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경제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신해통공

차대1) 하였다. 저자의 백성에게 육의전 이 외에도 함께 매매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중략)……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도성에 사는 백성의 고통으로 말한다면 도고(都庫)2)가 가장 심합니다. 우리나라 난전(亂廛)3)의 법은 오로지 육의전이 위로 나라의 일에 순응하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이익을 독차지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근래 빈둥거리며 노는 무뢰배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스스로 가게 이름을 만들고, 무릇 사람들의 생필품에 관계되는 것들을 제각기 멋대로 전부 주관합니다. 크게는 말이나 배에 실은 물건부터 작게는 머리에 이고 손에 든 물건까지 길목에서 사람을 기다렸다가 싼값으로 억지로 사는데, 만약 물건 주인이 듣지 않으면 곧 난전이라 부르면서 결박하여 형조와 한성부에 잡아넣습니다. 그러므로 물건을 가진 사람들이 간혹 본전도 되지 않는 값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팔아 버리게 됩니다.

이에 제각기 가게를 벌여 놓고 배나 되는 값을 받는데, 평민들이 사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만약 부득이 사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 처한 사람은 그 가게를 버리고서는 다른 곳에서 물건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그 값이 나날이 올라 물건 가격이 비싸기가 신(臣)이 젊었을 때에 비해 3배 또는 5배나 됩니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채소나 옹기까지도 가게 이름이 있어서 사사로이 서로 물건을 팔고 살 수가 없으므로 백성이 음식을 만들 때 소금이 없거나 곤궁한 선비가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일까지 자주 있습니다. 무릇 이와 같은 도고를 금지한다면 그러한 폐단이 중지될 것이지만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단지 원성이 자신에게 돌아올까 겁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한 지방이 통곡하는 것이 한 집안만 통곡하는 것과 어찌 같으랴. ’ 하였습니다. 간교한 무리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남몰래 저주하는 말을 피하고자 도성의 수많은 사람들의 곤궁한 형편을 구제하지 않는다면, 나라를 위해 원망을 책임지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땅히 평시서(平市署)로 하여금 20~30년 사이에 새로 벌인 영세한 가게 이름을 조사해 내어 모조리 혁파하도록 하고, 형조와 한성부에 분부하여 육의전 이외에 난전이라 하여 잡아오는 자들에게는 벌을 베풀지 말도록 할 뿐만이 아니라 반좌법(反坐法)4)을 적용하면, 장사하는 사람들은 서로 매매하는 이익이 있을 것이고 백성도 곤궁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 원망은 신이 스스로 감당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모두 옳다고 하여 따랐다.

정조실록』권22, 15년 1월 25일(경자)

1)차대(次對) : 매달 여섯 차례씩 의정(議政)⋅대간(臺諫)⋅옥당(玉堂) 들이 임금 앞에 나아가 정무를 보고하던 일이다.
2)도고(都庫) : 본래 특권 상인이던 공인(貢人)들이 공납할 물품을 미리 사서 쌓아 두던 창고를 뜻하였는데, 조선 후기 이후 대규모 자본을 동원한 매점 상업이 등장하면서 상품의 매점매석을 통해 이윤의 극대화를 노리던 상행위 또는 그러한 상행위를 하던 상인이나 상인 조직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3)난전(亂廛) : 조선 후기 전안(廛案)에 등록되지 않거나, 허가된 상품 이외의 것을 몰래 파는 행위 또는 가게이다. 전안은 시전에서 취급하는 물종과 상인의 주소⋅성명을 등록한 행위자의 대장을 말한다.
4)반좌법(反坐法) : 없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고발한 사람에게 고발당한 사람이 받은 처벌과 같은 형벌을 가하던 제도이다.

次對. 許市民六廛外通共和賣. ……(中略)…… 左議政蔡濟恭啓言, 若論都下民瘼, 都庫爲最. 我朝亂廛之法, 專爲六廛之上應國役, 使之專利也. 近來游手無賴之輩, 三三五五, 自作廛號, 凡係人生日用物種, 無不各自主張. 大以馬駄船載之産, 小而頭戴手提之物, 伏人要路, 廉價勒買, 而物主如或不聽, 輒稱亂廛, 結縛歐納於秋曹京兆. 故所持者, 雖或落本, 不得不垂涕泣賣去. 於是乎各列其肆, 以取倍價, 平民輩不買則已, 若係不得不買者, 則捨其廛, 更不可從他求得. 以故其價日增, 凡物之貴, 較視於臣之年少時, 不啻爲三五倍. 近日則甚至蔬菜甕器, 亦有廛號, 不得私自和賣, 民生之食而無鹽, 窮士之停廢祭先者, 往往有之. 凡此都庫, 禁之則當止, 而猶且噤默者 不過怵畏怨聲之歸於己耳. 古人曰, 一路哭, 何如一家哭. 避奸民輩三三五五之暗地咀口, 不救都下億萬人倒懸之勢, 則爲國任怨之意安在哉. 宜使平市署, 考出數三十年以來零瑣新設之廛號, 一倂革罷, 分付秋曹京兆, 六廛外以亂廛捉納者, 非徒勿施, 施以反坐, 則商賈有和賣之利, 民生無艱窘之患. 其怨則臣可自當之矣. 上詢諸臣, 僉曰可, 從之.

『正祖實錄』卷22, 15年 1月 25日(庚子)

이 사료는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대에 시행된 신해통공(辛亥通共)에 관한 내용이다. 1791년(정조 15년) 각 시전의 국역(國役)은 존속시키면서 시전 상인이 도고에 대해 난전을 금할 수 있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해제시킨 조치이다. 당시가 신해년이었으므로 신해통공이라 한다. 이로써 각종 상품에 대한 사상인(私商人)의 자유로운 매매가 인정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대표적인 특권 상인인 육의전국역 등 각종 부담을 지는 대신 난전을 금지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한편 난전이라고 하여 전안(廛案)에 등록되지 않은 자가 서울에서 상업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이들은 특권을 지닌 시전 상인과 대결하면서 성장한 계층으로 주로 서울 및 송도의 부상(富商)⋅도고(都庫) 등이었으며, 군병(軍兵) 및 각 영문(營門)의 비특권적인 수공업자 등도 많았다. 이 외에도 권세가(權勢家)와 그들의 가노(家奴), 관아의 저리(邸吏) 등이 난전을 형성하였다.

18세기 중엽 이후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은 소상품 생산자, 소상인층의 자유로운 성장을 가로막았으며, 이로 인해 나타나는 물가고로 도시 빈민층이 받는 피해는 컸다. 이러한 유통 질서 문란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자유롭게 물건을 매매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791년(정조 15년) 좌의정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주창에 의해 30년 이내에 설치된 시전을 폐지하고,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하였다. 이를 신해통공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일반 상인들이 금난전권에 저촉되지 않고 자유롭게 상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시전은 자유로운 상행위를 폐지하고 금난전권을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한편, 특권이 존속하는 육의전에 편입되려고 노력했지만 정부에 의해 모두 차단되었다. 신해통공은 새로운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을 반영한 것으로, 당시 상업 발전의 또 다른 계기를 마련해 준 개혁 정책이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채제공의 경제 정책에 관한 고찰-특히 신해통공 발매론을 중심으로-」,『부대사학』4,김동철,부산대학교 사학회,1980.
「조선 후기에 있어서의 도시상업의 새로운 전개-난전을 중심으로-」,『한국사연구』2,김영호,한국사연구회,1968.
「18세기말 서울 상업계의 변화와 정부의 대책」,『역사학보』142,이욱,역사학회,1994.
저서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강만길,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3. .
『조선 후기 서울상업발달사 연구』, 고동환, 지식산업사, 1998. .
『조선후기 시전 연구』, 변광석,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7.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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