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경제수취 제도의 문란과 개편

영정법 시행

인조 갑술(1634, 인조 12)에 양전(量田)을 한 뒤에 마침내 시년상하의 법1)을 혁파하였다. 삼남 지방은 처음에 각 등급으로 결수를 정하고조안(租案)에 기록하였다. 영남은 상지하(上之下)까지만 있게 하고, 호남과 호서 지방은 중지중(中之中)까지만 있게 하며, 나머지 5도는 모두 하지하(下之下)로 정하여 전례에 의하여 징수한다. 경기⋅삼남⋅해서⋅관동은 모두 1결에 전세 4두를 징수한다.

만기요람』, 재용편2, 수세, 각도수세

1)시년상하(視年上下)의 법 : 시년상하 작렴법(視年上下作斂法)이라고도 한다. 1444년(세종 26년)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고, 1년의 상하를 보아 작성하는 법은 매년 9월 15일 이내에 관찰사와 수령이 연분(年分)의 등급을 조사하고 정하며, 계문(啓聞)하여 시행하였다. 연분은 9등이 있는데, 10분은 상상년(上上年)이라 하여 매 1결에 20두를 징수하고, 9분은 상중년(上中年)이라 하여 18두를 징수하고, 8분은 상하년(上下年)이라 하여 16두를 징수하고, 7분은 중상년(中上年)이라 하여 14두를 징수하고, 6분은 중중년(中中年)이라 하여 12두를 징수하고, 5분은 중하년(中下年)이라 하여 10두를 징수하고, 4분은 하상년(下上年)이라 하여 8두를 징수하고, 3분은 하중년(下中年)이라 하여 6두를 징수하고, 2분은 하하년(下下年)이라 하여 4두를 징수하고, 1분은 면세로 하되 관서⋅관북은 3분의 1을 감하고, 제주의 3읍은 반을 감하였다.

仁祖甲戌量田後, 遂罷視年上下之法. 三南則以當初各等所定結數, 仍錄租案. 嶺南只有上之下, 兩湖只有中之中, 其餘五道皆定爲下之下, 依前收稅. 京畿三南海西關東凡一結收田稅四斗.

『萬機要覽』, 財用編2, 收稅, 各道收稅

이 사료는 『만기요람(萬機要覽)』재용편(財用編)2, 수세(收稅)에 기록되어 있는 영정법(永定法) 시행에 대한 내용이다. 『만기요람』은 1808년(순조 8년) 서영보(徐榮輔, 1759~1816)⋅심상규(沈象奎, 1766~1838) 등이 왕명으로 편찬했는데, 조선 왕조의 재정과 군정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왕이 일상 정무를 수행하는 데 수시로 참고할 수 있도록 편찬한 것이다.

영정법은 1635년(인조 13년)에 제정된 전세 징수법으로 정식 명칭은 영정과율법(永定科率法)이다. 조선 시대 농사 기술은 발전하였지만 아직 기후변동에 따라 농업 생산력이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현실 때문에 일률적으로 세액을 고정하는 데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다. 그리하여 농사의 풍흉에 따라 세액에 차등을 두는 연분법(年分法)을 도입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에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대에 공법(貢法)을 제정하면서 토지의 비옥한 정도를 6등급으로 분류하여 전세를 징수하던 전분6등법(田分六等法)과 수확량의 풍흉에 따라 9등급으로 분류하여 징수하던 연분9등법(年分九等法)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과세 기준이 복잡하고 작황을 일일이 파악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현실적으로 적용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배경으로 15세기 말부터 이를 엄격히 적용하지 않고 최저 세율인 4~6말을 징수하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백성의 삶이 더욱 황폐해짐에 따라 풍흉을 따지지 않고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전세를 정액화하였다.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크게 상⋅중⋅하로 구분하고 각각을 다시 3등급으로 세분화해 징수액을 2두씩 차이를 두어 상상전(上上田)은 20말, 상중전(上中田)은 18말, 상하전(上下田)은 16말, 중상전(中上田)은 14말, 중중전(中中田)은 12말, 중하전(中下田)은 10말, 하상전(下上田)은 8말, 하중전(下中田)은 6말, 하하전(下下田)은 4말을 징수하였다. 또 지역에 따라 최고급지를 한정하였는데 경상도는 상하전, 전라도와 충청도는 중중전을 기준으로 하였으며, 나머지 5도는 하하전의 4말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농지가 하하전으로 분류되어 실제 징수액은 4말로 고정되었다.

영정법 시행으로 징세액은 낮아졌으나 농민 대부분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소작농이어서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국가에서 부족한 세수를 보충하기 위해 대동미와 삼수미⋅결작 등의 세금과 각종 명목의 수수료⋅운송비 등을 추가로 징수해 오히려 농민들의 부담이 가중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후기 전세제도 연구」,『부산산업대학논문집』9,김옥근,부산산업대학,1972.
「16〜17세기 전세의 정액화 과정」,『한국사론』30,박종수,서울대학교 국사학과,1993.
「조선중기 전세수취와 영정법 도입」,『홍익사학』6,송명석,홍익대학교 사학회,1996.
편저
「전세제의 개편」, 김진봉, 국사편찬위원회,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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