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정치조선 후기 일본과의 관계

일본과의 외교 재개

비망기로 정원(政院)에 전교하였다. “군주는 백성에게 부모의 도리가 있다. 백성이 오랑캐의 조정[虜庭]으로 잡혀 가, 예의(禮義)의 나라 백성으로서 장차 오랑캐[蠻貊] 나라의 백성이 되게 되었으니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날 회답사(回答使)에게 그곳에 이르러서 쇄환(刷還)에 관한 일을 스스로 주선해 보도록 계하(啓下)하였으나, 이 말은 허술한 듯하여 그가 능히 쇄환해 올 것인지를 기필하지 못하겠다. 또 회답사를 보내면서 마땅한 명칭이 없는 것도 의심스럽다. 이제 위에서 보내거나 혹 예조에게 글을 보내게 하여 곧장 의리에 의거, 우리나라 포로를 모두 쇄환시켜 두 나라의 우호를 다지게 하라고 하여 한번 그들의 뜻을 떠보는 것이 마땅하다. 사신의 칭호를 포로로 잡혀 간 사람들을 쇄환하는 것으로 명분을 삼을 경우 그 호칭을 회답쇄환사라고 하는 것도 한 계책일 것이다.

인주(人主)가 만백성을 위해 하는 일이 참으로 의리에 해로움이 없고 그것을 위해 하는 말이 당당하다면 설사 그들이 따라 주지 않아 쇄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손상될 것이 없으니, 단지 해야 할 바를 할 뿐이다. 또 교린(交隣)하는 도리는 신의(信義)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들이 스스로 전 시대의 잘못을 모두 고치겠다고 말하였는데, 이미 전의 잘못을 고치겠다 하였으면 전 시대에 포로로 잡아 간 백성을 모두 쇄환시켜 그 잘못을 고치고 다시 새롭게 우호를 맺어야 하는 것으로, 소위 신의란 것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일을 의논해 조처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선조실록』권207, 40년 1월 4일(무진)

以備忘記傳于政院曰 君之於民, 有父母之道. 其民陷於虜庭, 忍令禮義之民, 將爲蠻貊之(方)〔民〕, 可不爲悲乎. 前日令回答使, 到彼自爲周旋刷還事, 啓下矣. 此似歇後, 未可必其能刷出否也. 且回答使之遣, 亦嫌無名. 今宜或自上貽書; 或令禮曹致書, 直據義理, 令盡刷我國被擄人, 以申兩國之好, 一以探試其意. 使臣以刷還被擄爲其名號則以回答刷還使爲稱, 此一謀也. 人主爲萬民爲之, 固無害於義理, 而其爲詞直, 設使渠不聽從, 不爲刷還, 在我無損, 但當爲所當爲而已. 且交隣之道, 不過曰信義而已. 渠自謂, 盡改其前代之非云云. 旣曰改其非, 則盡刷前代所擄之民, 以改其非, 更結新好, 所謂信義者, 其在於斯乎. 此事似當議處.

『宣祖實錄』卷207, 40年 1月 4日(戊辰)

이 사료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요청에 따라 국교를 재개하면서 통신사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파견하는 내용과 관련한 것이다.

임진왜란 뒤에 정권을 잡은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쓰시마[對馬島] 도주를 통해 교섭을 허용해 줄 것을 조선에 간청하였다. 일본의 국교 재개 요청에 조선은 일본의 사정도 알아보고 왜란 때 끌려 간 포로들을 쇄환(刷還)하기 위해 일본의 간청을 받아들여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1607년(선조 40년) 사명당 유정(惟政, 1544~1610)을 파견하여 일본과 강화하고 조선인 포로 7000여 명을 되돌려 받은 뒤 ‘회답 겸 쇄환사’라는 외교사절을 파견하여 국교를 재개하였다. 회답 겸 쇄환사는 임진왜란 직후인 1607년⋅1617년(광해군 9년)⋅1624년(인조 2년) 세 차례 파견되었다. 그 명칭은 신의(信義)로 통한다는 ‘통신사(通信使)’라는 명칭을 아직 사용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사용한 것이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의 조선 침략에 대한 조선 정부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1607년 조선이 일본에 보낸 사절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의 ‘국서(國書)’에 대한 회답과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 간 포로들을 데리고 오기 위한 회답 겸 쇄환사였는데, 일본의 정세를 직접 견문하여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어 1617⋅1624년의 사절도 회답 겸 쇄환사로서, 이는 조선의 입장에서는 사절 파견이 상호간에 호의를 주고받는 의미보다 몇 차례에 한정해 정치적 목적만 달성하기 위한 의도가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조선은 도쿠가와 막부를 정식 외교 당사자로 여기지 않았을뿐더러, 당시는 강화를 위한 기반이 조성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처음에는 일본 사신이 서울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동래에 설치된 왜관에서 실무를 보고 돌아가게 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후기 조⋅일 강화와 조⋅명 관계」,『국사관논총』12,민덕기,국사편찬위원회,1990.
「조선후기(에도시대) 한⋅일교류의 위상」,『조선시대사논집』,이원순,느티나무,1993.
저서
『조선시대 한일관계사연구』, 손승철, 지성의샘, 1994.
편저
「일본과의 관계」, 이훈, 국사편찬위원회, 1997.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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