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초기에, 여러 가지 토공(土貢)
때 비로소 공부(貢賦)
를 제정하고, 세종
때 공안(貢案)
들이 방납(防納)
하고 하급 관리들 또한 백성을 약탈하므로 온갖 폐단이 번다하게 일어나 백성이 견딜 수 없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는 것
은 대략 고려조의 제도를 모방하였다. 태종
'태종' 관련자료
'공부(貢賦)' 관련자료
'세종' 관련자료
각 공물의 상납액⋅상납자 등을 기록한 장부
을 제정하여 그 읍의 생산되는 바에 따라 그곳 백성으로 하여금 서울에 있는 관청에 직접 납부하게 하였다. 용도가 점점 넓어지고 복정(卜定)
지방의 생산물을 강제로 바치게 하는 것
한 것이 어떤 일정한 규칙이 없어 밖으로는 아전들이 사사로운 곳에 보관하여 물종(物種)이 부패하고, 안으로는 세력 있는 지방 사족
'사족' 관련자료
'방납(防納)' 관련자료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
가 공안을 개정하자고 주장하였고, 선조
때 이이(李珥)
가 수미법(收米法)
이후에는 우의정 유성룡(柳成龍)
이 역시 미곡을 거두는 것이 편리하다고 주장하였으나, 일이 모두 성취되지 못하였다. 선조
41년(1608)에 이르러 좌의정 이원익(李元翼)
의 건의로 대동법
을 비로소 시행하여, 민결(民結)
을 설치하였다. 인조
2년(1624)에 이원익
이 다시 건의하여 강원도에도 시행하게 되었으며, 효종
3년(1652)에 우의정 김육(金堉)
의 건의로 충청도에도 시행하게 되었으며, 효종
8년(1657)에는 김육
이 또다시 청하여 전라도 연읍(沿邑)에도 시행하였으며, 현종
3년(1662)에는 형조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청하여 산군(山郡)까지도 아울러 시행하였으며, 숙종
3년(1677)에는 도승지 이원정(李元禎)이 청하여 경상도에도 시행하였으며, 숙종
34년(1708)에는 황해도 관찰사
이언경(李彦經)의 상소
로 황해도에도 시행하게 되었다.
'중종' 관련자료
'조광조(趙光祖)' 관련자료
'선조' 관련자료
'이이(李珥)' 관련자료
공납을 쌀로 바치는 제도
을 시행하기를 청하였으며, 임진왜란
'임진왜란' 관련자료
'유성룡(柳成龍)' 관련자료
'선조' 관련자료
'이원익(李元翼)' 관련자료
'대동법' 관련자료
백성들이 세금을 내는 땅
에서 미곡을 거두어 서울로 옮기게 했는데, 먼저 경기에서 시작하고 드디어 선혜청
'선혜청' 관련자료
'인조' 관련자료
'이원익' 관련자료
'효종' 관련자료
'김육(金堉)' 관련자료
'효종' 관련자료
'김육' 관련자료
'현종' 관련자료
'숙종' 관련자료
'숙종' 관련자료
'황해도 관찰사' 관련자료
'상소' 관련자료
그 방법은 경기⋅삼남(三南)에는 밭과 논을 통틀어 1결에 쌀 12말을 거두고, 관동도 이와 같게 하되 토지 조사가 되지 않은 읍에는 4말을 더하며, 영동(嶺東)
’이라 하였다.
관동(關東) 지방은 영동⋅영서로 나뉨
에는 2말을 더하고, 해서에는 상정법(詳定法)
각 지방의 지리적 특수성에 따라 수량을 조정하는 법
을 시행하여 15말을 거두니, 통틀어 명칭하기를 ‘대동(大同)
'대동(大同)' 관련자료
옛날 여러 도와 각읍에서 각각 그 토산물로 공납
하던 것을 모두 경공(京貢)으로 만들고, 경공주인(京貢主人)
에게 출급(出給)하고 물건을 진상하게 하여, 제향 어공(祭享御供)과 제반 경용(諸般經用)의 수요를 충당하고, 남으면 각 고을에 남겨 놓아 공용(公用)의 비용으로 준비하였다.
'공납' 관련자료
서울에 머물러 있으며 지방 관청의 사무를 연락하고 대행하여 보던 사람
을 정출(定出)하여 거두어들인 미곡으로 그 가격을 헤아려 정하고, 어린작등(魚鱗作等)
단등(單等)⋅양등(兩等)에서부터 혹은 7, 8등(等)에까지 이르며, 또한 달마다 지급하는 것도 있음
하여 공인(貢人)
'공인(貢人)' 관련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