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정치조선 후기 일본과의 관계

일본과의 조약 체결-기유약조

……(전략)…… 대마도주에게 해마다 내리는 쌀과 콩은 모두 100석으로 한다.

왜관(倭館)에서 접대하는 것은 세 가지 예가 있는데, 국왕사(國王使)가 하나요, 도주특송인(島主特送人)이 하나요, 대마도 수직인(受職人)이 하나이다.

국왕사가 나올 때에는 단지 상선(上船)과 부선(上副船)만 허락한다.

대마도주의 세견선(歲遣船)은 감해서 17척으로 하고 특송선 3척과 합해서 모두 20척으로 한다. 이밖에 만일 따로 보낼 일이 있으면 세견선에 부친다.

수직인은 1년에 한 차례 씩 내조(來朝)하고, 다른 사람을 보내지 못한다. 평상시(임진왜란 이전) 수직인은 면죄(免罪) 받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도록 하고 지금은 거론하지 않는다.

배는 세 가지 등급이 있는데, 25자[尺] 이하를 소선이라 하고 선부(船夫)가 20명이다. 26자는 중선이라 하여 선부가 30명이고, 28자에서 30자까지는 대선이라 하여 선부가 40명이다. 배의 크기를 살피고, 또 선부의 수를 헤아려 선부가 아무리 많아도 정해진 인원을 넘을 수는 없으며, 만일 정해진 수보다 적게 오는 경우에는 인원수를 조사하여 요(料)를 지급한다.

보내는 배는 모두 대마도주가 발급하는 문인(文引)을 받은 뒤에야 올 수 있다.

대마도주에게는 전례에 따라 도서(圖書)를 만들어 지급하고, 그 견본을 종이에 찍어서 예조 및 교서관(校書館)에 보관하고, 또 부산포(釜山浦)에 두고서 서계(書契)가 올 때마다 그 진위를 따져 보아서 격에 어긋나거나 부험(符驗)이 없는 배는 도로 돌려보낸다.

대마도주의 문인이 없는 자는 적으로 판단한다.

과해량(過海糧)은 대마도인에게는 5일 간의 양식을 주고, 도주특송인에게는 5일 간의 양식을 더 주고, 국왕사에게는 20일 간의 양식을 준다.

이외의 나머지 일은 한결같이 전례에 따르도록 한다.

『증정교린지』권4, 지, 약조, 광해원년기유개정약조

……(前略)…… 島主處歲賜米豆共一百石. 舘待有三例, 國王使爲一例, 島主特送爲一例, 對馬島受職人爲一例. 國王使出來時, 只許上副船. 島主歲遣船, 減定十七隻, 及特送船三隻合二十隻. 而外此如有別遣事, 則歲遣船順付. 受職人歲一來朝, 不得遣人. 平時受職人免罪爲幸, 今不舉論. 船有三等, 二十五尺以下爲小船, 船夫二十名. 二十六尺爲中船, 船夫三十名. 二十八尺至三十尺爲大船, 船夫四十名. 尺量船體又點船夫之數, 船夫雖多不得過定額, 若否則以點數給料. 凡所遣船, 皆受島主文引之後乃來. 島主處依前例圖書成給, 着見樣於紙, 藏禮曹及校書舘, 又置釜山浦, 每書契來憑考驗其眞僞, 違格及無符驗船還入送. 無文引者以賊論斷. 過海糧, 對馬島人給五日糧, 島主特送人加給五日糧, 國王使二十日糧. 他餘事一依前例.

『增正交隣志』卷4, 志, 約條, 光海元年己酉改定約條

이 사료는 임진왜란이 종식된 지 10년 후인 1609년(광해군 1년)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기 위해 대마도주와 맺은 강화조약인 「기유약조(己酉約條)」로, 조선 후기에 일본 등 조선이 교린 정책을 펼친 인접국들과의 외교 관계를 엮은 책인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에 수록되어 있다.

『증정교린지』 이 외에도 『통문관지(通文館志)』⋅『변례집요(邊例集要)』⋅『고사촬요(攷事撮要)』⋅『대마도종가문서(對馬島宗家文書)』 등에도 조약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약 체결에 대해 포괄적으로 평가하고 세견선(歲遣船)에 대한 것만 밝히고 있다. 조약의 명칭은 문헌에 따라 ‘기유약조’⋅‘기유개정약조(己酉改正約條)’⋅‘약조’⋅‘기유년신정약조’⋅‘송사약조(送使約條)’⋅‘만력기유년신정약조(萬曆己酉年新定約條)’ 등으로 달리 표기되어 있으며, 조약문의 내용과 조문 수도 각기 다르게 되어 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은 국교를 단절하였다. 전쟁 직후 조선에는 일본에 대해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존재할 수 없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라는 정서가 팽배해 있었으므로, 임진왜란 이전과 같은 통교 관계를 회복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가 죽자 에도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조선의 예상과는 달리 통신사 파견을 서둘러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종전 이후 불과 몇 년 만인 1607년(선조 40년)에 국교가 재개되어 조선에서는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외교사절을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회답 겸 쇄환사’라는 사절단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는 일본에 끌려간 포로들을 데려올 필요성과 ‘남왜북로(南倭北虜)’라는 당시 17세기 초의 동북아시아 정세에서 현실적인 방편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기유약조」가 체결되어 일본 및 대마도와의 통교⋅무역에 관한 틀이 마련되는 1609년(광해군 1년)에 이르러서야 양국 간의 교린 체제는 비로소 재편되었다.

1609년 3월, 대마도의 외교승 겐소(玄蘇)가 324명의 사절단을 데리고 부산에 왔으며, 선위사(宣慰使) 이지완(李志完)과 겐소 사이에 「기유약조」가 체결되었다. 「기유약조」는 일본이 사신을 조선에 보내는 정례적인 송사(送使)와 통상의 절차를 13개 항목에 걸쳐 규정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이전과 비교할 때 대마도주에게 대단히 불리한 조건이었다. 사료에서 보듯, 대마도주에게 지급하는 미곡과 대두는 「계해약조(癸亥約條)」(1443)와 「임신약조(壬申約條)」(1512) 때 지급량의 절반인 100석으로 줄었고, 왜관(倭館)은 딱 1곳, 부산에 한정되었다. 대마도주의 세견선과 특송선도 「임신약조」의 25척에서 5척이 감소한 20척에 불과했고, 특송선은 사실상 금지된 것과 같았다. 반면 통관 절차라 볼 수 있는 수직인(受職人)이나 사신선의 등급, 선부의 수와 도주의 문인(文引)⋅도서(圖書) 및 과해량(過海糧)의 규정 등은 전례를 따랐다. 즉, 조선은 막부와 대마도가 국교의 재개를 간청하여 왔으므로 임진왜란을 도발한 일본 측의 책임을 조약에 반영하였던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 이전의 또 다른 왜관이었던 동래관(東平館)의 폐쇄와 일본 사신의 상경 금지는 사신의 왕래에 따른 정탐 행위를 막아 일본의 재침을 예방하려는 조선의 대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초기의 대일본통제책에 대한 고찰」,『여산유병덕박사화갑기념 한국철학종교사상사』,나종우,논문집간행위원회,1990.
「조선초기의 대왜구정책」,『중제장충식박사화갑기념논총』,나종우,논총간행위원회,1992.
「조선후기 조⋅일강화와 조⋅명관계」,『국사관논총』12,민덕기,국사편찬위원회,1990.
저서
『통신사의 문화 전파』, 나종우, 민속원, 2004.
편저
「일본과의 관계」, 이훈, 국사편찬위원회, 1997.
「교류와 전쟁」, 한명기, 지식산업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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