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경제수취 제도의 문란과 개편

왜란 직후의 경지 면적 변화

우리 나라의 평상시【즉 임진왜란 이전의】 전결 및 계묘년을해년에 측량한 토지 면적이다.

충청도의 평상시 전결은 25만 2503결 55부 8속이다. 계묘년에 측량한 원 대장 면적은 24만 744결 47부 9속이다. 을해년에 측량한 원 대장 면적은 25만 8461결 49부 8속이다. ……(중략)……

전라도의 평상시 전결은 44만 2189결 7부 2속이다. 계묘년에 경작하는 토지가 19만 8672결 51부 2속이다. 을해년에 측량한 원 대장 면적은 33만 5305결 59부 3속이다. ……(중략)……

경상도의 평상시 전결은 31만 5026결 64부 8속이다. 계묘년에 경작하는 토지가 17만 3=902결 9부이다. 을해년에 측량한 원 대장 면적은 30만 1=725결 36부 3속이다. ……(중략)……

경기도의 평상시 전결은 14만 7=370결 16부 3속이다. ……(중략)…… 계묘년에 측량한 원 대장 면적은 14만 1=959결 93부 3속이다.

강원도의 평상시 전결은 3만 4=831결 37부 5속이다. ……(중략)…… 계묘년에 측량한 원 대장 면적은 3만 3884결 85부이다.

황해도의 평상시 전결은 10만 6832결 70부 8속이다. ……(중략)…… 계묘년에 측량한 원 대장 면적은 10만 8211결 50부 3속이다.

함경도의 평상시 전결은 6만 3821결 90부 1속이다. ……(중략)…… 계묘년에 측량한 원 대장 면적은 5만 4377결 89부 7속이다.

평안도의 평상시 전결은 15만 3009결 13부 1속이다. ……(중략)……

이상 평상시 전결의 총 면적은 151만 5500여 결이다. ……(중략)……

……(중략)……

평상시의 토지 대장은 임진왜란 이후 호조에 보존된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 자료는 호조 서리 김사득의 집에 두었던 자료를 참고한 것이다. 을해년에 토지를 측량할 때에는 오직 하삼도만 측량하고 5도는 측량하지 않았다.

현재 실제로 경작하는 전결수는병술년조이다.】

경기도는 밭이 1만 1694결이고, 조세는 3118석이다. 논은 1만 145결이고, 조세는 2972석이다.

충청도는 밭이 6만 1344결이고, 조세는 1만 6358석이다. 논은 6만 3281결이고, 조세는 1만 8313석이다.

전라도는 밭이 6만 9671결이고, 조세는 2만 1405석이다. 논은 13만 765결이고, 조세는 3만 8185석이다.

경상도는 밭이 9만 5048결이고, 조세는 2만 8592석이다. 논은 9만 4526결이고, 조세는 3만 751석이다.

강원도는 밭이 5406결이고, 조세는 1442석이다. 논은 2850결이고, 조세는 759석이다.

황해도는 밭이 3만 5057결이고, 조세는 9348석이다. 논은 9181결이고, 조세는 2448석이다.

평안도는 밭이 4만 2844결이고, 조세는 6524석이다. 논은 4717결이고, 조세는 1358석이다.

함경도는 밭이 4만 4772결이고, 조세는 1만 1939석이다. 논은 2034결이고, 조세는 540석이다.

8도를 총계하면 밭이 36만 5837결이고, 논은 30만 8472결이다. 조세는 19만 5200여 석이다.【】즉 29만 2500여 섬(斛)이다. 매년 결부가 어떤 경우 증감이 있었으나 대개는 이와 같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서리들이 제멋대로 고치고 누락시킨 것이다. 5도는 곧 을해년 역시 토지 측량을 하지 않았고, 병자호란 이후 문서를 또 모두 분실하여 문란함이 더욱 심하다.【】 ……(하략)……

반계수록』권6, 전제교설 하, 국조전제부

本國平時【卽壬辰倭亂以前】田結及癸卯乙亥量田數.

忠淸道

 平時田結二十五萬二千五百三結五十五負八束.

 癸卯元籍二十四萬七百四十四結四十七負九束.

 乙亥元籍二十五萬八千四百六十一結四十九負八束內. ……(中略)……

全羅道

 平時田結四十四萬二千一百八十九結七負二束.

 癸卯時起十九萬八千六百七十二結五十(一)負二束.

 乙亥元籍 三十三萬五千三百五結五十九負三束內. ……(中略)……

慶尙道

 平時田結三十一萬五千二十六結六十四負八束.

 癸卯時起十七萬三千九百二結九負.

 乙亥元籍三十萬一千七百二十五結三十六負三束內. ……(中略)……

京畿

 平時田結十四萬七千三百七十結十六負三束內. ……(中略)……

 癸卯元籍十四萬一千九百五十九結九十三負三束.

江原道

 平時田結三萬四千八百三十一結三十七負五束內. ……(中略)……

 癸卯元籍三萬三千八百八十四結八十五負.

黃海道

 平時田結十萬六千八百三十二結七十負八束內. ……(中略)……

 癸卯元籍十萬八千二百十一結五十負三束.

咸鏡道

 平時田結六萬三千八百二十一結九十負一束內. ……(中略)……

 癸卯元籍 五萬四千三百七十七結八十九負七束.

平安道

 平時田結十五萬三千九結十三負一束內. ……(中略)……

 已上平時田結總一百五十一萬五千五百餘結. ……(中略)……

……(中略)……

  平時田籍 壬辰亂後 地部無有存者. 此乃得之於書吏金士得家藏. 乙亥量田時 則只量下三道 不量五道.

卽今時起田結數【丙戌年條】

京畿

 田一萬一千六百九十四結. 稅三千一百十八石.

 畓一萬一百四十五結. 稅二千九百七十二石.

忠淸道

 田六萬一千三百四十四結. 稅一萬六千三百五十八石.

 畓六萬三千二百八十一結. 稅一萬八千三百十三石.

全羅道

田六萬九千六百七十一結. 稅二萬一千四百五石.

畓十三萬七百六十五結. 稅三萬八千二百八十一石.

慶尙道

田九萬五千四十八結. 稅二萬八千五百九十二石.

畓九萬四千五百二十六結. 稅三萬七百五十一石.

江原道

田五千四百六結. 稅一千四百四十二石.

畓二千八百五十結. 稅七百五十九石.

黃海道

田三萬五千五十七結. 稅九千三百四十八石.

畓九千一百八十一結. 稅二千四百四十八石.

平安道

田四萬二千八百四十四結. 稅六千五百(四)二十四石.

畓四千七百十七結. 稅一千三百五十八石.

咸鏡道

田四萬四千七百七十二結. 稅一萬一千九百三十九石.

畓二千三十四結. 稅五百四十石.

八道通共田三十六萬五千八百二十七結. 畓三十萬八千四百七十二結.

通稅十九萬五千二百餘石.【卽二十九萬三千五百餘斛. 逐年結負 或有增減 而大約如此. 然皆是書員輩任意偸脫者. 五道則乙亥 亦不量田, 丙子亂後 文書又皆闕(閪)失 紊亂尤甚.】 ……(下略)……

『磻溪隧錄』卷6, 田制巧說 下, 國朝田制附

이 사료는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저술한 『반계수록(磻溪隧錄)』권6, 전제교설(田制巧說) 하(下)의 「국조전제부(國朝田制附)」에 기록되어 있는 임진왜란 전후의 경지 면적 변화에 대한 내용이다. 유형원이 토지 제도 개혁을 위한 전제(田制)로 당시의 실상을 파악한 것이다.

토지는 중세 사회에서 국가가 재정에 필요한 부세를 거두는 가장 중심적인 대상이었다. 따라서 이를 체계적으로 수취하기 위해 조선 정부도 토지에 대한 파악 및 수취 기준을 마련하였는데, 이것이 양전제(量田制)였다. 양전은 각 지방의 토지 결수를 조사하고, 이를 통해 농민에게 세를 배정하여 징수하는 것이다. 여기서 각각의 토지 위치, 종류와 진전(陳田)의 발생 여부, 면적, 소유주 등을 조사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양전결부법(結負法)으로 하여 전품(田品)을 6등으로 구분하고 20년마다 한 번씩 양전을 하여 양안을 작성, 이를 호조와 각 도, 각 읍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토지의 종류는 해마다 경작하는 정전(正田)과 혹 경작하기도 하고 혹 묵히기도 하는 속전(續田)으로 나누어, 정전에는 정기적으로 세금을 부과하고, 속전은 경작할 때만 세금을 내게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원리나 원칙은 실제 면적 산출의 어려움과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서리들의 자의적인 운영, 농사 기술의 변화에 따른 세액의 변화, 양전 비용의 문제 등으로 인해 실상 지켜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비용의 소모와 조사의 번거로움에도 임진왜란을 거친 뒤에는 전국적인 양전 사업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전쟁으로 인하여 농민들이 토지에서 이탈하고 많은 땅이 황폐해진 탓에 이전의 결수(結數)에 의거한 과세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미 임진왜란 전에 과세 기준인 연분 9등의 제도가 무너지고 마지막 등급인 하지하(下之下)로 세액이 고정된 상황에서 농사가 가능한 땅의 급격한 감소는 국가 전세 수입에 큰 타격을 주었다. 게다가 전쟁 중에 토지 대장이 많이 상실되었던 점, 전후에 계속 개간이 이루어져서 농토의 경계 변화가 심했던 점도 양전 실시의 중요한 이유였다.

사료에서는 세 시기의 경지 면적을 제시하고 있는데, 첫 번째 임진왜란 이전 평상시의 전결은 총 151만 5500여 결로 되어 있다. 두 번째 계묘년의 결수는 1603년(선조 36년) 실시한 계묘양전의 결과로서 총 95만 1749결이라는 수치가 제시되어 있다. 본래 임진왜란양전은 1600년(선조 33년)에 처음 계획되었으나, 지방관이 각기 조사하여 보고하는 방식에 크게 의존함으로써 실행이 지지부진하였다. 이에 1603년에 다시 추진하고 다음 해 봄에 끝마쳐 전란 후 처음으로 전국적인 규모의 양전이 이루어졌다. 계묘양전에서 평안도는 제외되었으나 나머지 7도의 결수로서 대략적인 증감이 파악 가능하며, 특히 삼남 지방은 평시와 비교할 때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직후의 30만 결에 비해서는 늘어난 수치이며 국가 재정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계묘양전 이후에도 양전의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되었다. 임진왜란 이전과 비교한다면 여전히 부호층의 토지 누락이 많았고, 개간이 꾸준히 늘어나 가경전(加耕田)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나아가 공납제 개혁에서도 주요 현안으로 등장한 대동법 실시를 위해서도 양전은 절실한 과제로 부각하였다. 그리하여 계묘양전 이후 20년 만인 1623년(인조 1년)부터 양전 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1634년(인조 12년)에 다시 삼남 지방에 양전을 하였는데 이것이 갑술양전(甲戌量田)이다. 본래 삼남 지방에 양전을 한 뒤 곧바로 강원도와 경기에서 시행하고자 하였으나 실제로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때 조사된 삼남 지방의 총 결수는 89만 5489결인데, 실제 경작지는 54만 860결이고 나머지 35만 4629결은 진전이었다.

사료에 제시된 을해년(1635) 삼남 지방의 결수는 89만 5491결로서 갑술양전에 이어지는 조사 결과이며, 전체 결수에서는 큰 증감이 없다. 모두 계묘년 삼남 지방 총 결수인 61만 3318결에 비해서는 크게 늘어난 수치로, 평상시 삼남 지방의 전결 수인 100만 9718결에 근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갑술양전의 목표는 토지를 철저하게 파악하여 임진왜란 이전의 결총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계묘양전은 전국적인 조사였음에도 진전과 기경지의 여부 등이 철저히 파악되지 않았다. 중앙의 지배력이 불완전한 가운데, 지방 수령들이 실제 현장에 나가서 조사하지 않고 장부를 꾸미거나, 실제로는 양전 사업을 시행하고 있지 않다가 양전 어사의 도착이 임박해서야 착수하는 등 조사가 부실한 경우가 많았다. 무엇보다 큰 문제점은 조사의 불평등함으로, 대토지 소유자는 상대적으로 낮은 토지 등급을 받는 반면 소농들은 불리한 등급으로 판정을 받는 일이 많았다. 전결의 은루(隱漏) 현상은 계속되었고, 부호와 소농민 간의 세금 불균형은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갑술양전은 그 방식에서 이전과 차이를 두었으며, 이를 통해 계묘양전에서 파악하지 못했던 진황지가 등록되고 전반적으로 전품도 상승되면서 결총이 획기적으로 늘어나 거의 임진왜란 이전의 결총 수준에 도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차이는 진전을 전보다 엄격하게 구분하여 조사한 것이었다. 조선 전기 양전에서 진전은 독자적 항목으로 의미를 갖지 못하고 정전과 동일하게 등록되었다. 그러나 갑술양전에서는 경작을 하는 기경전과 진전의 구별을 강화하고 양안에 기록하여 면세 혜택을 주었다. 그 결과 총 결수에는 많은 진전 결수가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갑술 양전은 각 도에 2명씩 6명의 양전사를 파견하여 직접 조사를 담당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광범위한 개간지, 곧 누락된 토지를 많이 보유한 재지 지주층을 통제하는 데 효과적이었으며 수령에게 맡긴 계묘양전에 비해 한층 누락 토지의 색출이 강화된 양전이었다. 이때 정부는 결부법을 개정하여 국초 이래의 토지 등급에 따라 각각 다른 자[尺]를 사용하던 법을 폐지하고, 전분 6등에 모두 같은 자를 통용하게 하였다. 이러한 동척제(同尺制)는 이척제(異尺制)보다 양전 과정을 통제하기에 효과적이었으며, 그 뒤 양전에서도 계승되었다.

다만 실제 운영에서 측량 기준과 단위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일은 사라지기 어려웠다. 이러한 운영의 미숙함은 지주층과 연관된 양전 부정의 소지를 계속 남겼으며, 소농들의 민원도 상당하였다. 더욱이 1634년 양전을 계기로 실시한 영정법(永定法)은 수취 편의상 풍흉에 관계없이 전분을 9등급으로 하고, 삼남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방을 하하년으로 고정시켰는데, 이러한 고정 세율 적용은 본래 생산량에 응하는 수취라는 원칙에 사실상 위배되는 것이었다. 곧 흉년이 들어 수확이 감소해도 농민들은 더 이상 감세를 받을 길이 없었다. 이는 해마다 진전이 확대되고 세를 거둘 수 있는 땅은 오히려 감소하게 만드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사료에서 제시하는 세 번째 전결 수는 1646년(인조 24년) 병술년의 수치이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발발하면서 다시 한 번 국가 재정이 탕진되었고 양안 등 토지대장 멸실, 농민의 토지 이탈 등이 발생하여 양전의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기근과 전염병 등이 겹친 상황에서 양전 사업의 실시 자체가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킬 것을 우려하여 대대적인 양전 사업은 더 이상 실시되지 않았다.

이후 현종(顯宗, 재위 1659~1674)부터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대에 이르기까지 양전 사업은 각 도 또는 삼남 지방에서 실시되다가, 1720년(숙종 46년)에 다시 한 번 전국 규모의 경자양전이 실시되었다. 효종(孝宗, 재위 1649~1659) 대에 들어 부분적으로 실시된 양전 사업갑술양전과 기준이 또 달랐으며, 각 도는 서로 다른 시기의 양안에 기준을 두게 되어 수취의 비합리성 해결이라는 취지와는 동떨어지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숙종 말년에 실시된 경자양전양전청(量田廳)을 두고 균전사를 보내 일제히 토지를 측량하였으며, 진전과 은루결의 파악에 집중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다시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정조(正祖, 재위 1776~1800) 대에 들어서는 도별 양전이 읍별 양전으로 바뀌고 그 횟수 역시 점차 줄어들었는데, 이는 경자 양전과 같은 대규모 양전의 비효율성과 혼란을 막고 정부의 양전 통제를 강화하며, 부세 모순이 심각한 군현부터 선별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취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전국 규모 양전 사업이 이루어진 1900년대 초까지도 조선조 양전법의 기본적인 단위인 결부제는 계속 남아 있었으므로, 양전 사업은 그 의도와 달리 공평한 수취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는 못하였다. 결부법은 토지의 등급을 어떻게 매기느냐에 따라 토지의 양이 달라지는 등 결함이 많았고, 이 때문에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양전에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후기 계묘⋅갑술양전의 추이와 성격」,『부대사학』19,오인택,부산대학교 사학회,1995.
저서
『조선중기 국가와 사족』, 김성우, 역사비평사, 2001.
편저
『장기적인 자연재해와 전란의 피해』, 이태진, 국사편찬위원회, 1998.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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