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나라가 작고 백성이 가난하다. 지금 밭을 가는 작업에 부지런하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며, 상업을 유통시키고 공업에 혜택을 주어 나라 안의 이익을 다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할까 근심이다. 또 반드시 먼 지방의 물자가 유통한 후에 재화와 재물이 증식하고, 백가지 용품을 생산할 수 있다. 대저 수레 백 대에 싣는 것이 한 척의 배에 미치지 못하고, 육로로 천리를 가는 것이 뱃길로 만리를 가는 것보다 편리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통상을 하는 자는 또한 반드시 물길을 귀하게 여긴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서쪽으로는 등래(登萊)
중국 산동성에 있던 등주와 내주
와 직선으로 600여 리 떨어져 있고, 남해의 남쪽은 곧 오나라의 입구와 초나라의 끝을 서로 바라보고 있다. 송나라의 배는 고려와 통상하였다.
【명주(明州)
중국 절강성 동부의 용강 하류에 발달한 도시
로부터 7일이면】
예성강에 닿았다 하니 가히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은 거의 400년 동안 다른 나라의 배 한 척과도 통상하지 않았다. 대저 어린아이가 손님을 보고 부끄러워서 머뭇거리다가 곧 우는 것은 본성이 아니다. 다만 본 것이 적어 많은 것이 괴상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은 두려워하기 쉽고 의심이 많으며, 풍속과 기상이 촌스럽고 어리석으며, 재주와 식견이 열려 있지 않은 것은 오로지 이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일찍이 황차를 실은 배 한 척이 남해에 정박한 것을 보았다. 나라에 통용되어 10여 년을 사용하였는데, 지금도 존재하는 곳이 있다. 물건은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감히 지금은 면포
를 입고 백지에 글을 써도 부족한 것을 안다. 한 번 배로 통상을 하면 곧 비단 옷을 입고 죽지(竹紙)
'면포' 관련자료
중국에서 만든 얇은 종이
에 글을 써도 남음이 있다. 옛날에 왜가 중국과 통상하지 않았을 때에는 우리를 통해 연경에서 실을 샀는데, 우리나라 사람은 이를 매개함으로써 그 이익을 얻었다. 왜가 심히 이롭지 않음을 알고 직접 중국과 통상한 이후 이미 다른 나라의 시장과 교류하는 곳이 30여 국에 이르렀다. 왜인은 때때로 중국어를 잘하여 능히 천태산(天台山)
39)에 통신사
가 일본에 들어갔다. 서기가 우연히 붓과 먹을 찾으니, 갑자기 중국 먹을 한 짐 가지고 왔다. 또 하루 종일 다녔는데, 끝날 때까지 붉은 융단을 길에 펼쳤고, 다음날도 이와 같이 반복하였다. 그들이 자랑함이 이와 같았다.
중국 절강성 차태현의 북쪽에 있는 산
과 안탕산(雁蕩山)
천태산 남쪽에 있는 산
의 기이함을 말하였다. 천하의 진기하고 괴이한 물품과 중국의 골동품과 그림이나 글씨가 장기도(長崎島)
일본 규슈에 있는 항구
에 많이 몰려들어 끝내는 우리에게 다시 요청하지 않았다. 계미년(1763, 영조
'영조' 관련자료
'통신사' 관련자료
사람이 그 나라를 부유하고 강하게 하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부유하고 강해지는 기술의 조건을 또 어찌하여 남에게 양보하는가? 지금 선박으로 통상하고자 함에 왜는 교활하여 항상 이웃 나라를 엿보려 하고 안남(安南)⋅유구(琉球)⋅대만(臺灣)의 나라는 험하고 멀어서 모두 통할 수 없으니, 오직 중국뿐이다. 중국은 나라가 태평하기를 100여 년이다. 우리나라를 공손하고 순하여 다른 것이 없다고 여긴다. 좋은 말로 청하면서 말하기를, 일본⋅유구⋅안남⋅서양의 나라들은 역시 모두 민중(閩中)⋅절강(浙江)⋅교주(交州)⋅광동(廣東)의 사이에서 서로 거래하니, 여러 나라에게 주는 이익을 원한다고 하면 저들은 반드시 이를 허락하여 의심하지 않고, 또한 항상 우려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중국의 뛰어난 장인을 모아 배 한 척을 만들되, 중국과 같이 견고하고 촘촘하게 만들기에 힘쓴다.
지금 황해도에 와서 정박하는 황당선(荒唐船)
본국의 허가 없이 바다를 왕래하는 선박
은 모두 광녕 각화도의 사람이다. 항상 4월에 와서 해삼을 캐고, 8월에 돌아간다. 이미 금지할 수 없으면 곧 저자를 벌이고 후한 뇌물로써 그들을 꾀하는 것만 못할 것이니, 선박 제도를 배우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 반드시 일찍이 표류당한 사람과 대청도(大靑島)⋅소청도(小靑島)⋅흑도(黑島)의 백성들을 불러 모아 물길을 인도하게 한다. 가끔 중국의 바다 상인들을 초청하여 해마다 십여 척의 배를 한두 번씩 전라도와 충청도 사이와 서울 한강 입구에 정박하도록 하고, 수비하는 보루를 엄중하게 설치하여 다른 변고를 준비한다. 배에 올라서 교역할 때에는 시끄럽게 지껄이거나 훔치지 못하도록 하여 먼 곳에서 온 사람에게 조소와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선주를 후하게 대접하되 손님의 예의로써 대우하면 고려의 옛일과 같다. 이와 같이 곧 스스로 가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들이 역시 스스로 올 것이다. 우리가 그 기예를 배우고 그 풍속을 찾아 나라 사람들에게 그 견문을 넓혀 주고, 천하의 위대함과 우물 안 개구리의 부끄러움을 알게 한다면, 곧 그것은 세상의 이치와 형편을 배우는 것이다. 또 어찌 교역의 이로움뿐이겠는가.토정(土亭)
가 연경의 태학에 입학할 수 없으면 요동학에 뜻을 두어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단지 중국의 배만 통상하고, 해외의 모든 나라와 통상하지 않는 것은 역시 일시적인 술책이고, 정론은 아니다. 국가의 힘이 조금 강해지고 백성의 생업이 안정되면 차례로 이를 통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지함(李之菡, 1517〜1578)
은 일찍이 다른 나라의 상선 몇 척과 통상하여서 전라도의 가난함을 구제하고자 하였으니, 그 뛰어난 소견은 진실로 미칠 수가 없다.
【『시경』에 “내 옛사람을 생각하니 진실로 내 마음과 부합하는구나”라는 말이 있다. 강소(江蘇)⋅절강(浙江)과 통하지 못하면 먼저 요양(遼陽)
요동
의 배와 통상해도 또한 좋을 것이다. 요양에서 압록강까지는 철산(鐵山) 한 모퉁이를 사이로 전라도에서 경상도까지에 불과하다. 또한 모재(慕齋)
'모재(慕齋)' 관련자료
박제가(朴齊家)
스스로 기록함.
'박제가(朴齊家)' 관련자료
『북학의
'북학의' 관련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