1606~1672) 등 재야 인사들을 등용하여 국정을 쇄신하고 전력 증강에 힘쓰는 한편, 의주 부윤 임경업(林慶業, 1594~1646)을 시켜 명나라와 대청 전선(對淸戰線)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북벌 추진 과정에서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였다. 농민의 부담이 증가하고 지방 수령들도 북벌 계획의 실적에 따라 상벌이 정해졌기 때문에 일반 행정은 제쳐 두고 북벌 계획에만 매달리는 형편이었다. 중앙에서도 무신 세력이 증대하면서 기존의 문신 우위 정치 체제에 동요를 일으켰는데, 이것이 효종과 문신 세력 간의 갈등으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결국 북벌 계획은 명이 청에게 멸망하고 1659년 효종의 죽음과 함께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현종(顯宗, 재위 1659~1674)을 거쳐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초에도 윤휴(尹鑴, 1617~1680)⋅허적(許積, 1610~1680) 등 남인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다시 제기되었다. 1674년(숙종 즉위년)에는 북벌 담당 기구로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를 두고 군비를 강화하였는데, 이는 청에서 오삼계(吳三桂)의 난이 일어나 내부 혼란이 발생한 것을 이용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청이 곧 안정을 되찾고 윤휴 등의 세력이 1680년(숙종 6년) 실각함에 따라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북벌 계획은 존명주의(尊明主義) 내지 존주주의(尊周主義)가 바탕이 된 명분론적 사대주의(事大主義)의 연장이었다. 한편으로는 백성의 관심을 나라 밖으로 돌려 전쟁 패배의 책임과 전쟁 뒤의 정치적⋅경제적 위기를 모면하려고 한 지배 계층의 논리였다. 이후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대에 이르러 서울의 일부 학자들은 조선 문화의 후진성을 자각하고, 오랑캐인 청나라의 문물이 바로 선진 중화(中華) 문화임을 인정하여 그를 받아들이자는 ‘북학’의 주장을 펴는 등 사상의 전환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북벌론과 비판의식; 관련 야담을 중심으로」,『대동문화연구』25,이명학,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1990.
「북벌론의 사상사적 검토」,『창작과 비평』10-4,이이화,창작과 비평사,1975.
「17⋅18세기 북벌론의 추이와 북학론의 대두」,『대동문화연구』69,허태용,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2010.
저서
『조선후기사상사연구』(한국문화총서 21), 김용덕, 을유문화사, 1977.
『조선후기의 정치사상과 사회변동』, 이이화, 한길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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