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경제농업 생산력의 증대

농업 노동의 새로운 변화

부농층은 경작하는 토지가 넓어서 빈민을 고용하여 일을 시키거나, 만약 노비가 있으면 밭을 갈지 않고 벼를 베지 않는다. 이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부호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다. 다만 부유한 사람의 토지에 고용되어 부지런히 밭을 갈고 김을 맨다. 그러나 겨우 그 수확량의 반을 얻을 수 있다. 그러하지 아니하면 밭 갈 때 고용되고 김맬 때 고용되어 매일 골라 뽑을 뿐이다. 또 그러하지 아니하면 가히 고용될 밭이 없거나, 가히 고용될 집이 없다. 이에 걸식을 하거나 떠나게 된다. 혹은 가난하여 도적이 된다.

『농포문답』 균전제

其富者地大業廣連接阡陌, 驅役貧民, 有若奴僕, 不耕不穫. 而坐亨富豪之樂. 其貧者無立錐之地, 只賃富人田, 竭力耕耘. 而僅得其半. 不然則傭耕傭耘, 計日取直而已. 又不然則無可賃之田, 無可賃之家. 而或丏乞焉或流散焉. 或窮而爲盜賊者.

『農圃問答』 均田制

이 사료는 조선 후기 실학자 정상기(鄭尙驥, 1678~1752)가 저술한 『농포문답』 균전제에 기록되어 있는 농업 노동의 새로운 변화인 광작(廣作)과 용작(傭作)에 대한 내용이다.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생산력 발달을 배경으로 토지 소유와 농업 경영 방식에 변화가 일어났고, 이는 농촌 사회의 분해로 이어졌다. 조선 초기에는 상속을 제외한 일체의 토지 처분 행위가 금지되었으나, 세종 때부터 토지 매매가 허용되었다. 조선 사회의 이념인 왕토 사상(王土思想)과는 별개로 현실에서는 일찍부터 토지가 사적 소유와 매매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후기 들어 더욱 활발해졌으며, 이 시기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은 토지로부터 나온 농업 생산물뿐 아니라 토지 자체가 상품화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토지 거래 시 내역을 작성한 매매 문기(文記), 이를 관에서 공증 받는 입안(立案) 등의 문서로 확인되며, 이들 문서는 토지 소유권 분쟁이 있을 때 중요한 판결 근거로 활용되었다.

국가 차원에서 관리되는 토지 대장인 양안(量案)도 소유권 분쟁의 중요한 판결 근거로 활용되었는데, 이는 임진왜란병자호란 후 주인이 명확하지 않거나 황폐화된 땅, 양안에 파악되지 않았다가 발견하여 개간한 땅에 대하여 소유권 분쟁이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식자층인 양반은 분쟁에서 평민인 농민층보다 훨씬 유리하였다. 아울러 부세 부담, 고리채 이용, 관혼상제 비용 등으로 견딜 수 없게 된 가난한 농민들이 헐값에 자신의 토지를 내놓는 경우도 늘어났다. 이 때문에 양반의 다수는 손쉽게 토지를 집적할 수 있었고, 중간 관리자와 임노동자인 농민을 고용하는 지주로 성장하였다. 반면 양반이라도 농업 경영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할 경우 빈농으로 몰락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반대로 평민인 농민 중에서도 경영형 부농이 출현하였다. 지주제 확대에 따라 자기 소유 토지가 없는 농민이 늘어났는데, 이들은 지주로부터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기 위해 차경지(借耕地) 확보 경쟁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성장한 부농들은 지주들에게 지대 수취를 안정적으로 보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단 부농층이 된 경우 경작지 임대에서 소농이나 빈농층보다 우월하였다. 또한 이러한 토지 임대 권리 자체가 영구적인 성격으로 바뀌어 지주의 허락 없이 타인에게 매매 양도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였다. 이로써 농민 간에도 부의 격차가 더욱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부농의 성장에는 새로운 농업 기술인 이앙법의 일반화 역시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앙법은 이전보다 노동력을 절감할 수 있고, 정해진 시기에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직파법에 비하여 생산고가 두 배나 되었고, 보리와의 이모작이 가능하여 단위 면적당 생산량 역시 증가하였다.

광작은 이 같은 경작지 확대와 농업 기술의 발달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하여 나타난 상업적 목적의 농업 경영이었다. 이는 농촌 사회의 분화를 더욱 촉진하였다. 애초에 광작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토지로부터 이탈한 몰락 농민층이 늘면서 이들이 소작인이 되거나 농번기 임노동자로 바뀐 데 있었다. 농업이 갖는 계절적 성격은 농번기에 노동력을 집중 투입해야 생산물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광작 농민의 경우 가족노동만으로는 노동력을 충당할 수 없어서, 노비를 늘리거나 용작(傭作)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밭 갈 때 고용하고 김맬 때 고용하여”라는 내용은 광작이란 농업 경영 방식 하에서 한시적 고용 노동이 일반화되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광작은 고용 노동자로 농업 경영을 한다는 의미에서 용작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용작은 고용작(雇傭作)을 줄인 말로서, 여러 가지 노동력 고용 형태가 포함되었다. 일반 농가에서 용작을 할 때 보편적으로 이용한 노동력 고용 형태는 품을 날일로 계약하는 놉과, 일정한 일의 양을 놓고 노동 계약을 하는 돈내기나 고지, 1년을 단위로 노동 계약을 하는 머슴 등이 있었다. 이러한 고용 노동자들은 이전부터 존재하던 장기 고용 노동층인 고공(雇工)과 달리 향촌에서 단기간 고용되었으며, 노비와 달리 신분적 예속성이 없었다. 아울러 이러한 고용처가 상시 제공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토지에서 이탈한 농민들은 농촌에서 고용 기회를 얻지 못할 경우 광산업이나 수공업장의 임노동자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광작과 용작의 농업 경영은 소농 안정을 정책적으로 추구했던 국가 지배층의 집약화 방향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 농업 경영 형태인 광작, 용작으로 대표되는 농업 임노동자의 출현은 비록 부분적이지만 생산수단과 인격적 예속에서 해방된 노동 형태로의 전환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봉건적 경제 체제가 동요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자본주의적 관계의 단초로 보아도 무리한 해석은 아닐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18⋅19세기 농업고용노동의 전개와 발달」,『한국사연구』77,최윤오,한국사연구회,1992.
저서
『한국농경세시의 연구』, 김택규, 영남대학교 출판부, 1985.
『조선후기 사회경제사의 연구』, 송찬식, 일조각, 1997.
『한국농촌사회연구』, 최재석, 일지사, 1969.

관련 사이트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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