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말하기를 “선혜와 대동이 방납(防納)
과 조등(刁蹬)
'방납(防納)' 관련자료
본래 독수리가 토끼가 지치기를 기다려 잡는다는 뜻으로, 간사한 수를 쓰거나 고의로 시세를 조작하는 행위를 말함
의 폐해를 모두 없애 버렸으니 어찌 매우 좋은 제도가 아니겠는가. ”라고 한다. 답하여 말하자면, 이는 한때의 조잡한 법에 불과하다. 옛날부터 부(賦)가 있고 공(貢)이 있었는데, 대동법
은 공을 바꾸어 시역(市易)으로 한 것이다. 비록 이익이 있고 그 편안한 것도 역시 많으나 어찌 완전한 양법(良法)이라 하겠는가. 공법(貢法)
은 본래 시행하지 못할 이치가 없는 것인데, 조등⋅방납
이 법이 없는데서 나와 시행하지 못하였다. 시험 삼아 베[布]⋅모시[苧]⋅광목[綿]⋅명주[紬] 등의 각종 토산을 가지고 말하면 각 산출처(産出處)에 원액(元額)의 공가(貢價)
를 정해서 지급하되, 매필(每匹)에 몇 냥(兩)으로 가격을 정하여 한 도(道)에서 각각 몇 운(運) 몇 강(綱)을 호조에 직접 납부하게 하고, 호조가 감독해서 받고 보관하여 절일(節日)마다 진입(進入)한다면 조등의 폐해가 어디에서 생기겠는가. 그러나 우리 조정은 고려의 기인법(其人法)
을 시행할 수 없어서 그러한 것이겠는가. 대저 지방의 세력 없는 관리로 하여금 여러 상사(上司)에 물산(物産)을 직접 납부하게 하였으니, 침어(侵漁)
'대동법' 관련자료
'공법(貢法)' 관련자료
'방납' 관련자료
'공가(貢價)' 관련자료
고려 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토호
세력의 자제를 인질로 서울에 머물러 있게 한 제도
의 잘못된 풍습을 준용(遵用)하여 위로는 진어(進御)하고 아래로는 각사(各司)에 소용되는 것을 모두 각 읍(邑)으로 하여금 담당하여 진납하게 하였으니, 침탈하고 조종(操縱)하는 길이 한없이 번거롭게 된 것이다. 이것이 어찌 공법
'토호' 관련자료
'공법' 관련자료
어부가 고기를 잡듯이 함부로 남의 것을 빼앗는 것
하고 점퇴(點退)
납부한 물품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정해서 되돌리는 것
하는 병폐가 생겨나는 것은 필연의 이치인 것이다. 또한 소⋅양⋅돼지⋅염소⋅닭⋅오리⋅채소⋅과실⋅꿩⋅토끼의 물종(物種)을 가지고 말하면 이것이 어찌 지나치게 많은 값을 지급하고 구입해서 쓸 물건이겠는가. 서울 근방의 비옥한 관아의 땅, 목장 등과 같은 곳이나 산골짜기의 시장 같은 곳에 백성을 모아 나누어 주고, 관아에서 가축의 종자를 주어 자양(孶養)하게 한다. 가령 종우
3)
을 설치할 때에 당사자들의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種牛, 씨를 받기 위하여 기르는 소
1000마리에서 1년에 자생우(孶生牛) 몇 마리를 가져다 쓰게 하고, 종계(種鷄)
계란을 생산하는 닭
1만 마리에서 1년에 달걀 몇십만 개와 채소⋅과실⋅시탄(柴炭)
땔나무와 숯
몇 근을 가져가고 엄히 금령을 마련하여 중국의 응금산장(應禁山場)과 같이 하면서 해마다 관아의 땅에서 물종(物種)을 마련한다면, 백성은 가축의 종자를 받는 두둑한 이익이 있고, 국가는 한 푼도 소비하지 아니하고 나라에 바칠 물품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곤궁한 백성들이 애써서 경작하여 수확한 쌀을 긁어모아 몇 배의 값으로 많게 정하여 공물 주인(貢物主人)1)
에게 물건을 살 이유가 있는가. 해마다 계산하여 주는 것이 한계가 없으니 국가의 경비가 이 때문에 지탱하기 어려운 것이다. 국초(國初)에 공안(貢案)2)
을 정할 때나, 뒷날 선혜청(宣惠廳)
'선혜청(宣惠廳)' 관련자료
3)
17세기 대동법
의 실시와 함께 설치된 관청으로, 대동미(大同米)⋅포전(布錢)의 출납을 관장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대동법' 관련자료
또한 무역의 경우에 있어서도 물가를 평준하게 하는 권한은 당연히 국가에 있어야 하며, 시장 물건의 가격 결정은 당연히 유사(有司)
의 매매라 하더라도 처음부터 제도를 정하고 한계를 정하지 못하고 한없이 비싼 가격을 쳐서 지급하여 생선 한 마리, 과일 한 개에 거의 1곡(斛)을 소비하니, 이것이 어찌 이치에 닿는 일이겠는가.
평시서(平市署)를 의미함
에게서 나와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사민(四民)
사(士)⋅농(農)⋅공(工)⋅상(商) 네 가지 신분의 백성
의 업(業)이 나누어지지 아니하고 상판(商販)의 길이 성행하지 못하여, 물가의 높고 낮음이 오직 상인에게 달려 있고, 이익을 얻는 길이 몇 군데가 되는지를 알지 못하니, 나라가 가난하고 재정이 고갈할 것은 이치가 당연한 것이다. 비록 공가
'공가' 관련자료
말하기를 “사물(事物)이 제일(齊一)
똑같이 가지런함
하지 못한 것은 사물의 본정(本情)이다. 물건의 많고 적음이 때에 따라 한결같지 않으니, 어떻게 가격을 정하겠는가. 이 때문에 두 배의 값으로 넉넉하게 공급하여 항상 나라에 물건을 바치게 한 것이다 ”라 한다. 답하여 말하자면, 금(金)이 귀하고 동(銅)이 천한 것은 참으로 사물의 이치가 고르지 못한 것이다. 지극히 천한 생선과 과일을 어째서 번번이 가격을 곱절로 주어야 할 이치가 있는가. 문벌(門閥)을 숭상하기 때문에 사민의 업이 나누어지지 못하고, 사민의 업이 나누어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매매가 활발하지 못하다. 매매가 활발하지 못하기 때문에 물가가 뛰어오르고, 물가가 뛰어오르기 때문에 공인(貢人)
이 감히 가격을 많이 요구하는 것이니, 어찌 통탄스럽지 아니한가. 무릇 물건이 귀하다는 것은 잠시 귀한 데 지나지 않을 뿐, 절종(絶種)될 이치는 없는 것이어서 상업이 크게 융성하면 귀하다고 하는 것이 귀하지 않으리니, 사방에서 모여들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무릇 시장 물건은 마땅히 몇 등급으로 시가를 나누어 정하는 것이다. 매년 네 계절마다 시관(市官)
'공인(貢人)' 관련자료
시전을 관리하고 물가를 조절했던 평시서의 관원
이 법부(法府)
법을 관장하던 관청인 형조, 사헌부, 한성부의 별칭
의 여러 관원과 함께 모여서 물가를 평가하여 평상의 해에는 본래의 등급대로 주고, 조금 귀한 해에는 그 다음의 등급으로 올려 주며, 또 조금 더 귀한 해에는 한 등급을 올려서 지급하는 것이 옳겠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물가가 정당해지고 경비가 절도 있게 되어 오늘날처럼 한없이 새어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혹은 말하기를 “공가
를 넉넉하게 지급하는 것은 유안(劉晏)이 선각모(船脚耗)를 넉넉하게 지급한 것4)
과 비슷한 것이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오래도록 시행되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한다.
'공가' 관련자료
4)
유안(劉晏)이 선각모(船脚耗)를 넉넉하게 지급한 것 : 유안(劉晏)은 당(唐)나라의 명신(名臣)이다. 유안이 국가가 어려운 시기를 만나 이재(理財)의 재주를 발휘하여 고갈된 국가 재정을 부흥시키기 위하여 소금 또는 쌀 등을 운반하는 회조선(回漕船)에 대한 노고비를 후하게 주었다. 선각(船脚)은 회조선의 감독자인 선두(船頭)이고, 모(耗)는 선두에게 주는 노고의 대가이다.
답하여 말하자면, 선각의 모는 소금을 파는 경비와 쌀을 운반하는 노고를 위한 것이었다. 주는 바가 비록 많기는 하였으나 얻는 이익은 백배나 되어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지금 공가
는 백성의 기름을 긁어모아 놀고먹는 간활한 시정배를 살찌우고 있어서, 나가는 것은 항상 많고 들어오는 것은 항상 적다. 이는 곧 나라를 좀먹게 하고 백성의 기름을 긁어내게 하는 폐단이 되는 것이다. 어찌 이것이 이와 같은가.
'공가' 관련자료
『우서
'우서' 관련자료
-
공인(貢人)
'공인(貢人)' 관련자료'대동법' 관련자료
- 조선 시대 정부 예산의 기초를 이룬 문서이다. 조선 정부는 해마다 그 이듬해에 각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과 수량을 책정하여, 대동법
'대동법' 관련자료'대동법' 관련자료'공인' 관련자료
- 17세기 대동법
'대동법' 관련자료
- 유안(劉晏)이 선각모(船脚耗)를 넉넉하게 지급한 것 : 유안(劉晏)은 당(唐)나라의 명신(名臣)이다. 유안이 국가가 어려운 시기를 만나 이재(理財)의 재주를 발휘하여 고갈된 국가 재정을 부흥시키기 위하여 소금 또는 쌀 등을 운반하는 회조선(回漕船)에 대한 노고비를 후하게 주었다. 선각(船脚)은 회조선의 감독자인 선두(船頭)이고, 모(耗)는 선두에게 주는 노고의 대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