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사회신분제의 동요

서얼 허통론

하늘이 인재를 내린 것이 그토록 다르지 않사옵니다. 그러므로 전얼(顚蘖)과 변지(騈枝)1)도 고루고루 비와 이슬에 젖고, 썩은 그루터기 나무나 더러운 두엄에서도 영지(靈芝)가 많이 나며, 성인(聖人)이 태평의 치세로 이끄실 적에는 귀하고 천한 선비가 따로 없었습니다. 『시경』에 “문왕(文王)이 장수를 누리셨으니 어찌 인재를 육성하지 않으리오[文王壽考 遐不作人]”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왕국이 안정되었으며, 크나큰 명성이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아, 우리 왕조가 서얼의 벼슬길을 막은 지 300여 년이 되었으니, 폐단이 큰 정책으로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옛날을 상고해도 그러한 법이 없고, 예법과 형률을 살펴봐도 근거가 없습니다. 이는 건국 초기에 간사한 신하들이 기회를 틈타 감정을 푼 것이 바로 중대한 제한 규정으로 되어 버렸으며, 후대에 요직에 있던 인사들이 공론을 핑계 대어 주장함으로써 명성이 높아지자 오류를 답습하여 하나의 습속을 이루었고, 세대가 차츰차츰 멀어지면서 구습을 따르고 개혁을 하지 못했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조정에서는 오로지 문벌만을 숭상하여 인재를 초야에 버려 둔다는 탄식을 초래하였으며, 사가(私家)에서는 한갓 명분만을 엄히 하여 마침내 인륜을 무너뜨리는 단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지족(支族)에게서 양자를 입양하니 대개 임금을 속이는 죄를 범하는 것이요, 모계를 더 중시하는 셈이니 도리어 본종(本宗)을 높이는 도리를 경시하는 것입니다.

아아, 적자와 서자 사이에 비록 차등이 있다 해도 나라의 체통에는 이로울 것이 없으며, 구분과 한계가 너무 각박하여 가족 간에 애정이 적어지는 것입니다. 무릇 자기 집안의 서얼이야 비천하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온 세상에서 배척받을 이유는 없으며, 한 문중의 명분은 의당 엄히 해야겠지만 온 조정에서까지 논할 바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명분의 논의를 고수하다 보니 벼슬길을 막는 관례는 더욱 심해지고, 조종(祖宗)의 제도라 핑계 대다 보니 갑자기 혁신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날까지 안일하게 세월만 보내면서 개혁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옛날에도 상고할 데가 없고 예법에도 근거가 없는데도 나라를 다스리는 데 큰 고질이요 깊은 폐단이 되고 있기에, 정치하는 올바른 방법을 깊이 아는 선정(先正)과 명신(名臣)들은 모두 이를 급선무로 여기고, 공정한 도리를 확대하여 반드시 벼슬길을 터 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경연(經筵)에서 아뢰고 차자(箚子)로써 논한 분들이 끊이지 않고 나왔던 것입니다.

역대 임금들께서는 공정한 원칙을 세워 통치의 법도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으며, 벼슬자리에는 어진 사람만 임명하고 직무를 나누어 맡기는 데는 능력만을 고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두를 공정하게 대하였으니, 어찌 또 모계의 귀천(貴賤)을 가지고 차별을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조정에 임하여 널리 묻고, 그 처지를 애통해하며 불쌍히 여겨, 변통하여 벼슬길을 열어 줄 방도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연암집』권3, 의청소통소

1)전얼(顚蘖)과 변지(騈枝) : 전얼은 쓰러진 나무에 난 싹을 말한다. 『서경』 반경(盤庚)상에서 ‘약전목지유얼(若顚木之由蘖)’을 인용한 것이다. 변지는 변무지지(騈拇枝指)의 줄임말이다. 변무는 엄지발가락이 검지발가락과 붙어 하나가 된 것을 가리키고, 지지는 엄지손가락 곁에 작은 손가락 하나가 더 생겨 육손이가 된 것을 가리키는데, 모두 쓸모없는 물건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한데 붙은 기형적인 나뭇가지라는 뜻으로 쓰였다.

云云天之降才, 非爾殊也. 故顚蘖騈枝, 均霑雨露, 朽株糞土, 蒸出菌芝, 聖人致治, 士無貴賤. 詩云文王壽考, 遐不作人. 是以王國克寧, 駿聲不已. 嗚呼. 國朝廢錮庶孽三百餘年矣, 爲大敝政無過於此. 稽之往古而無其法, 攷諸禮律而無所據. 則此不過國初宵小之臣, 乘機售憾, 遽成大防, 而後來當途之人, 託論名高, 襲謬成俗, 年代浸遠, 因循不革矣. 由是而公朝專尙門閥, [缺] 遺才之歎, 私家 [缺] 嚴 [缺], 爲斁倫之端. 以之立後於支族, 則率犯欺君之科, 歸重於外黨, 則反輕宗本之義. 噫嘻等威 [缺] 殊, 而無益於國軆, 區限太刻, 而少恩於家庭. 夫自家之庶孽, 則誠足卑矣, 非可絀於擧世, 一門之名分, 則固當嚴矣, 非可論於通朝耳. 然而膠守名分之論, 則枳塞轉深, 諉以祖宗之制, 則更張猝難. 玩愒至今, 因循而不革者何也. 於古則無稽, 於禮則無攷, 而爲有國大痼深弊, 則先正名臣深識治道者, 莫不以此爲先, 恢張公理, 必欲疏通. 筵陳箚論, 前後相望. 列聖建中, 治軆蕩蕩, 設官須賢分職, 惟能一軆均 [缺], 豈復差於 [缺] 哉. 故未甞不臨朝博詢, 䀌然矜惜, 思所以通變疏滌之道.

『燕巖集』卷3, 疑請疏通疎

이 사료는 조선 후기 실학박지원(朴趾源, 1737~1805)서얼 소통을 청하는 「의청소통소」로, 『연암집(燕巖集)』에 실려 있다. 박지원은 「의청소통소」에서 일부의 건의에 의해 시행된 서얼의 관직 진출이 고착된 지 이미 300여 년이 지났는데, 공론이란 이유로 고치지 않고 지속되어 왔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서얼 차별로 인해 인재를 초야에 묻어 두고 쓰지 못하는 폐단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가족 내에서도 친자식을 두고 양자를 입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강조하고 있다. 결국 이것은 국가에도 이롭지 않고 가정에도 이롭지 않으니 서얼의 벼슬길을 열어 줄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양반의 자손이라도 첩의 소생은 관직 진출을 막아 놓았다. 서(庶)는 양인 첩의 자손이고, 얼(孼)은 천인 첩의 자손을 말한다. 고려 때까지는 서얼에 대한 차별 대우가 별로 없었으나 조선 시대에 이르러 서얼에 대한 차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서얼 금고법은 1415년(태종 15년)우대언(右代言) 서선(徐選, 1367~1433)이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이 특정한 인물에 대해 경계심을 갖는 것을 살펴 종친 및 각 품의 서얼 자손에게는 관직을 허용하지 말 것을 주장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에 여러 행태의 차별이 더해져 『경국대전』에서 법규로 정리하여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르면 서얼은 문과⋅생원⋅진사시과거에는 아예 응시할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때때로 서얼이 관직에 등용되는 경우는 주로 기술직에 제한되어 서얼이 기술관과 비슷한 중인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중종(中宗, 1488~1544)조광조(趙光祖, 1482~1519)서얼허통을 제기하였고, 16세기 이후 이이(李珥, 1536~1584)와 그 후 최명길(崔鳴吉, 1586~1647)서얼허통을 주장했으나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서얼소통 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서얼들은 집단적인 시위나 상소를 통해 자신들에 대한 차별 대우를 없애 줄 것을 요청하였다. 선조(宣祖, 재위 1567~1608) 초에는 1600여 명이, 1695년(숙종 21년)에는 988명, 1724년(영조 즉위년)에는 5000여 명이 연명 상소하여 서얼 차별의 억울함을 호소한 것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서얼들은 자신들이 직접 시위와 상소를 올리는 것뿐 아니라 양반들을 동원하여 허통 운동(許通運動)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769년(영조 45년) 사직(司直) 이수득(李秀得, 1697~1775)이 서얼소통에 관한 상소를 올리고, 서얼소통에 관한 상소문과 계문 그리고 문답 등을 모아 책으로 만들어 올리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1779년(정조 3년) 규장각검서관 제도를 두어 서얼들을 다수 등용하기도 하였다. 당시 서얼허통에 대해서는 서얼들뿐 아니라 많은 양반 실학자들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박지원서얼 출신이던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이덕무(李德懋, 1741~1793)유득공(柳得恭, 1749~1807)⋅서이수(徐理修, 1749~1802) 등과 가까웠기 때문에 서얼 문제에 대해 더욱 깊은 관심을 갖고 이 글을 쓰게 되었다.

1823년(순조 23년) 9996명에 달하는 서얼 유생들이 집단으로 허통을 상소하였고, 1827년(순조 27년)에는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가 서얼의 허통을 명하기도 하였다. 집단적인 상소헌종(憲宗, 재위 1834~1849)철종(哲宗, 재위 1849~1863) 때도 끊이지 않고 발생했는데,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이 시행되어 서얼 차별의 오랜 폐단이 사라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후기의 서얼허통」,『경북사학』10,배재홍,경북사학회,1987.
「조선시대 서얼의 신분적 지위와 재산소유」,『영남이공대학교 논문집』,신동근⋅김용만,영남이공대학교,1989.
「16⋅17세기의 서얼소통논의에 대하여」,『동국사학』 19⋅20합,이종일,동국사학회,1986.
「19세기 서얼소통운동에 대하여」,『한국사연구』58,이종일,한국사연구회,1987.
저서
『박지원소설연구』, 김영동, 태학사, 1988.
『조선후기사회변동연구』, 정석종, 일조각,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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