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경제농업 생산력의 증대

견종법의 보급

조의 재배는 후직(后稷)의 견전법(畎田法)을 쓰는 것이 최고다. 9~10월에 땅을 손질하는데, 세 번 갈고 여섯 번 써레질을 하여 흙을 매우 부드럽게 만든다. 쇠날 가래로 밭 경계에 큰 도랑[溝]을 파되, 깊이와 너비를 각각 2척이 되도록 만든다. 다시 밭 내부로 향하여 6척마다 가로로 작은 도랑을 파되, 길이와 너비를 각각 1.5척이 되게 만들며, 길이는 이랑[畝] 끝과 같게 한다.1)

다음 해 청명(淸明)과 곡우(穀雨) 사이에 작은 보습[鑱]으로 이 이랑에다 고랑을 내는데, 너비 1척, 깊이 1척이다. 이렇게 한 이랑, 즉 1묘(畝)마다 고랑[畎] 3개와 두둑[伐] 3개를 만들면, 두둑의 높이와 너비는 고랑의 깊이와 너비와 같아진다. 그 뒤 고랑에 거름재를 두껍게 펴고, 구멍 뚫린 박에 조를 담고서 파종한다. 파종 간격은 일정해야 하며 덮어주는 흙의 두께는 손가락 하나의 두께만큼으로 한다. 그 땅의 습도나 강도가 어떠한지를 살펴보고서 노[勞]를 쓰든 끙게[撻]를 쓰든 둔차[砘]를 쓰든 한다.2)

모에 잎이 2, 3개 나면 손으로 김매면서 그루를 정한다. 작은 놈은 뽑아내고 큰 놈을 남겨 두어 0.4~0.5척마다 조 한 줄기를 남겨 둔다. 모가 두둑의 높이를 넘어서면 비로소 자루가 길고 살구 잎 모양의 호미로 선 채로 두둑의 흙을 갈라 뿌리에 대준다. 6~7일 지나 풀이 나면 다시 작은 보습으로 그 두둑을 갈아 풀을 제거하면서 뿌리에 북을 준다.

이와 같이 2~3차례 하면 고랑은 도리어 두둑이 되고, 두둑은 도리어 고랑이 된다. 뿌리는 흙 속 깊이 묻히게 되므로 가물어도 습기가 보존되며, 줄기는 두터운 북 가운데에 서게 되므로 센 바람에도 다치거나 꺾이지 않는다. 『한서(漢書)』「식화지(食貨志)」의 “바람과 가뭄을 견딘다”라는 말은 이것을 말한다. 이 방법은 밭농사의 그림쇠[規]와 곱자[矩]이며 수준기[準]와 먹줄[繩]이다.

이 방법을 버리고 조를 재배하는 것은 그림쇠와 곱자를 쓰지 않고서 동그라미와 네모를 그리는 꼴이다.

임원경제지』, 본리지 권5, 종예 상, 속류

1)두둑은 밭에서 골을 타서 만든 두두룩한 부분이고, 고랑은 밭두둑과 밭두둑 사이에 있는 골이다. 도랑은 배수로고, 이랑[畝]은 고랑과 두둑을 합한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이랑은 밭두둑과 같은 말로 사용되지만, 서유구(徐有榘)는 1묘(畝)에 고랑 3개와 두둑 3개를 만든다고 하여 밭의 구획을 설명할 때 별도의 단위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므로, 흙을 쌓아 둔덕을 만든 부분은 두둑으로 통일하였다.
2)끙게는 씨앗을 뿌리고 흙을 덮거나 흙덩이를 부수거나 흙을 다지는 데 사용하는 연장이다. 끙게에 봇줄을 매고 사람이나 소가 끌고 다니면서 흙덩이를 부수고 땅바닥을 고른다.

種粟莫如用后稷畎田法. 九十月治地, 三耕六耙, 令極細軟. 以鐵刃杴環田之四界掘溝, 深二尺, 廣如之. 復於田內, 隔六尺作橫溝, 深一尺五寸, 廣如之, 長則竟畝. 明年淸明穀雨之間, 用小鑱, 耕作細畎于畝上, 廣尺深尺. 每一畝三畎三伐, 則伐之高廣, 如畎之深廣也. 內厚鋪糞灰于畎中, 竅瓢盛粟而播之. 疏密欲均, 覆土厚一指. 看其地之燥濕剛脆如何, 或勞或撻或砘. 苗生二三葉, 卽手芸科定. 去在存兄, 每四五寸植一禾. 苗長出壟, 始以長柄杏葉鋤, 立劃壟土以附根. 過六七日草生, 復用小鑱, 耕其壟而去草培根. 如是數三次, 則畎反爲壟, 壟反爲畎. 根在深土之下, 故旱而保澤, 莖立厚培之中, 故風不損折. 漢志所謂, 能風與旱, 此之謂也. 此法卽陸農之規矩準繩. 捨此法而種粟者, 廢規矩而爲方圓之類也.

『林園經濟志』, 本利志 卷5, 種藝 上, 粟類

이 사료는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저술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본리지(本利志) 권5, 종예(種藝) 상(上), ‘속류(粟類)’조에 실려 있는 견종법(畎種法)의 실시에 대한 내용이다.

조선 시대 밭농사에서는 농종법이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농종법은 밭에 두둑과 고랑을 만들고 두둑 위에 종자를 파종하는 방법이다. 그 후 17~18세기에 들어오면서 조선 후기 밭농사에서는 견종법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견종법은 농종법과 반대로 밭의 고랑[畎]에 종자를 뿌리는 방식이다.

견종법은 그늘진 고랑 사이에 씨앗을 심기 때문에 수분의 보존이 용이하고 가뭄에도 싹이 잘 튼다. 또 보온 효과가 높으며, 통풍이 잘되고, 잡초 제거도 쉬워 수확량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배수가 잘되지 않으므로 주로 수재의 염려가 적은 겨울 작물을 파종할 때 알맞은 방법이며, 여름작물이라도 수분이 쉽게 빠져나가는 모래질의 땅에 심을 때는 견종법이 사용될 수 있다. 사료에서는 청명(淸明)곡우(穀雨) 사이 조[粟]를 심는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데, 청명과 곡우는 음력 3월 봄에 해당한다. 올조[早生粟]나 올기장[早生黍]과 같은 식물은 본래 다소의 건조함과 저온에도 견디지만 이처럼 건조한 초봄에 파종할 경우 가뭄과 추위를 견딜 수 있도록 밭고랑에 심는 방법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파종법은 기본적으로 작물의 생육 환경을 고려하거나 노력을 절감하려는 목적으로 취사선택된다. 따라서 두둑에 씨앗을 심는 파종법과 고랑에 씨앗을 심는 파종법 중 특정 방법이 낫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견종법이 확산되었는데, 이는 농기구의 발달에 따라 밭의 고랑을 좁고 깊게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고, 고랑을 깊게 파서 작물의 특성에 따라 재배하면 수확량이 늘어나는 장점이 점차 알려졌기 때문이다.

견종법간종법(間種法)과 결합하여 2년 3작의 농업 형태를 가능하게 하였다. 가을에 보리나 밀을 고랑에 파종하고 이듬해 봄에 이들 작물이 자라는 동안 둔덕에 콩이나 조를 심는다. 이후 고랑에 심었던 보리를 5월에 수확한 후 콩이나 조가 자라는 곳에 흙을 북돋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연작이 가능한 중부 이남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며, 강원도나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와 같은 북부 지역은 휴한 농법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활용되었다.

견종법은 그 장점으로 인하여 꾸준히 확산되었지만 서유구 생존 당시인 18세기까지도 여전히 지역적 편차가 컸으며, 농종법 역시 계속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농종법은 이전의 만종법(漫種法)에 비해서는 진일보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대동소이한 측면이 있었다. 두둑과 고랑을 둘 다 만드는 경우에도 두둑의 폭은 너무 넓고 상대적으로 고랑은 얕고 좁게 만드는 관행 때문에 결국 씨앗을 두둑 위에 흩어 뿌리게 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서유구는 이러한 농법의 문제점으로 씨앗이 낭비되고, 작물이 깊게 뿌리내리지 못해 바람에 취약하며, 가뭄에 무방비하다는 점을 들어 견종법을 주장하였다. 이는 중국의 대전법(代田法)에 자신의 견해를 첨가하여 보완한 것으로 당시 농민들 사이에서 이미 행해지고 있던 견종법과도 차이가 있었다. “두둑을 갈아 풀을 제거하면서 뿌리에 북을 준다”는 것은 곧 잡초 제거, 영양분 보충, 풍해 방지를 동시에 해결하는 방안이며, 이를 위해 그는 “1묘마다 고랑[畎] 3개와 두둑[伐] 3개”와 같이 밭을 갈고 구획하는 방법과 그 규격, 배수로의 위치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당시 농부들은 보리와 밀은 고랑에 심고 이 두 작물이 자라는 동안 두둑에는 조를 심어서 수확하곤 하였다. 그러나 고랑이나 두둑의 크기가 지역이나 농가마다 일정하지 않고, 또 서유구가 보기에 대체로 간격이 너무 넓었다. 그는 이러한 밭갈이와 간종법이 결합된 관행으로 인하여 고랑에 심어야 적합한 작물인 조를 두둑에 심게 되고, 이는 수확량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그는 같은 면적의 밭에 고랑과 두둑의 개수를 대폭 늘려서 조 역시 다른 작물처럼 고랑에 재배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밭 손질에 투입되는 노동력을 늘려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따라서 당시 농민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한 견종법과 별개로 서유구가 제시한 견종법이 어느 정도로 확산되었는지 여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문제이다.

조선 후기 밭농사에서 견종법의 실시는 생산량 증가 및 노동력의 절감을 가져왔으며, 이는 논농사의 이앙법 확대와 더불어 토지 생산성 향상의 주 요인이었다. 『임원경제지』 본리지(本利志)는 서유구와 같은 실학자들이 부의 불공평한 분배 개선, 농민의 생활수준 향상 등 당시 사회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실질적인 생산력 향상 방안을 연구하였음을 보여 주는 사료라 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조선시대 양반가의 농업경영』, 김건태, 역사비평사, 2004.
『조선후기농학사연구』, 김용섭, 일조각, 1988.
『조선농업사연구』, 민성기, 일조각, 1988.
『조선후기 사회경제사의 연구』, 송찬식, 일조각, 1997.
『조선시대 농서 편찬과 농업의 발달』, 염정섭,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편저
『풍석 서유구와 임원경제지』, 심경호 외, 소와당,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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