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변사
가 아뢰기를,
'비변사' 관련자료
“지금 박대근(朴大根)이 귤지정(橘智正)1)
과 문답한 것을 보니, 지정이 ‘글을 통하는 일은 예로부터 규례가 있으니 다시 물을 것이 없고 일본 국왕(日本國王)이라고 써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박대근이 묻기를 ‘너희 국왕이 누구냐?’라고 하니, 지정이 말하기를, ‘가강(家康)2)
이다.’라고 하고, 대근이 묻기를 ‘네가 비록 가강이 국왕이라고 하지만 일본 사람들이 국왕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니, 지정이 ‘비록 국왕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그 직임은 국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면 가강이 비록 수뢰(秀賴)3)
를 처치하지 않았더라도 가강이 나라를 주관하는 것은 틀림이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갑자기 가강을 국왕이라고 하여 그에게 글을 보낼 수는 없으니, 전일 조정에서 의논해 계품(啓稟)하여 결정한 대로 차관(差官)을 들여보내 한편으로는 상호간에 우호의 뜻을 보이고, 한편으로는 저들 내부의 사정을 정탐하는 것이 옳습니다.
1)
1517년(중종
12) 최세진(崔世珍)이 편찬한 책으로, 한자(漢字)를 운(韻)으로여 분류한 자서(字書)이다.쓰시마(對馬) 번주(藩主)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가신(家臣)이었던 다치바나 도모마사(橘智正)를 지칭한다. 별명은 이데 야로쿠자에몬(井手彌六左衛門/井出彌六左衛門)으로, 소 요시토시의 명을 받아 여러 차례 조선에 왕래하여 조선과의 국교 회복 및 피로인(被擄人) 송환의 일을 담당하였다.
'중종' 관련자료
2)
에도(江戶) 막부(幕府)를 개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지칭한다.
3)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賴)를 지칭한다.
이제 예조 판서(禮曹判書)의 관함(官銜)으로 일본국 집정 대신(執政大臣)에게 글을 보내되 그 말을 만들기를 ‘우리 나라가 일본과 대대로 우호를 맺어 온 지가 지금 2백년이 되었다. 뜻밖에도 평수길(平秀吉)4)
이 까닭없이 군사를 일으켜 우리의 삼도(三都)를 함락시키고, 우리 백성들을 살육하였으며, 우리의 종묘 사직을 허물고, 우리의 능침(陵寢)을 파헤쳤으니, 수길은 우리 나라의 만세토록 잊지 못할 원수이다. 지금 들으니, 내부(內府)5)
가강(家康)은 임진년과 정유년에 군사를 일으킬 때 관동(關東)의 병졸 하나도 바다를 건너지 못하게 하였고, 나라를 맡고서는 수길이 하던 바를 모조리 돌이켜서 포로된 사람이 연속해서 나와도 금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의 마음씀과 행하는 일을 어찌 수길과 같이 말할 수 있겠는가? 내부(內府)가 실로 옛 우호를 다시 닦고자 한다면 우리 역시 거절할 도리가 없다. 다만 두 나라가 서로 우호 관계를 맺는 것은 사체(事體)가 매우 중한데도 내부에서는 일찍이 한 장의 글도 보내지 않고 대마도의 왜(倭)만이 홀로 왕래하면서 말을 전하고 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내부(內府)가 참으로 능침을 파헤친 주모자를 잡아다가 형틀에 묶어 서계(書契)와 함께 압송하면 우리 나라는 마땅히 우선 천조(天朝)에 보고하고, 다음으로 종묘와 사직에 고하여 그 죄를 따져 사형에 처함으로써 우리의 15년 동안의 지극한 통분을 씻은 뒤에 보내 오는 사신을 예(禮)로 대접하고 보내 오는 글에 사례하며 새로운 우호를 고쳐 강구해 영세토록 바뀌지 않게 하면 또한 아름답지 않겠는가?’라는 내용으로 서계를 만들어 보내고 그들이 하는 바를 보아가면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4)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지칭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태합소생기(太閤素生記)의 기록에 따르면 오와리국(尾張國) 아이치군(愛知郡) 나카무라(中村)에서 키노시타 야우에몬(木下彌右衛門)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독립 당시의 이름은 키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이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수하가 된 뒤 1573년에 아자이(淺井) 세력을 상대로 전공을 세워 하시바(羽柴)라는 묘지(苗氏)를 하사받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로 개명했고, 이후 1582년에는 일본의 4대 명문 우지[氏] 중 하나인 타이라(平) 씨를 사용하여 타이라노 히데요시(平秀吉)가 되었다. 1585년에는 마찬가지로 일본의 4대 명문 우지 중 하나인 후지와라(藤原) 씨의 직계에 해당하는 고노에 가문의 고노에 사키히사(近衞前久)에게 양자로 입적된 뒤 간파쿠(關白)에 취임하면서 후지와라노 히데요시(藤原秀吉)가 되었고, 이듬해인 1586년에는 오기마치 덴노(正親町天皇)으로부터 도요토미라는 우지를 하사받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로부터 도요토미라는 우지를 하사받은 일본 장수들을 지칭할 때 의도적으로 도요토미라는 호칭을 배제하고 그 대신 타이라를 활용함으로써,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권기 일본의 새로운 질서를 부정하는 동시에 미나모토(源) 씨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기존 질서를 뒤엎은 ‘역적’의 이미지를 부여하여 이해하였다.
5)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596년 일본 조정의 정2위(正二位) 관직인 내대신(內大臣)에 임명된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존칭으로 사용된 명호 중 하나다.
또 귤왜(橘倭)가 먼저 돌아가고자 하니 ‘여러 차례 서계를 보낸 너희 대마도의 우리 나라를 향한 정성을 어기기 어려워 지금 마땅히 차관(差官)을 일본에 들여보내 우호를 의논하겠다.’라는 내용으로 대략 회답하는 말을 만들고, 이 서계가 먼저 완성되면 급히 선전관(宣傳官)을 보내 경상 감사(慶尙監司)에게 하유해서, 박대근(朴大根)으로 하여금 귤왜를 잘 타일러 보내게 하는 것 또한 합당하겠으므로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비망기로 이르기를,
“적(賊)이 화친을 요청하는 것은 모두 대마도가 중간에서 한 일이어서 그들이 가강을 칭탁하는 것은 속이는 말이 아닌 것이 없다. 만일 가강이 진실로 속히 서로 우호를 맺으려는 뜻이 있다면 유정(惟政)이 돌아올 때에는 어찌 한 장의 글도 부치지 않고 장황한 사설과 흉악한 위협으로 공갈했겠는가? 수뢰(秀賴)와 가강 가운데 그 어느 적이 국사를 주관하는지 모르는데 갑자기 이와 같이 말을 만들어 글을 보내면 귤지정의 꾀에 속을까 염려된다. 설사 가강이 실제로 왜주(倭主)가 되었다 하더라도 수길의 무리를 모조리 제거했다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고 그 무리가 중외에 가득차 있다면 가강은 어린애를 끼고서 군하(群下)를 호령하는 것에 불과한데, 그러면 이번에 곧바로 가강에게 글을 보내면 여러 적들이 유감을 품게 될까 염려되니, 또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내 생각은 사람을 보내 정탐하여 다시금 그들의 사정을 대강 안 뒤에 처리하고자 할 뿐이다. 또 한가지 생각이 있으니, 능(陵)을 범한 적을 잡아 죽이면 의리상 통쾌할 뿐이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잡아보내오기를 기필할 수 없고, 잡아보내오는 것도 마치 금(金)나라 오랑캐가 재궁(梓宮)을 송환한 것처럼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개 왜적은 아주 교활하여 그 꾀가 10배나 되어 반드시 우리가 행동할 때마다 그들에게 속아왔다. 이는 한 나라의 대사(大事)이니, 반복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라고 하였다.
『선조실록』 권199, 39년 5월 12일 기묘
- 1517년(중종
'중종' 관련자료
- 에도(江戶) 막부(幕府)를 개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지칭한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賴)를 지칭한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지칭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태합소생기(太閤素生記)의 기록에 따르면 오와리국(尾張國) 아이치군(愛知郡) 나카무라(中村)에서 키노시타 야우에몬(木下彌右衛門)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독립 당시의 이름은 키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이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수하가 된 뒤 1573년에 아자이(淺井) 세력을 상대로 전공을 세워 하시바(羽柴)라는 묘지(苗氏)를 하사받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로 개명했고, 이후 1582년에는 일본의 4대 명문 우지[氏] 중 하나인 타이라(平) 씨를 사용하여 타이라노 히데요시(平秀吉)가 되었다. 1585년에는 마찬가지로 일본의 4대 명문 우지 중 하나인 후지와라(藤原) 씨의 직계에 해당하는 고노에 가문의 고노에 사키히사(近衞前久)에게 양자로 입적된 뒤 간파쿠(關白)에 취임하면서 후지와라노 히데요시(藤原秀吉)가 되었고, 이듬해인 1586년에는 오기마치 덴노(正親町天皇)으로부터 도요토미라는 우지를 하사받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로부터 도요토미라는 우지를 하사받은 일본 장수들을 지칭할 때 의도적으로 도요토미라는 호칭을 배제하고 그 대신 타이라를 활용함으로써,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권기 일본의 새로운 질서를 부정하는 동시에 미나모토(源) 씨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기존 질서를 뒤엎은 ‘역적’의 이미지를 부여하여 이해하였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596년 일본 조정의 정2위(正二位) 관직인 내대신(內大臣)에 임명된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존칭으로 사용된 명호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