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려대성(軍旅大成)
38년(1712)에 오라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이 시위(侍衛) 포소륜(布蘇倫), 주사(主事) 악세(鄂世)와 함께 국경을 정하기 위해 백두산 아래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서는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 1658~1715), 함경도 순찰사 이선부(李善溥), 역관
김경문(金慶門) 등을 보내 이들을 만나게 하였다.
조선 시대 역대 군제와 진법(陣法)에 대해 정리한 병서
에 이르길, “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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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극등이 박권과 이선부는 나이가 많다고 하여 동행을 허락하지 않고, 김경문 등을 데리고 백두산에 올라가 산등성이를 따라 내려가다 비로소 압록강의 수원(水源)을 찾았는데, 샘물이 산 구멍에서 흘러나왔다. 또 동쪽으로 한 언덕을 넘어서니 또 다른 샘물이 서쪽으로 흘러 두 갈래로 나오는데, 한 갈래는 서쪽 샘물과 합하고 한 갈래는 동쪽으로 흘렀다. 또 동쪽으로 언덕 하나를 넘으니 샘물이 있어 동쪽으로 흐르는데, 가운데 샘이 갈라져 동으로 흐르는 것이 와서 합하였다.
목극등이 가운데의 샘이 갈라지는[中泉了] 위치에 앉아 말하기를, ‘이곳이 분수령(分水嶺)이라 할 수 있다’ 하고, 여기에 경계를 정하고 돌을 깎아 비를 세웠다. 그 비문(碑文)에,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국경을 조사하기 위해 여기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며, 동쪽은 토문강(土門江)이므로 분수령 위에다 돌에 새겨 표를 삼는다’ 하였다” 한다.
여지도(輿地圖)
때에 이르러 두만강으로 경계를 정하였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윤관의 비로 증거를 세워 따지지 못했음이 당시의 왕명을 받고 일을 행한 자의 잘못임을 한스럽게 여긴다.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지도 책. 23책. 목록 1책
에는 분계강(分界江)이 토문강의 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강의 이름이 분계인 만큼 정계비(定界碑)는 당연히 여기에 세워야 한다. 또 비문에 이미 동쪽은 토문강이 된다고 하였으니 토문강의 발원지에 세워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식자들은 당시에 아무도 다투어 밝히지 못하고, 수백 리의 강토를 앉아서 잃고 말았다는 것을 한탄하였다 한다. 옛적에 윤관(尹瓘, ?~1111)이 영토를 확장하여 속평강(速平江)까지 이르렀는데, 그때 세운 비가 아직도 남아 있다. 김종서(金宗瑞, 1383~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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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기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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